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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18. 2023

윤종신|공존(共存)의 이유

Walking Man in The Middle of Life

1986년에 발표된 에릭 로메르(Eric Rohmer) 감독의 프랑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녹색광선>은 해가 질 무렵 하늘과 바다 사이에 잠깐 나타나는 녹색의 띠를 말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드러나는 삶의 진실과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론,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 녹색 광선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데뷔 20주년을 갓 넘긴 윤종신과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그는 과연 인생의 녹색광선을 보았는지 궁금했다. 매서운 추위에 어깨를 움츠려 더 작아지는 1월, 홍대의 작은 카페 ‘녹색광선’에서 그를 만났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ER 김희언 



‘환생’의 간지러운 가사를 종이에 꾹꾹 눌러 적은 편지를 사랑하는 이에게 수줍게 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실연 후 노래방에서 ‘오래전 그날’을 목 놓아 불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 당신은 1990년대를 윤종신과 함께 보낸 것이다. 1990년 공일오비의 객원 싱어로 데뷔해 지금까지 꼬박 12장의 앨범을 내고, 지금도 계속해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무대에 서는 싱어송라이터 윤종신. 



윤종신 '오래전 그날'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었나요?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을 취미로 한 게 전부였어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죠. 대학에 들어가서 그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고, 목표 없이 표류하는 느낌으로 방황하고 있었을 때 음악이 자연스럽게 저한테 왔어요. ‘노래 한번 불러볼래?’ 이런 식으로. 운 좋게 공일오비와 시작을 같이 하게 되면서, 정통보다는 변칙을 추구하는 그들의 작업 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나는 오히려 데뷔하고 나서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케이스죠.


싱어로 먼저 데뷔한 윤종신이 싱어송라이터로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 때는 언제죠? 

시작 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정석원, 김형석 같은 좋은 작곡가들의 곡도 많이 받았고요. 데뷔 앨범 준비하면서 사람들 어깨너머 많이 보고, 들으며 배웠어요. 내가 싱어송라이터라고 불릴 수 있는 건 4집 <共存>부터인 것 같아요. 그 앨범부터 내 곡이 타이틀이 되었으니까.


데뷔하면서 뮤지션에 대한 꿈이나 다짐 같은 게 있었나요? 

아니요, ‘앞으로 계속 음악을 하면서 살아야지’하는 다짐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순간순간을 이겨내며 계속하다 보니, 20년이 됐네요. 


창작자인 동시에 플레이어이기도 해요, 둘 중 어디에 더 끌려요? 

꼭 하나 선택하라면 플레이어요. 기본적으로 나는 작사·작곡자들은 스태프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무대에 서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창작자가 다 죽는다 해도, 플레이어는 이미 나온 노래를 가지고 공연을 할 수가 있잖아요. 엔터테인먼트의 꽃은 결국 플레이어예요. 


그럼 노래를 끝내주게 잘하고 싶다는 플레이어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네요. 

이 생에 태어나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테스팅은 이미 다 한 것 같아요. (웃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뭔가를 알게 된 거죠. 다시 태어난다면 작사·작곡은 잘 못하더라도, 소름 끼치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카라얀(Karajan)보다 파바로티(Pavarotti)가 되고 싶은 거죠. 


사람들은 대부분 플레이어보다 창작자를 더 우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사실 작사·작곡을 하는 사람들 중엔 플레이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작사·작곡가들이 플레이어를 많이 휘두르려 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플레이어는 또 그렇게 창작자들에게 많이 끌려가는 경향도 있고. 돌이켜보면 한국 가요계는 두 분류로 나눠졌던 것 같아요. 좋은 학력을 갖춘 인텔리 분위기의 싱어송라이터 선배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엔 인생의 풍류를 즐기며 노래하는 선배들이 있었죠. 후자에 속하는 선배들은 진정으로 자기 혼을 실어 노래하는 플레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 음악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사람들 자체가 고학력자들의 인텔리 집단이거든요. 고학력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결정하고 규정하는 집단에 속해있어요. 


비평가나 실제 대중들 사이에 갭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비틀스(Beatles)와 엘비스(Elvis)를 예로 들어볼게요. 엘비스는 트럭 운전기사 같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였어요. 삶의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요.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비틀스가 왜 좋은지 이해를 못 하겠다 하세요. 반면에 음악을 분석적으로 공부하듯 듣는 사람들은 비틀스를 좋아했죠. 비틀스의 음악은 분석적이고 시적이니, 음악을 평가하는 비평가 사이에선 최고로 꼽히는 거예요. 내 생각엔 우리가 문화를 통해 지적인 허영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비틀스를 좋아하면, 내 음악적 소양이 높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요? 

확실히 문화를 통해 자신을 치장하려는 경향이 한국 대중들에게 있는 같아요. 내가 즐기는 문화를 과시함으로써 자신을 포장해 보이는 거죠. 그러고 보면 <전국 노래자랑>에 모여서 손뼉 치며 춤추는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은 정말 순수하게 엔터테인먼트를 즐기시는 거예요, 안 그래요? 


