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깊은 질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나 Nov 27. 2023

박웅현|진심이 말하다

The Real Life Guru

혼란이 가득했던 80년대, 청년 박웅현은 학교 앞 시장통 막걸릿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막걸리 한 통에 300원, 양미리 한 마리에 100원. 그는 변변찮은 화장실 하나 없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막걸릿집을 ‘피스 하우스(Pee’s House)’라 불렀다. 장애를 가진 딸과 함께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주인아주머니는 언제나 밝게 웃으며 그와 친구들을 맞았다. 얼마 후, 그는 막걸릿집 아주머니에게 자신이 직접 옮겨 쓴 김종삼 시인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를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


TBWA KOREA 박웅현이 총괄한 ‘진심이 짓는다’ 광고 캠페인은 전형적인 아파트 광고의 톱스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보이는 것이 우선되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심’을 이야기한다. 첨단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전하는 그라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줄 것 같았다. 믿고 나아가야 할 지표를 찾지 못하고,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싸우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어른으로서의 충고가 아닌, 함께 길을 가는 선배이자 친구로서의 든든한 조언과 말이 통하는 대화가 필요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ER 김희언




진정성의 시대


80년대에 대학 생활(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을 하셨어요. 혼란의 시대를 대학 신문사 편집장으로 보낸 선생님의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심정적으로는 물론 행동으로도 반드시 동참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대학 신문사 기자들은 객관적인 입장을 강요받았죠. 기자가 데모하다가 경찰에 붙들려 가면, 신문사로 책임이 옮겨지는 탓도 있었죠. 거리로 나가 투쟁하지 않고, 강의실 안에 앉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를 짓는 느낌이었어요. 그 당시엔 ‘제대로 머리 박힌 놈이라면, 졸업장을 받을 수 없는’ 분위기였는데, 나름대로 신문사에서 활동하면서 기사를 통해 내 방식대로 투쟁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전면에 나서서 투쟁하셨던 재야운동가 여러분에게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졸업 후 사회인이 되어 다른 방법을 통해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생각도 하셨나요?

내가 만약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지금 정치를 하고 있거나, 참여 연대에서 일하고 있었겠죠. 왜곡된 사회를 고치고자 하는 의지가 생업보다 앞서질 못했어요. 말 그대로 생업을 선택했죠. 


그렇지만 대학 생활을 하시면서 느꼈던 왜곡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무의식 중에 광고를 통해 반영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 당시를 ‘진정성의 시대’라고 불렀죠. 그 시대에 젊은 지식인으로 살았던 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그때의 문제의식들이 내 DNA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죠. 그래서 광고 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소위 말하는 ‘진보적인 성향’이 광고 가치로 반영되기도 해요. 예를 들어 남녀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나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메시지 같은 것이죠. 옳은 가치들이 계속해서 퍼져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나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에 도전한다’ 같은 광고 캠페인들이 그런 메시지들을 담고 있죠. 내가 만드는 광고에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의식이 담겨있는 것 같아요.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그럼, 자연스럽게 현재의 젊은이들로 시선을 옮겨 볼게요. 지금의 젊은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전혀 동의하지 않아요. 지금은 예전보다 전혀 편해지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나는 기성세대로서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정말 미안해요. 진심으로요. 지금이 예전보다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풍요라는 건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죠. 인터넷이 발달했다고 더 재미있어진 것 같지도 않아요. 70이라는 탤런트를 가진 사람이 80년대에 기성 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50%이었다고 가정해 보죠.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성장이 진행 중인 사회였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졸업만 하면 무조건 기업체에 취직할 수 있었어요. 아니, 오히려 선택해서 갔죠. 하지만 지금은 70이라는 탤런트를 가진 사람이 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5%도 안 돼요. 산업이 궤도에 오르고 IMF를 지나면서,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의 한계를 체험했고, 탤런트들이 갈 곳이 없어진 거예요. 이건 정말 중요한 거예요. 문제를 사회적 문맥으로 봐야 하죠. 그럼, 이 수많은 탤런트를 사회에서 어떻게 흡수할 것이냐. 80년대의 경제는 버블 구조였어요. 내가 제일기획 입사할 때, 신입사원을 해마다 50명씩 채용했는데, 지금은 5명 채용할까 말까예요. 사실은 이게 맞는 거거든요. 구조를 바꿀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탤런트들의 수가 줄어들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50명이 취업하던 시대에서 5명이 취업하는 시대로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의 탤런트들이 줄어든 게 아니란 거죠. 그럼, 과연 45명의 탤런트는 어디로 가느냐. 이 사람들이 또 다른 ‘장기하’가 되는 거예요. 사회가 다변화되기 시작했어요. 기업체에 취업 못 한 45명이 홍대에서 좌판을 벌여요, 연극을 하죠, 카페를 차리고, 배낭여행을 떠나요. 정말 고통스러운 이야기지만 좋은 면은 분명히 있어요. 다변화되는 사회로 변하면서, 탤런트가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내가 후안무치(厚顔無恥) 같죠? 미안해요. 하지만 인정해야 해요. 그래야 자괴감이 없어져요. 지금 이 사회의 문제는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에요. 구조적 모순이죠. 구조적인 문제로 여러분이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선배들처럼 대기업 취직을 노크하는 것? 물론, 해 봐야죠. 하지만 그게 안 되면 그 다음은 내 탤런트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고민해야죠. 이어령 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라고요. 바로 ‘온리 원(Only One)’에 관한 이야기죠.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 중엔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 꽃을 좋아하는 사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음악을 전공하면서 동양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죠. 바로 이런 걸 찾아야 해요.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요. 

