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X도자기 03]
청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면서 새로운 욕구가 늘어갔다. 우리는 경주에서 청자가 높은 수준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을 좀 더 널리 알리고 싶었기에, 과감하게 이벤트를 하나 만들었다. 경주 시내의 작은 공간을 빌려서 두 달간 해겸도요의 작품들을 전시한 것이다. 이름하여 [한국 도자기 연대기]. 도자기가 낯선 대중들에게 교양지식 혹은 약간의 선이해를 제공하기 위해서 DT 선생에게 5주간 강의를 청했다. 전시된 작품들을 아예 도자기 역사를 이해하는 강의교재처럼 활용해 보자는 취지였다.
문화예술작품은 잘 감상하려면 어느 정도의 선이해가 있으면 좋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품의 감상에서 지식은 후행하는 것일 수 있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좋은 예술작품은 소위 ‘와우(wow)’ 포인트가 있다. 맞대면했을 때 불가항력적으로 압도되거나 사로잡혀서 탄성을 터뜨리는 경험을 말한다. 그것이 예술작품이든, 종교적 경험이든, 인간의 깊은 감동에는 대체로 그런 차원이 있다. 설명은 그 감동 다음에 뒤따르는 것이고, 그런 다수의 현상을 설명하다 보면 이론도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 예술 현상을 맞닥뜨리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예술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태도가 좀 더 세련되어지거나 고급화될 수 있다. 나는 예술경험에서 ‘와우’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주시내에 전시회를 열어놓고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평소 잘 접하지 못하던 도자기들을 감상하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과연 이 도자기들이 정서적 감응력을 한껏 발휘해서 관람객들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모종의 예술 경험을 제공할 것인지, 아니면 맹숭맹숭한 느낌을 구구한 설명과 상찬을 곁들여서 가까스로 예술 경험을 한 것이라고 우기게 될 것인지 말이다. 고맙게도 그간 파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지식이 연대기적으로 꿰어지고, 잘 만든 도자기를 직접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다는 평을 여러 번 들었다.
관람을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가격에 관심을 먼저 보였다. 대체 이런 도자기는 어느 정도의 값을 매길 수 있는 작품인지 궁금해했다. 가격이 곧 가치로 통하는 것 같았다. 이해는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가격만 높으면 절로 명품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시대이니까. 그 전시회에는 해겸 선생의 작품들과 DT 선생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 그리고 비교 감상을 위해 중국 도자기 몇 점이 같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혹시 구매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를 위해 해겸 선생의 작품 중 두 점은 판매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서 가격을 정해 두었다. 이 작품은 가격이 얼마나 될까를 물어오는 관람객들에게 과연 그 작품은 얼마쯤 될 것으로 보이느냐고 되물으며 내기를 여러 번 했다.
그 작품들은 사람들이 예상한 가격보다 0이 하나나 둘 더 붙는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도자기의 가격을 고급 브랜드의 그릇 가격에 준해서 상상하는 것 같았다. 그게 합리적 기준일 수 있다. 차이는 같은 작품을 대량으로 생산한 공산품이냐,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냐에 있을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서 같은 가마에 구워도 결과물은 같지 않다. 공산품의 매력은 그 품질의 균일성에 있을 것이나, 예술품의 매력은 예술적 성취의 탁월성과 더불어 그 존재의 유일무이함에 있을 것이다. 그 차이는 21일간의 불가마를 견뎌내면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5주간에 걸쳐 도자기 역사 강의를 했다. 실제 도자기 작품들과 사진 자료를 다양하게 보면서 훑어내려 간 역사는 많은 지식을 전해주었지만, 동시에 매우 흥미로운 질문 앞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왜 중국이 아니라 고려에서 천하제일 청자가 등장했을까?
