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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Nov 27. 2023

전직 잡지사 에디터가 본 대한민국의 현실

대통령실 빨간펜 첨삭 지도 해드립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충격적인 한 장의 공문서가 여기 있다.


전직 잡지사 에디터로서, 한국이 싫어, 서울이 싫어서 그곳을 떠나고도 재외국민 투표는 악착같이 챙기는 애증의 조국,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서 한국에 살면서도 애써 현실을 보기 싫은 이들에게, 혹은 보고도 외면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올리는 호소문이다.


게임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페이커’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얼마 전 막을 내린 ‘2023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에서 소속팀 T1을 이끌어 우승 자리에 올랐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껏 게임 산업을 위해 딱히 한 것도 없고, 심지어 게임은 인생을 좀 먹는 한심한 짓거리라며 청소년 피시방 이용 제한 시간 정책까지 밀어붙였던 정치권과 대통령실이 숟가락을 얹었다.


언제나 있는 일이라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대통령실, 그곳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행정부 수반의 집무실에서 이런 걸 우승 축하문이랍시고 올려놓은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단 보고 이야기하자.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 

바로 이 문서의 무게다. 


총체적 난국의 문서이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만 빨간펜으로 표시해 두었다. 보수 유튜버 하다 낙하선 타고 대통령실에 내려앉은 형편없는 수준의 행정관이 썼다 쳐도, 백번 천 번 양보해도 절대 넘어갈 수 없는 부분만 표시한 것이다.


첫째, ‘-에’는 앞말이 처소나 시간임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얼굴에 뭐가 묻었다.’ ‘오늘 저녁에 치킨을 먹었다.’ 등으로 쓰인다. 위 문장에는 ‘-에’가 아닌 ‘-의’가 들어가야 한다.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흑과 백으로 명백히 나뉘는 맞고, 틀리고의 오류다.


둘째, 동네 반상회 공고문도 아니고, 대통령실의 공식 문서에서 ‘롤드컵’이라니. 행사의 정식 명칭인 ‘2023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으로 표기해야 한다.


셋째, 띄어쓰기가 틀렸다. ‘정식종목’이 아닌 ‘정식(띄고)종목’이 맞다.


넷째,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변화가 없네’ 할 때나 붙여 쓰는 것이다. 여기서 ‘데’는 의존 명사로 쓰여 ‘획득한(띄고)데에’로 써야 맞다. 이 또한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맞고 틀림이 명확한 망신이다.


다섯째, 명성은 T1이 날렸는데, 주어가 없다. 


여섯째, ‘명성을 알리다’라는 표현은 틀린다. 이미 ‘명성’ 안에 ‘널리 알리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 중복 표현이 된다. ‘명성을 날리다, 명성을 떨친다’로 쓰여야 맞다.


일곱 번째, ‘여러분들의’라는 표현은 틀린다. ‘여러분’의 의미 자체가 복수다. 복수를 또 복수로 만들어버렸다.


여덟 번째, 이미 경쟁력을 충분히 갖추고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게임 업계에 대통령실이 앞으로 할 일은 없다. 무엇이든 손만 대면 마이너스로 만들어 버리는 대통령실은 제발 가만히만 있어라.



대충 눈으로 훑어 내린 오류만 해도 이렇다. 이 문서는 구겨서 쓰레기통에 당장 갖다 버리고, 문서 작성자를 당장 자리에서 쫓아내도 모자랄 판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발행되고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부끄러운 줄 알라.


블로그나 SNS 콘텐츠를 발행할 때도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는 시대에 대통령실의 공문서라면, 한 국가의 공문서라면 이렇게 발표될 축하문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글을 발행하기 전 네이버/브런치 맞춤법 검사기는 물론 '우리말 배움터'의 한국어 맞춤법 문법 검사기(http://urimal.cs.pusan.ac.kr/urimal_new/)로 체크하고, 여전히 애매한 표현은 국립국어원 누리집(https://www.korean.go.kr/)을 살핀다. 대통령 이름을 달고, 한 나라의 이름을 달고 발표될 공문서라면 적어도 맞춤법 검사기에 한 번은 돌렸어야 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더군다나 한 국가의 격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라면 우리말 한국어, 한글 사용에 더 신중해야 하고, 대한민국의 생각을 바르게 전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지금 용산에 어떤 사람들이 자리를 꿰차고 일하고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문서다.


이뿐인가. 대한민국의 디지털 행정 시스템이 마비되고 있다. 원인도 대책도 모르는 행정안전부 수장은 하필 이때 영국으로 건너 가 '한영 디지털정부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어차피 MOU라 허울뿐인 쇼에 가깝지만, 괜히 영국에 미안한 마음이다. 최근 행정안전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제야 알아낸 시스템 마비 원인은 "전원 포트를 잘못 꼽아서"라고 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게 사실이고 현실이다. 대통령실 우승 축하문을 보라. 지금 이런 인간들이 한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대통령이 김명수를 합참의장으로 임명했다. 북한이 도발할 때 주식하고 골프 치고, 자식이 학폭 가해자인 인물이다. 이런 인간이 대한민국 군 서열 2위가 되었다. <서울의 봄>을 봤다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이로써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강행한 임명은 이 정부 들어 20번째다. 