 

반대로 젊은이들에게 아쉬운 점은 없으신가요?

요즘 젊은이들이 무조건 다 잘하는 건 아니에요. 음… 이건 ‘체력 테스트’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면 될 것 같아요. 분명 예전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영양이 좋아서 그런지 ‘체격’은 무척 좋아졌어요. 겉으로 봤을 때 포장된 모습(스펙)은 대단하죠. 하지만 이들과 두 달만 지내보면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해요. 포장만 완벽히 하면 뭐해요? 속은 텅텅 비었는데. 

 

왜 그런 현상이 생긴다고 생각하세요?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어요. 기성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거죠. 객관적인 데이터를 보고 싶어 할 뿐이에요. 그게 편하거든요. 대기업에서는 사람 뽑는 일을, 데이터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처리하려 하죠. 

 

그럼, 객관적인 데이터에 개의치 않고, 창의적인 인재를 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한 사람 한 사람이 노력해야죠.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힘들어도 어쩔 수 없어요. 계속해서 이런 인식이 퍼져 나아가야 해요. 기업체가 스펙을 보면 안 돼요. 사람을 뽑는 시험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인문학적 소양을 먼저 봐야겠죠. 어떤 것을 읽어왔고, 보아왔고, 들어왔는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는 우리 팀원들 채용할 때 학교 이름과 토익 점수는 아예 안 봤어요. 대신 한 사람당 한 시간 동안 면접을 봤죠. 그렇게 사람을 뽑으면 실패가 없어요. 미국의 대학들이 이런 식으로 학생을 뽑아요. 한국에도 들어오는 ‘입학사정관제’가 이런 일환 중 하나인데, 이러한 노력을 사회와 기업이 꾸준히 해야만 해요. 젊은이들도 인식을 바꿔야 해요. 기업체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맞추기보단, 아닌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를 많이 내야 해요. 일률적인 시험으로 등수를 매기는 건 사람을 기계로 보는 거예요. 그럼 안 되죠. 불가능하다, 안 된다, 하지 말고 사회 전체가 함께 노력해야 해요. 




반드시 찾아야 할 나만의 ‘본질’


‘스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피부에 와닿지 않는 현실인 게 사실입니다.

충분히 공감해요. 하지만 인생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본질’ 뿐이에요. 이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몇 번씩이나 검증해 온 거예요. 취업이 다가 아니죠, 스펙으로 취업이 되었다 해도 속이 비어있으면, 5년 이내에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회사에서 방출돼요. 본질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취업의 기회를 잃어도 결국 다른 곳에서 다른 길을 만날 수 있죠. 이 말이 얼마나 사치스럽게 들릴 줄 알지만, 이 이야기는 할 수밖에 없어요. 내 진심이니까요. ‘본질’을 보세요. 내 인생에 본질이 무엇인지를 찾으세요.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세요. 휘둘리지 마시고. 취업은 끝이 아닌, 모든 것의 시작이에요. 내 경험을 이야기해 줄게요. 내가 다니던 고려대 중앙도서관 정원이 4천 명이었는데, 그중 2천 명이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 언론사 준비라는 것이 <동아상식백과>를 달달 외우는 거였는데, 예를 들어 ‘레임덕 현상이란?’ 어쩌고 저쩌고. ‘피터팬 신드롬이란?’ 어쩌고 저쩌고. 27살 먹은 군대 갔다 온 놈들이 죄다 그걸 외우고 있더라고요. 나는 동의가 안 됐어요. 내 기준에서 그건 상식이 아니었어요. 물론 나도 초조하니까 도서관엔 매일 갔죠. 하지만 나는 거기서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를 읽었어요. 하루는 군대 시절 선임이 나한테 “넌 머리도 있는 놈이 공부도 안 하고, 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냐?”하고 묻더군요. 나는 휴가 대부분을 친구들과 막걸리 먹고 놀며 보내고 있었고, 대부분의 군대 동기들은 CPA(공인회계사)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선임은 그게 답답했었나 봐요. 내가 대뜸 선임에게 물었죠. “‘허비’와 ‘공부’의 개념을 정의해 보세요. 내 공부는 저 길거리에 있습니다. 저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이 바로 내 공부입니다”라고요. 나는 그때 불안하지 않았겠어요? 확신에 차 있었을까요? 그 불안을 채우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휴가 나올 때마다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문학사상>, <세계문학> 전집을 사서 읽곤 했어요. 과월호가 한 권에 200원이었는데, 20권을 4,000원에 사면 노끈으로 묶어주죠. 그걸 가지고 군대에 들어가서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버리고 읽고 버리고, 몇 달을 그랬어요. 내 삶의 본질은 바로 거기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나는 그렇게 초조한 젊은 날을 보냈어요. 내가 생각하는 본질은 문학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것일 수도 있어요. 그게 무엇이든 본질을 찾는 게 중요해요. 


