내부와 외부, 그 경계에 선 자의 이야기
글로벌 시티 매거진 <타임아웃서울> 2016년 01월호 아트 리뷰의 원고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지난 12월 1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서 < 윌리엄 켄트리지 William Kentridge: 주변적 고찰 >이 열리고 있다. 서울관 개관 이래 개인전으로는 최대 규모인 이번 전시는 실로 웅장하게 다가오는 가뭄의 단비 같다.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목탄 트로잉과 애니메이션, 영상 설치 작업까지 총 108점 중 하나의 작업도 쉬이 버릴 수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20세기 중반부터 활개 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만연하던 요하네스버그에서 인권 변호사의 아들로 보낸 유년 시절은 그에게 항거할 수 없는 시대적 부조리로 각인되며 마치 일기를 쓰듯 작업 곳곳에 스며드는 원천이 됐다. 회화, 연극, 필름 등 여러 분야를 거쳐 안착한 분야는 목탄 드로잉.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고 그린 후 수정이 가능해 우리 삶의 불확실성과 임시성을 잘 보여주는 매체라는 이유다.
묵직한 정치적 상황을 주제 삼아 그린 드로잉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행동을 반복하며 이를 재편집한 애니메이션 기법을 차용해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의 작업은 강력한 흡입력으로 관람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마법처럼 슬픔과 기쁨을 오가게 하며 정치, 사회적 문제를 시적으로 직시해 역동적인 놀라움을 안긴다.
이제 인권을 넘어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넓은 주제 의식을 탐구하는 그의 다채로운 면모를 흠뻑 느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번 전시의 큰 미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업은 2012년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 출품한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다. 거칠고 지저분한 공사장처럼 연출한 어두운 공간에서 산업화 이후 인간을 구속한 그리니치 표준시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장면을 담은 5 채널 영상 작업은 '코끼리'라 불리는 목재 기계의 거친 움직임, 우리 내면의 맥박을 깊게 건드리는 주제 음악과 어울려 15분의 짧지 않은 시간을 환상적으로 이끈다.
매 전시 환경에 맞춰 최적의 상태를 추구하는 전시 디자인은 이번 서울관에서도 여실히 빛난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건 검소한 재료와 탁월한 배치가 만들어낸 서정적인 전시 디자인 덕분이리라. 총 관람 시간은 3시간에 육박하지만 연대기적 배치가 아닌 터라 시간 날 때마다 가보는 용기를 부려도 손해 볼 것 없는 절호의 기회다. 공동 주최기관인 중국 베이징 울렌스 현대 예술센터(UCCA)가 먼저 선보인 작년 전시는 현지에서 '올해의 전시'로 뽑혔다. 윌리엄 켄트리지 전은 오는 3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시간의 거부'와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들
남아공에서 반란군을 진압할 때 사용한 장갑차인 '캐스피어'에 희생된 사람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대형 드로잉 작업.
1904년부터 3년간 일어난 나미비아 대학살을 키네틱 조각과 음악, 기계장치가 어우러진 미니어처 극장에서 무대 형식을 빌려 고발하는 작업.
8 채널 영상 설치 작품 '더 달콤하게, 춤을'에서 인물들이 행진할 때 사용한 실루엣. 광범위한 전시장 곳곳에 설치돼 전시 디자인 측면에서 시각적인 안내 역할도 병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