맹목적으로 부자의 편을 드는 정권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뻔뻔하고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건 처음 본다. 잘 사는 이를 더 잘 살게 만드는 법안은 잘도 통과시키면서 노조, 언론, 약자 탄압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새마을운동’으로 경제난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로 북한을 제압하고, ‘한강의 기적’으로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겠다는 이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낡은 발상에 나는 잠시 한국에 들어와 지내는 동안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래도 먹힐 사람들에겐 윤석열의 가스라이팅이 먹힌 걸까. 덕분에 이 사회는 더 이상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 당장 내일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곳에서 한 국가의 수장이라는 양반이 평화를 외치질 못할망정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사관학교부터 전군이 전투복을 입고 생활하라는 명을 내려놓고 정작 책임자들은 모두 해외순방에 나서 먹고 마시고 논다. 북한이 정찰위성을 쐈는데도 말이다. 남북 군사협정을 파기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는데 정작 대통령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자리를 비웠다. 쎄-하다. <서울의 봄>처럼 말이다. 


며칠 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이 그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우리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판결이 나오기 무섭게 박근혜 정권의 큰 실수 중 하나였던 '한일 위안부 협정'을 들어 일본에 "걱정하지 말라"라고, "한국 법원의 판단이 실제로 행해질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염려 말라"라고,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이 말한다. 올해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240명 중 아홉 분만이 살아계신다. 법치국가를 외치며 검찰에 제 한 몸 바쳐 나라를 그렇게 사랑했다는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 제 나라 법을 유린한다. 제 나라 국민을 짓밟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기자들에게 이제부턴 ‘한·중·일’이 아닌 ‘한·일·중’으로 쓰라 했지만, 일본은 보란 듯이 ‘일·중·한’을 고수한다. 또다시 가엾은 대한민국의 일본 해바라기 순애보 짝사랑이 시작됐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앓고 있단 말인가. 대체 왜 내 나라 대한민국이 이런 치욕을 자처해 당해야 하는가.


친환경 재생에너지에 주력하고 관련 산업을 추진하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일회용 용기와 석탄 자원 사용을 독려하는 나라가 되었다. 블랙핑크는 UN기후변화협약 홍보대사로 대영제국훈장을 받았는데, 국빈 방문 자격으로 영국에 가서 총리 관저 입구도 제대로 못 찾고 우스꽝스러워진 대통령은 전 정권이 한 건 죄다 못마땅해 지금까지 이어진 친환경, 재생에너지 사업을 모두 뒤엎었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간다. 이태신(정우성)을 질투하지만 실력으로 이기지 못했던, 자격지심에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친 전두광(황정민)이 오버랩된다.


해외살이에서 전쟁 날까 두렵지 않냐는 외국인 친구들의 비아냥거리는 질문에도 나는 늘 이렇게 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치안이 좋고, 참 안전한 나라야.” 이태원 참사 이후, 나는 더 이상 이 말을 하지 못한다. 맞다, 그래, 너희가 맞다. 내일 당장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 길 가다 사람이 죽어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취급받는 나라, 그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니까.


K팝과 K드라마, 삼성과 LG, BTS와 블랙핑크가 있는 대신 자살률, 저출산이 1위인 나라. ‘미필적 집단 자살’로 치닫고 있는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저런 공문서를 만드는 대통령실과 야당이 내놓은 정책이라곤 애를 더 낳으면 대출 더 해주고, 군대 면제시켜 준다는 것뿐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뜨는 건 그 프로그램 속 육아남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가 밖에서 죽어라 돈을 벌지 않으면 남자가 육아에 참여할 수도, 여성의 경력도 이어질 수 없는 제로섬 게임에서 각자도생의 갈림길에 선 한국인들은 더욱 돈에 목을 맨다. 돈을 버는 이유가 결국 아이를 행복하게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인데, 그러다 아이를 보는 시간이 하루에 십 분도 안 되게 되면서 결국 아빠도 엄마도 아이도 불행해진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욕망의 지옥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뜨거움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김포를 서울에 편입시키겠다는 야당의 기습 발표에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의 작가인 나로서, 이따금 한국에 들어오면 소멸해 가고 있는 지방 시골집에서 지내는 사람으로서 이 푸닥거리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다. 정치도 행정도 공무도, 철학의 부재로 생긴 공백을 채우는 건 천박한 인간의 가증스러운 욕망뿐이다. 


아래 지도는 2009년, 이명박 정권 시절, 내가 좋아하는 광고천재 이제석(지방대 나와 메이저 광고사 다 떨어지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보란 듯이 성공한 기발한 광고인)이 만들어 경매사이트에 올린 ‘신 대한민국전도’다. ‘서울’이라는 욕망에 눈먼 자들의 허영심을 정치에 이용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감옥에 있어야 할 이명박이 사면받아 형량과 추징금을 모두 퉁 치고 활개치고 다닌다는 점이 다르다.


이제석, 신 대한민국전도 (2009)



나라를 통치하는 자의 철학의 부재는 사회와 가정, 개인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나라는 엉망진창이 되고 천박한 자본주의와 욕망을 부추기는 기업의 광고로 우리의 모든 일상은 도배된다. 인정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꽤 괜찮았던, 희망이 있던 대한민국은 없다. 우리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갔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황정민)이 그랬다. “인간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신을 리드해 주길 바란다”라고. 서글프지만, 사실이다. 히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와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김정은, 시진핑, 푸틴에 둘러싸인 대한민국 아닌가. 전두환은 그 당시 인문학적 소양과 통찰식은 물론 처세술에 카리스마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걸 좋은 곳에 써먹지 못해 너무 많은 이가 피를 흘렸다. 80년대 ‘서울의 봄’을 막은 건 전두환이 아닌 그를 둘러싼 늑대들이다. 그 늑대 무리의 후예들이 다시 한번 태극기에 침을 뚝뚝 흘리고 있다.


이럴 줄 모르고 찍었다고? 정말? 


당신은 정말 그렇게, 늑대가 될 텐가?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 (실천문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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