명문대 신문방송학 전공에 학교 신문사 편집장까지 지내셨어요. 졸업 후, 광고 회사에 입사하셨고요. 결국, 언론사 시험은 모두 떨어지신 건가요?

나는 ‘레임덕’이 아닌 <안나 카레니나>가 본질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친구들이 신문사 시절부터 “우리 중에 누군가가 기자가 된다면, 네가 일 순위야!”하고 말할 정도였는데, 신문사 두 군데 모두 떨어졌죠. 후회도 당연히 했죠. 하지만 내가 늘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최선의 선택이란 없다, 선택한다면 최선으로 만들어라’에요.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찬란한 순간의 합, 행복


젊은이들에게 행복이란 여전히 혼란스러운 가치 중 하나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의 목표는 ‘삼성’인데, 그 목표에 오른 사람들은 정작 행복해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존감이에요. 행복은 ‘찬란한 순간의 합’이에요. 절대 목표점이 아니죠. ‘점’이 아닌, ‘합’이란 말이에요. 인생을 산다는 건 ‘비어있는 목걸이 줄에 찬란한 순간의 진주를 몇 개를 꼽고 죽느냐’ 예요. 명문대에 가기 위해 명문고를 가려 노력하죠, 대학 합격하고 이틀 정도 파티해요. 또 삼성에 가려고 스펙 관리 시작해요. 그러다 삼성에 들어가면 또 이틀 정도 파티해요. 그리고 부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죠. 인생을 레이스라 생각하지 말아요. 이처럼 불행한 게 어디 있겠어요? 목표점만 바라보고 가다 보니, 찬란한 순간을 놓치는 거죠. 그렇게 올라간 목표점에서는 ‘이게 무슨 행복이야’하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지금 빛나고 있는 저 햇살, 어제 우리 딸애와 나눠 먹은 사케 한잔, 이런 순간들이 모여 행복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자존하는 사람은 중심을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바깥을 봐요. 안을 보는 사람은 사색을 하지만, 바깥을 보는 사람은 눈치를 보죠. 스펙 관리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보다 ‘남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아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자존이에요.




느낄 ‘감’에 동할 ‘동’, 감동(感動)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인문학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대상입니다. 어렵다고 생각하죠. 

기자님과 지금 제가 하는 것이 인문학이에요.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인문학이고요, 지금 흐르는 음악, 이것 또한 인문학이에요. 인문학은 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에요. 친구의 이야기에 웃음이 터지고, 감동해 소름이 돋는 것. 이것이 모두 인문학적인 순간이죠. 감동(感動), 느낄 ‘감’에 동할 ‘동’ 자에요. 많이 느끼고 반응하세요. 많이 읽고, 보고, 듣고, 울고, 웃으세요. 감정이 많아야 창의력도 많아집니다. ‘저 고양이 귀엽다.’, ‘아, 그 말이 맞네.’ 좋고요, 길 가다가 멋진 남자를 보고 ‘저놈 멋지네.’ 이거 아주 좋습니다. 많이 느끼고 표현하세요. 감수성을 많이 가지세요. 인생이 정말 풍요로워집니다. 

