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사물의 진본성을 노출시킨다
두산그룹은 사람 그 자체의 품성과 노력을 존중한다는 ‘사람이 미래다’ 캠페인을 통해 그룹의 호감도를 굉장히 올린 바 있다.
그런데 근래 두산인프라코어의 경영 위기로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신입 사원까지 그 리스트에 올려 갖은 압박을 하다가 언론에 보도된 후 그룹 이미지가 완전히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독특한 회장님’으로 불리며 트위터로 젊은이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던 박용만 두산 회장은 뒤늦게 신입사원을 희망퇴직 리스트에서 빼라고 공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동안 쌓아온 그룹 오너의 개방적인 이미지는 도리어 이번 일을 계기로 젊은이들의 분노를 정면으로 맞이하며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정말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씁쓸한 풍경이었다.
이런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위기는 사물의 치장을 발가벗겨 그 진본성을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위기는 기회다. 우리가 평소 인지하지 못하던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계기를 만들어주니까 말이다.
디자인이라고 예외일까. 경제 불황을 예상하는 2016년은 디자인에 대한 기업과 사람들의 인식을 명확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래 들어 디자인 경영부터 시작해 ‘디자인이 기업의 미래’라고 떠들어대며 막대한 돈을 투자하던 수많은 기업들은 위기의 파도를 겪으면서 디자인에 대한 대처를 시작할 것이다.
기업 이미지를 분칠 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디자인을 다루던 곳은 자신의 앙상한 디자인 철학을 여과 없이 노출할 것이며 디자인을 기업의 핵심 역량이라 생각하고 안팎으로 단단하게 디자인적 사고를 활용하던 곳은 그 존재감이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디자이너 또한 마찬가지다. 유명 디자인 회사와 스타 디자이너의 능력은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그 명암이 달라질 것이다. 트렌드에 편승해 눈속임으로 작업하던 쭉정이 회사와 디자이너는 위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르륵 밀려날 것이다.
오히려 화려하지 않지만 묵묵히 작업에 몰두하며 제 나름의 철학을 고수하던 이들은 진흙이 씻겨간 자리에 남아 마치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내지 않을까. 애초부터 진지한 태도로 완벽함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드디어 주목받는 것이다.
그리스 조각의 최고봉이라 불리던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을 맡으며 아테네 시의 재무관과 마찰을 빚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건 지붕 조각의 앞 부분일 뿐이므로 보이지 않는 뒷부분에 대한 금액을 지불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때 페이디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들은 보고 있다네.”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또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맡으면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꼼꼼히 작업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조수의 의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안다네.”
기술의 발달로 당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뒷부분과 천장화 구석을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그들의 선견지명을 온몸으로 느끼게 됐다. 올해 우리가 알게 될 진실은 어떤 것일까. 화장이 지워진 민낯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매거진 <CA> 2016년 1월호 'INSIGHT' 칼럼을 수정, 보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