윤용이 교수는 "중국 절강성 월주요라는 청자의 요람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이미 1세기부터 청자가 만들어졌고,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근 수십여 곳의 가마에서 청자가 제작된다"면서 이곳 가마의 형태가 한반도 중부의 초기 청자 가마터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월주요 장인들이 고려 광종(재위 949-975) 시기에 건너와 고려 장인들을 훈련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초기 청자 가마터로 꼽히는 경기도 시흥의 방산동 가마터는 원래의 도기 가마터 위에 40m에 이르는 중국식 대형 벽돌가마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후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재위 992-1031)이 나주로 피신했을 때부터 인근의 강진과 고창 등지에 20m 정도 크기의 진흙가마를 만들어 청자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부터 청자는 한 번만 구웠던 벽돌가마 시기와 달리 초벌과 재벌 구이를 하는 방식으로 제작 방법이 바뀌게 된다. 중국과 다른 국내의 독자적 기술 발전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12세기 송나라의 뛰어난 도자기들이 수입되어 고려 왕실에 전해지게 되자, 이에 상응하는 고려청자의 대대적인 발전도 일어난다. 그 결과 강진에서는 최상품의 비색 청자가 생산되었는데, 송나라의 태평노인이 천하제일 명품을 나열하면서 “고려 비색청자가 천하제일”이란 평을 남길 만큼 높이 인정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근 해남에서는 생활 청자들이 대거 만들어졌는데, 완도나 군산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수만 점의 유물이 바로 해남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전반에는 아무런 도안을 넣지 않은 비색청자가 유명했으나, 12세기 후반부터는 표면에 문양을 파고 흰색으로 메꾼 화려한 상감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13세기부터는 부안을 중심으로 하는 상감청자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지점이 좀 있다.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기술은 누구의 것인가? 시흥 방산동 가마터의 예에서도 나타나듯, 고려청자는 진공상태에서 중국 사람과 중국 기술의 도입으로 이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이전 신라의 토기 제작 기술 위에 도입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들여온 벽돌가마가 이내 전통적인 진흙가마로 바뀌고, 중국과 달리 초벌과 재벌 구이를 함으로써 그 이전의 청자와는 다른 차원으로 환골탈태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최상급의 고려청자로 태어나게 된 것이 아닌가? 대체 고려의 도공들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청자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청자를 보고 이미 자신들에게 익숙한 기술들을 적용하면 결과가 더 낫겠다고 해서 혁신을 시도한 것이 아닐까? 중국에서 청자가 건너온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천하제일'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원천 기술은 중국의 것이었나, 신라-고려의 것이었나 궁금한 것이다.
윤용이 교수도 흥미롭게 지적하듯, 중국청자는 신라시대에도 종종 수입되었는데, 그 통로는 장보고(?-846)의 청해진이었을 것이다. 9세기부터 신라에서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융성했던 탓에 수많은 불교 승려들과 유학생들이 중국을 왕래하며 다완을 들고 들어왔다. 그중 중국 월주요의 청자다완과 형주요의 백자다완을 최고로 쳤다고 한다. 현재까지 청해진 일대에서는 청자를 제작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장보고 시절에 국내에서 청자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고고학적 증거가 빈약하다고 한다. 그러나, 월주요의 해무리굽 청자 등이 이곳에서 출토되는 등 중국 청자가 드나드는 해상무역의 통로 역할을 일찍부터 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근 지역의 도공들에게는 청자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의 경질토기와 고려청자 사이의 고고학적 연결고리가 제대로 채워지는 날이 온다면, 청자 기술의 중국도래설은 여러모로 수정되어야 한다. 나라에서 청자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그것을 수행한 도공들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그냥 인근의 도공들이었을까, 아니면 국내에서 이미 최고 능력을 인정받은 대표 선수들을 모아서 투입한 것이었을까? 그 도공들이 사용한 기술은 어디에서 어떻게 발전된 것인가? 만약 신라말-고려초의 한반도에서 도자기 기술을 이미 어느 정도 확보한 장인들을 모았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신라의 도공들이 아니었을까 추론해 본다.
경주 박물관에 가면 다들 별로 주목하지 않지만, 사실은 도자기가 엄청나게 많이 있다. 중앙전시관에도 주요한 대목마다 토기와 자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냥 흥미롭게만 보고 지나간다. 새로 만든 수장고 건물에 들어가면 여기는 아예 절대량이 토기와 자기로 채워져 있다. 도자기 역사를 좀 알고 나니, 혹시 경주에서 청자의 이전 단계로 간주될 출토물이 없는지 궁금했다. 수장고의 전시물을 샅샅이 찾아보다 보니, 방내리의 고분군에서 나온 출토품들 중에는 언뜻 보아도 청자 전단계로 간주될만한 그릇이 눈에 들어온다. 색깔은 청자의 비색이 나오지 않지만, 그릇의 형태며 표면에 바른 유약과 그로 인한 발색은 중국에서 전청자로 분류하는 기준에 어렵지 않게 들어갈 것 같이 보인다. 감은사지 출토 유물에서는 아예 고급한 상감청자 접시와 매병이 보인다. 이것이 경주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외부에서 유입된 것인지는 더 연구할 주제이지만, 흔히 감은사가 몽고 침입 때 황룡사 9층목탑과 같이 불탄 것으로 알려지는 것을 감안하면 고려시대에 고급 청자가 경주에서도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몇 출토품은 유물번호를 갖고 검색해 보니 일단 청자로 분류를 하고 있다. 어느 시대의 것으로 연대를 추정하는지 궁금했다.