 

‘시청(視聽)’이 ‘견문(見聞)’이 되는 과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문학이나 음악이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다른 사람들의 견문은 어떠했나를 볼 수 있어요. 작가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라는 작품에 “인생을 내 맘대로 직조하기에는 시대의 씨줄이 너무 세게 들어왔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내가 인생을 직조한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날줄이 있지만, 시대의 씨줄의 역할 또한 강력하다는 의미죠. 이렇게 문학은 다른 이들이 어떻게 감수성의 폭을 넓혔는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에요.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경험이겠지만, 나는 전우치가 아니죠. 음악이나 영화, 책,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인문학적 훈련을 하는 거예요.




외로워하지 마라


인생에서 정말 힘든 시련이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그냥 견디는 거죠, 뭐. 얼마 전 한 후배가 결혼을 앞두고 조언해 달라고 찾아왔었어요.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해줬죠. 살다 보면 힘든 순간이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그때, 외로워하지 마라. 누구나 실패하고,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누구나 겪는 거다’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좋을 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뜨거운 난롯가를 지나갈 때는 뜨거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건 분명히 지나가게 되거든요. 뜨거운 상태로 평생을 살지 않아요. 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하죠. 

 

감수성이 풍부하면, 외로움도 많이 타실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 ‘혼자다. 나머지는 덤이다’라고 생각해요.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집사람과 애도 덤이에요. 난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죠. 내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요.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혼자만의 결론이 남죠. 

 

근본적인 외로움을 인정하고 가시는 거군요. 한국의 가장에 지워진 책임감이 버겁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책임감도 이기심인 것 같아요. 책임감이 두려우면 결혼을 안 하면 되죠. 나는 내 딸을 이기심으로 길렀어요. 내 딸을 낳은 건 나와 아내의 선택이었어요. 딸을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죠. 전 딸을 키우면서 항상 행복했어요. 지금까지 가지고 논 장난감 중에서 딸만큼 재미있는 장난감이 없었죠. 얘가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해요. 세상에 이런 장난감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부모들이 이런 소리 하는 게 제일 싫어요. 부모도 자식도 다 사람인데, 딸애가 속 썩이면 어른이 답을 찾아 접근하는 게 맞는 거죠.




기회 없이 끝나는 인생은 없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명문대 학력의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주목받는 젊은 광고인 중에 이제석이라는 분이 있어요. 계명대 시각 디자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메이저 광고 기획사 입사에 실패했죠. 결국 혈혈단신 뉴욕으로 가서 세계 광고전을 휩쓸고 ‘천재 광고인’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어요. 메이저 광고 회사 총괄 디렉터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그 친구는 지금 종점이 아니에요. 이제 시작인 거죠. 그 친구의 역량은 스스로 계속해서 입증해야 해요. 기초체력이 약하면 금세 드러나게 되어 있죠. 특히 조망을 받을수록 체력은 더욱 빨리 검증돼요. 반대로 조망을 늦게 받게 되면, 기초체력을 갖출 시간을 벌 수 있어요. 나이나 경험, 경력 등 모든 면에서요. 그 친구는 지금이 기회이자 위기예요. 기초체력이 검증되면, 그 친구의 앞날은 더욱 밝아지겠죠. 

 

한국의 수많은 ‘이제석’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준비되어 있으면 기회는 반드시 와요. 기회 없이 끝나는 인생은 없어요. 돌아보면 나에게 분명 기회가 왔었는데, 준비를 덜 해 놓친 경우가 있어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악력을 키우세요. 기회가 없다고 말하는 건 말 그대로 ‘루저’에요. 준비도 안 하면서 기회가 없다고는 탓하지 말아요. 인생은 마라톤이에요. 나를 지나쳐 앞지르는 사람을 보고 절대 초조해하지 말아요. 내 길을 꾸준히 가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와요.






인생의 의미


트렌드에 민감한 광고 일을 하시다 보면, 나이가 들면서 위축되거나 불안하지 않나요?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자연적인 현상이에요. 물론 역할의 변화는 느껴지죠. 광고라는 게 본질적으로 통찰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게 일적으로 부담이 되지는 않아요. 지혜롭게 역할의 변화를 컨트롤해 나가야겠죠. 저는 모든 일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싶어요. 회사에서의 미팅부터 지금의 인터뷰, 가족과의 식탁까지. 내가 있어서 긍정적인 흐름이 생긴다면, 그것으로 내 역할에 만족해요. 더 이상 긍정적인 역할을 못 하면, 그땐 은퇴해야겠죠? 


스무 살을 바라보는 따님과는 어떻게 지내세요?

