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는 첫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지요?
샌프란시스코행을 결심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여러 선배분들과 동료들을 찾아가서 제 계획을 설명 드렸었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첫 달, 그리고 앞으로 두 달 동안은 저에게 탐색의 시간을 주려고 합니다. 어떠한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기 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저를 부유한 상태로 두면 좋겠다 싶어요. 지난 저의 경험이나 지식들로 인해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저를 가둬두고 싶지 않습니다. 미국행을 결정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난10년 시민사회와 정치, 또는 행정의 공간에서 벗아나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조금은 색다른 감각들과 마주치고, 그 우연의 마주침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쫓아가 볼 생각입니다. 온전히 직관이나 감각의 흐름을 따라가 보려고요. 그러려면 정해진 목표에 얽매이기 보다는 새로운 생각들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도록 그 흐름에 몸을 맡겨 보려고 합니다.
주로 낮에는 ESL을 다니며 영어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페루, 대만 등 에서 온 친구들이 많습니다. 페루 친구는 그 나라의 유명한 축구선수이고, 사우디아라비아 친구는 석유사업을 하는 집안의 자제라고 하네요. 지도에서만 봤던 나라들이 저의 한 인연으로 맺어지니 다르게 느껴집니다. 인간적인 교류가 생기니 그 나라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한 번쯤은 중남미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은 한국을 좋아하고 제가 꼭 자기 나라로 여행을 오기를 바라더군요.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종종 오후에는 SFMOMA 미술관을 갑니다. 일 년 내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멤버십을 구입했습니다. 좋은 점은 1명의 게스트를 무료로 데려갈 수 있는 혜택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외국인 친구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전날 미리 봐 두었던 작품들을 영어로 설명할 수 있게 연습해 두었다가 마치 미술에 꽤 조예가 있는 척 설명을 합니다(?). 제가 잘 설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설명을 재밌게 듣는 것 같습니다. 온전히 저 혼자의 착각인지도 모르죠. 어쨌든 제 영어공부를 위한 나름의 노하우입니다. 지금은 앤디워홀 특별전을 하는 중이라 앤디워홀에 대해서 좀 더 관심 있게 찾아보는 중이에요.
여행이 아니라 산다고 생각하니 일상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짧은 여행이라면 유명한 관광지를 중심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핫플레이스에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소비했을 텐데요. 어떻게 보면 여행은 사는 것(buy)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기념품을 사거나 맛집을 가서 음식을 사 먹거나 등등.. 그러나 여기에 산다고(live) 생각하니 하루, 하루를 평범하면서도 의미 있게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묻게 됩니다. 그것이 어떤 반복된 루틴일 수도 있고, 단조로운 일상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하루 일정을 아이폰 미리 알림을 설정해 두었습니다. 6시가 되면 모닝콜이 울리고, 8시 30분에 수업이 시작돼요. 점심시간이 30분밖에 안되어서 간단하게 서브웨이나 도시락을 먹고 바로 오후 수업이 시작됩니다. 오후에는 주로 라이팅 수업을 하는데 그 시간이 제일 기다려지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매일 특정 주제를 정해서 영어에세이 1장을 빼곡히 적어서 제출합니다. 그래도 사회혁신으로 밥벌어 먹었다고 주로 혁신이슈를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우버와 같은 모빌리티 플랫폼이나, 페이스북의 독점을 문제제기 한 공동창업자 휴스 등을 주제를 다뤘습니다.
처음 일주일은 수업이 끝나고 뭐해야 할지 난감했답니다. 어디 핫플레이스를 놀러 갈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네이버에 샌프란시스코 TOP10 여행지를 검색해보기도 했는데요. 별로 흥미가 가지 않더라고요. 여행이 아니라 산다고 생각하니 도시를 대하는 저의 태도나 감각이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매일 관광하듯 하루를 채워간다면 오히려 더 지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행은 어쩌다 한번 해야 행복하듯, 그것이 일상이 되면 과연 행복할까? 그렇게 돌아 돌아 저에게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처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나의 일상을 어떻게 평범하게 채워갈 것인가?
평범하지만 단순한 일상을 반복해가는 삶, 특별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배경 같은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입니다. 생각해보면 청와대 행정관이나 서울시 비서관의 경험도 저에게는 일상이 아닌 특별한 여행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요 근래 한국 뉴스를 보면 유명한 정치인들이 말도 안 되는 망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아마 추측컨대 그분들이 그런 막말을 하는 이유는 미디어에 노출되고 싶은 정치적 욕망에 기초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폭죽처럼 터트리며 미디어의 중심에 서고 싶은 욕망. 그 다이내믹한 사건들이 어쩌다 한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 그 욕심으로 인해 일상의 평범한 삶들이 오히려 시시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아닐까. 매일매일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으며 안될 것 같은 불안감과 위태로움. 결국 일상을 포기한 삶, 반짝이는 순간을 쫒아가는 삶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텐데... 애초에 왜 정치를 시작했는지? 비전은 무엇인지는 온 데 간데없고 미디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내 생애 스포트라이트의 순간이 얼마나 될까?
