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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ry Aug 23. 2020

8월 23일

베를린일기

 1. 

오랜만에 글을 쓴다. 지난 글을 더듬어보니 그때는 샌프란시코에 있었고, 지금은 베를린에서 쓰는 중이다.  

샌프란시스코와 베를린 그 사이에 무슨 일 일어난 것일까? 


2. 

한때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마음의 감정선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인다. 아팠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파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어렸을 때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맑아진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반대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작년은 위로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다. 아침의 피아노의 김진영 교수님의 글 이외에는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든다. 어설픈 위로는 독약이다. 마음만 약해진다. 일상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지만 그 일상의 소소함만으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서점가에 즐비한 자기 위로의 책들 대부분은 지나친 자의식과 약간의 허세와 멋으로 꾸민 일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점에 비해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교수님의 일상은 죽음을 앞둔 치열함과 담담함이 있다.  결국 삶은 자기 존재 이유의 치열한 싸움, 자기 목표에 대한 성취와 보람이 동시에 충족될 때 행복하다. 


3.

아픔을 통해 배운 유일한 원칙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죽을 정도로 아프지 않았지만 죽음에 관해 참 많이 생각했다. 죽음을 상상하면 던져야 할 질문이 명확해진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나는 어떤 승부를 할 것인가? 


4. 

작년에 큰 위로가 되었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다시 봤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딸에게 버림받고 낡은 체육관을 운영하는 코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살고 있는 힐러리 스웽크. 소위 사회에서 패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복싱을 통해 뜨거워지는 어떤 진한 우정은 삶의 축소판이다. 인생을 승부라는 세계로 규정한다면, 아군과 적군의 관계에서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는 관계는 빛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숙명, 도전, 모험을 피하지 않는다.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이다.

200% 내 안의 모든 수분을 짜낼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숨이 턱턱 막혀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무언의 손짓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질 수 있다는 사실. 그러나 어떤 분함, 어떤 억울함, 어떤 아쉬움이라는 감정들이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는 그 순간에 어떤 뜨거운 눈물들을 쏟아내고 나면 우리는 또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6. 샌프란시스코가  치유의 시간이었다면,  베를린은 승부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언제 링위에 오를지는 모른다. 다음 판이 언제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승부를 어떤 시선과 태도로 볼 것인가는 중요하다. 어차피 크고 작은 전투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면, 잘 준비해서 싸워야 한다. 싸움에서 자기 위로와 연민은 패전의 증후이다. 일상은 절대로 유유자적하지 않으며 크든 작든 싸움의 연속이다. 이제 원인 모를 자기 우울감을 걷어내고, 자기 연민의 기름기를 빼고 다시 내 앞에 다가올 어떤 모험과 도전, 숙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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