제가 좌우 구분을 잘 못하는데, 얼마 전 딸애랑 여행을 가는데 방향을 놓친 저를 야단치더라고요. 그 순간 소름이 쫙 돋았어요. 그 아이가 걷지도 못할 때 내 무릎에 앉아있던 모습이 생각났거든요. 그런 아이가 이제 훌쩍 커서 나를 야단치고 있는 거예요. (웃음) 딸애가 어렸을 때, 나에겐 꿈이 하나 있었어요. 나중에 아이가 크면, ‘내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지금 딸애와 <죄와 벌>, <데미안>에 대한 서로의 느낌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어요. 완전 ‘Dreams Come True’죠! 분명 좋은 관계를 위해 투자를 해야 해요. 아이가 어렸을 때 ‘나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해놓고, 나중에 대학 간 아이 붙잡고 ‘대화 좀 하자’ 하면 안 되는 거죠. 

 

점점 약해지고 작아지는 부모님을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그 순간이 왔군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와요. 그게 앞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외로워하지 말아요. 누구나 다 겪는 일이에요. 그렇게 부모에서 자식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권력과 함께 책임감도 함께 오죠. 나도 내 아버지가 늙었다는 것을 실감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요.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 늘 강건한 부모, 의존적인 자식의 관계는 부담스러워요. 세월에 저항하면 주름이 생기고, 그 세월을 받아들이면 경륜이란 게 생겨요. 세월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늙으면 추해지죠.




광고 프로젝트 스케줄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란 그가 인터뷰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취재팀보다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자신의 진심을 최대한 전달하기 위한 배려였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인생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려는 고마운 마음. ‘진심이다, 외로워 마라,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고 진지했다. 그의 진심은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난 반가운 이정표로 가슴에 와닿았다. 그는 저만치 앞서서 재촉만 하는 어른이 아닌, 함께 가자 기다려 주고 넘어지면 손 내밀어 주는 인생의 진정한 선배였다. 

 

‘바람 속에 흩어지는 말을 붙잡는 게 책이다.’ 그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메모 중 하나다. 그는 물었다. “너무 좋은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소름 돋지 않아요?” 그는 매 순간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다. 카페에 드리워진 햇살,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았다. 어젯밤 딸과 함께한 사케 한잔이, 인터뷰하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행복이라 말하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와 함께한 자리가 긍정의 기운으로 가득 채워질 무렵, 휴대폰 메모장에서 그와 잘 어울리는 문구를 발견했다. ‘돈이 행복이 아니고, 가치가 행복이다.’




F.OUND magazine, November 2012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준비도 경험도 없이 독립 매거진 에디터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인터뷰는 어찌해야 하는 건지, 기사는 어찌 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창간호를 준비하는 내내 내 밑천이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빠져 허우적댔다. 방황이란 방황은 혼자 다 하듯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스스로 롤러코스터에서 내리지 못할 때였다. 


그때, 잡지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좋아했던 광고인 박웅현을 만났다. 순전히 인터뷰는 핑계였고, 방향을 찾지 못하는 스스로를 위한 상담을 청한 거였다. 사심에 팬심이었다. 인터뷰이 섭외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검색창에 TBWA를 검색하고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박웅현 선생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직 창간도 안 한 잡지의 인터뷰를 청하니 당연히 거절을 예상했다. 하지만 박웅현은 말 그대로 없던 시간을 만들어 내어 주었다. 


이 인터뷰엔 이십 대를 내내 방황하고 자학하는 데에 써버리고 서른이 넘어 늦깎이 에디터가 된 나의 사적인 질문들 투성이다. 대한민국이, 아니 전 세계가 거대한 변화를 겪던 시대였고, 그때까지 내가 학교나 사회 시스템에서 배운 패러다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고, 원망스러웠다. 화도 많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을 찾아 시원하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 괴상하게 뒤틀린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내가 만난 박웅현은 따뜻하게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공감했다. 나를, 그리고 우리 세대를 판단하고 나무라는 대신 측은하게 여기며 대안을 모색했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준중과 예의, 품격을 박웅현, 그에게서 배웠다. 그가 말한 행복과 본질의 의미에 집중해 앞으로 책을 만들어야겠다 다짐했고, 피쳐 에디터로 살아온 시간 내내 그 다짐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본질에 집중한 인터뷰는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을 담고 있는 거라 확신한다. 지금도 어디엔가 어둡고 흔들리는 폭풍 속 항로를 잃은 선장들이 있다면, 여전히 박웅현의 따뜻한 위로와 공감, 혜안의 말들이 길을 비춰줄 거라 자신한다. 


P.S. 이 인터뷰에서 언급됐던 이제석은 여전히, 아니 더 멋지게 전 세계를 무대로 크리에이티브한 광고를 집행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얼|그러므로 깨어있으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