경주의 고분에서 나오는 엄청난 규모의 부장품 중 절대다수가 토기와 그릇들이다.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남쪽 고분에서 황금왕관과 더불어 수천 점의 그릇이 나왔다. 당시 그릇은 무덤에 같이 묻어줘야 할 만큼 대단한 부의 상징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경주 인근에는 가마터가 많이 있었을 터인데, 아직 가마터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충분하지 않다. 보통 가마는 불 땔 나무가 있는 산의 비탈에 조성해서 근처 나무를 다 때고 나면 다른 산으로 옮겨가곤 한다고 한다. 경주처럼 수요가 많은 곳이라면 거의 산업 단지 규모의 도요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의 천북 지역을 비롯해서 여러 곳의 가마터가 발굴되었지만, 아마 훨씬 더 많은 수의 크고 작은 가마터가 경주 인근 산지에 흩어져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해겸선생은 신라의 토기가 높은 온도의 불로 구워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대에 재현된 신라 토기들이 검은색이나 짙은 회색을 띠는데 반해 신라시대의 출토물들은 밝은 회색인 경우가 많다. 이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토기들은 800도 전후의 낮은 온도에 연기에 노출되어서 구우면 검은색이 짙어지는 반면, 1,000-1,200도의 고온 환원불에서 구우면 색이 밝게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은 신라토기 시절에 이미 고온의 환원불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라의 경질토기 중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지만 가마 안에서 재가 흩날려서 그릇 표면에 앉은 것이 고온의 불에 녹아서 유약처럼 유리질 층을 형성하는 현상이 자주 관찰된다. 나중에 이런 재를 물에 타서 잿물을 만들어서 유약으로 쓰게 된다.
본격적인 청자 기술로 넘어가기 이전에도 후기의 신라토기에서는 고온의 환원불 기술이 쓰이고, 재가 앉아서 녹아 유약의 역할을 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으니, 어느 순간 유약을 바르고 고온 환원불에 오랜 시간 굽는 제작 방식으로 정리되면 바로 고려청자 기술에 근접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신라에서 이렇게 경질토기를 굽고 있었던 도공들이 나라의 명령으로 대거 징발되었고, 중국에서 건너온 청자를 보고서 따라서 몇 번 만들어 보다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던 익숙한 기술을 적용해 보면서 나온 것이 고려청자의 원천기술은 아니었을까? 청자 기술이 전적으로 중국에서 들어와서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예속된 것이었다면 짧은 시간 만에 중국을 추월해서 최고 수준의 청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하다 보니 우연히 혁신이 일어났다는 식의 설명은 그 이전에 발전된 신라토기의 결과물을 보면 지나치게 자기 비하적이다. 장보고 시대에 청해진에 진을 치고 거대한 해상무역을 중계했던 신라인들의 상업적 감각으로 보면, 솜씨 좋은 신라의 도공들을 데려다가 중국식 청자보다 훨씬 나은 도자기를 만들어 팔자는 생각을 왜 못했겠는가 싶은 것이다. 그랬을 때, 그런 경질토기 기술을 갖춘 도공들이 대거 존재했던 지역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 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다.
고려청자의 원천 기술이 어디서 왔는가는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주제이다. 그러나, 청자의 중국 도래설은 이후 고려청자가 보여주는 탁월한 기술의 일부밖에는 설명하지 못한다. 신라의 경질토기, 녹유토기 등에서 볼 때 그 원천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른 시기에 확보되어 있었으나, 다만 중국에서 성황을 이루던 청자를 수입해서 보고 이 중국발 유행상품에 신라 도공들이 비장의 기술을 적용해서 놀라운 성과를 얻은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보는 것이다. 다만 아직 가마터 발굴 등에서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와의 연관성을 바로 소급해서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유물이 확보되지 않은 것이 남아있는 과제이다. 역사에서 성급하게 전제를 설정하고 증거를 찾아가는 방식은 종종 유물 해석의 오류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 토기에서 확인되는 기술의 흔적, 고려시대에 최고조에 이른 청자 기술 사이의 역사적 공백을 중국에서 청자 기술이 도래했다고 채워 넣기보다, 신라 도공들의 기술력의 연장선 상에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설명력이 크지 않을까? 앞으로 경주지역의 가마터들을 발굴할 때 이런 논의를 염두에 두고 접근해 본다면 의외의 쾌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 세계 도자기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사건이 등장할 수도 있고, 경주는 도자기 발전사의 최정점을 찍는 원천 기술을 제공한 곳으로 재평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너무 꿈이 야무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