과연, 오기는 할까?
어쩌면 누군가에는 평생 일어나지도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이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반짝이는 그 순간을 잘 감당하며 롱런하는 사람들은 소수인 반면 폭죽처럼 잠깐 터지고 사라져 버리거나 괴물이 되어 망가지는 경우가 대다수 인 것 같아요. 그둘의 차이는 결국 그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일상이라는 캔버스에서 종종 반짝이는 순간들이 찾아 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마치 영원히 자기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 언제든지 단순하고 시시해 보이는 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의 태도.
결국 재미없어 보이지만 그 평범한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항상 경계하고 있어요. 잠깐의 특별한 순간들을 마치 내 일상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어쩌다 한번 내 생애 비친 스포트라이트 장면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배우에게는 무대 위 대상을 수상한 영예의 순간일 수도 있고, 운동선수에게는 올리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순간일수도 있고, 작가에게는 자신이 출간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순간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 가장 빛낯던 순간의 이면에는 아주 지긋지긋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을 잘 버터 내며 살아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후에도 다시 그 반짝이는 순간을 쫒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애초에 추구했던 가치나 비전을 일상에서 단단하게 녹아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일상을 그려나갈 것인가? 저는 그 질문에 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도서관, 미술관 MOMA와 YERBA BUENA PARK, 그리고 24hour fitness 로 응답하고 있더군요. 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들입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거나 영어공부를 합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MOMA 미술관을 가서 딱 한 층의 전시만 감상하곤 합니다. 여행을 가서 미술관을 가면 항상 시간에 쫓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사진만 찍고 후다닥 나왔던 기억만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여유롭게 한층에 전시에 있는 작가와 그 세계를 탐하는 시간은 이전에 느끼지 못 해던 새로운 미술세계를 경험하게 해 줍니다. 그렇게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바로 앞에 펼쳐진 잔디밭에 누워 책을 보기도 커피를 마시기도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일교차가 커서 햇빛이 강렬하게 비추지만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공원에 누워있으면 스르륵 잠이 옵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꿀잠을 자면 이보다 더 좋을수가 없습니다.
ESL 수업이 끝나면 24hour fitness에 가서 매일 5km를 뜁니다.
그러고 나면 미술관을 가서 딱 한층의 전시만 집중적으로 감상을 하고,
도서관에서 가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영어공부를 합니다.
종종 날씨가 좋을때는 미술관 앞 공원에서 낮잠을 자는데
적당한 햇살의 온도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그렇게 꿀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학교와 도서관, 미술관과 공원, 그리고 헬스장은 저의 샌프란시스코의 기본동선이자 라이프스타일이며 단순한 루틴으로 자리 잡아가는 중입니다. 저는 이 습관의 규칙적인 리듬이 좋습니다. 하루의 자연스러운 동선과 다른 공간이 주는 다른 감각들,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저의 태도나 감정들이 일정한 규칙속에서 새롭게 변주 됩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처럼 저는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제 자신을 좀더 풍요롭게 해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 작고 소소한 일상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저를 보며 옆에 있던 할아버지께서 블라인드를 올려 주시네요. 빛이 더 많이 들어오면 환해져서 글쓰기 좋다며... 그 분의 작은 배려 덕분에 다시 한번 햇살의 소중함을 느끼며 감사한 순간을 마주칩니다. 이런 작고 소소한 순간들을 매일 기록하고 마침표를 찍으며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저는 이 끝을 고요하지만 박력있는 마침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꾹 점을 찍고 나면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다는 자기만족감과 성취감이 좋습니다. 저의 지난 샌프란에서의 한 달은 바로 그 평범하지만 내 삶의 기초가 되는 반복된 루틴을 디자인하는 시간이였습니다. 지난 한달은 앞으로 3년이라는 시간동안 펼쳐질 스토리의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문득 나에게도 앞으로 과연 스포트라이트의 순간이 얼마나 올까? 과연 오기는 할까?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영화의 장르로 치자면 다이내믹한 액션영화일지, 계속 맞기만 하다가 마지막 라운드에서 역전을 노리는 복싱영화일지, 또는 지루하지만 담담하게 의미를 풀어내는 다큐멘터리 일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장르이든, 또한 그것이 세상에 얼마나 주목을 받든지 보다는 저에게 주어진 삶을 단단하게 살아가는것. 저는 그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가는 요즘입니다.
아무쪼록 지난 한달 제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고민으로 살아가는지를 잠깐이나마 글로 소식 전합니다. 당분간은 어떤 혁신이슈나 연구주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며 저의 삶의 태도와 감각을 자유롭게 느끼며 글을 써 나가보려고 합니다. 지난 한달 샌프란시스코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과 응원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오늘 저의 감사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달에 한번은 이렇게 글로 소식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먼 샌프란시스코에서 성환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