비틀스 좋아하시나요? 

사실 난 비틀스 음악 중 몇 곡 정도만 좋아해요. 하지만 비틀스를 안 듣는다고 음악을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문화를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한 치장 도구로 접근하게 되면, 상대방을 무시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아요. 문화는 수평적인 건데 자꾸 수직적으로 만드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플레이어들을 서열화하고 점수 매기는 거예요. 에릭 클랩튼(Eric Clap)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비교하는 나라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걸요? 참 답답하고 미련한 방법인 거죠.


한국 가요계에서 20년간 음악을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점도 많을 것 같아요. 

얼마 전 (이) 문세 형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남진 선배님과 ‘빈 잔’이라는 노래를 노래방 반주에 맞춰 함께 불렀는데, 막 가슴이 벅차오르는 거예요. 남진 선배님의 노래는 풍류 그 자체예요. 너무 자유롭죠.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남진 선배님에 대해 음악적 분석을 시도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나도 데뷔 초창기엔 기본 토양이 없어 늘 답답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내 음악을 좋아해 줄까, 평론가들의 의견에 상처도 받고. 내 음악은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었죠. 현실에 대한 타파 의지나 저항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추럴하게 듣고 느끼고 즐기는 음악이었으니까. 분석가들이 뽑은 명반 대열에 내 음반이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들의 음반을 점수 매기는 기준에 내 음악을 억지로 맞추고 싶지는 않아요. 음악은 철저히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소통이지, 범 대중적으로 소통할 순 없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국민가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거죠. 그저 나는 내 음악을 좋아하고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도 오래, 천천히 음악을 하고 싶어요. 


뮤지션으로서 결혼 전후의 감정선에 변화는 없던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런 생각들이 정립되기 전까진 고민과 갈등이 굉장히 심했어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어느 정도 내 생각이 중심을 찾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이전과는 다른 감정들을 가지게 됐죠. 외로움이나 예민함, 우울감 같은 건 창작자들에게는 필요악이에요. 하지만 가정을 꾸렸다고 외로움이 없어지진 않아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외로움이죠. 결혼을 하고 식구가 늘면서 목적도 뚜렷하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됐지만, 또 다른 게 오더라고요. 그 감정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거죠. ‘내 인생, 고민 끝!’ 하면 이 세상엔 그 어떤 작품도 안 나올 거예요.



2010년 4월부터 윤종신은 <월간 윤종신>의 편집장이 되었다. 월간지처럼 매달 새로운 곡을 디지털 싱글의 형태로 세상에 선보이고 있는 것. 지난 4월부터 매달 발표된 ‘Monthly Project’로 쌓인 곡들은 지난해 10월 정규앨범 <行步 2010 윤종신>으로 발매되었다. 1990년에 데뷔해 LP와 CD, 카세트테이프로 음반을 내던 가수가 2010년, 디지털 싱글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재치 있게 음악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침체된 음악시장과 듣는 이의 부재로 상황이 어려워 나 더 이상 음악 못하겠다, 핑계를 대지 않아 좋았다. 모든 문제를 대중과 시장의 탓으로 돌리는 비겁함이 없어 좋았다. 나이가 든 ‘중견가수’가 어떻게 디지털 싱글을 내나, 체면을 차리며 오래 뜸 들이지 않아 좋았다. 



2010 월간 윤종신 '이별의 온도'



<월간 윤종신> 1월 호 좋던데요? 월간으로 꾸준히 무언가를 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부록이나 광고도 필요하고 말이죠. (웃음) 

손익분기점 그런 거 신경 쓰면 못하죠. 내 요즘 사는 얘기를 그때그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난 ‘Monthly Project’가 참 재미있고 좋아요. 


그때의 감정으로 쓴 곡들이 신선할 때 바로바로 발표하는 방법이 매력적이긴 한데, 사실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할 순 없잖아요.

경제력이나 대중적인 기반 면에서 예능을 하는 게 많이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선 뮤지션이 예능을 해도 된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내가 후배들에게 “음악 할 돈 구하기 위해 예능 해라"라는 말은 못 할 것 같아요. 음악도 그렇지만, 예능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에요. 내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꾸준히 음악만 하는 사람들이 돋보이기 위해서 나를 거론한다면, 그런 거론이라면, 뭐, 난 괜찮아요. 하지만 예능은 영화배우도 하고 탤런트도 하는데, 유독 뮤지션들이 더 이슈가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뮤지션에 바라는 룰이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에 비해 더 엄격한 것 같아요. 

어쩌면 가요계나 음악계의 침체에 대한 히스테리일지도 몰라요. 예능 때문에 가요계가 침체된 건 아닌데, 무언가 화풀이하고 발산하고 비난할 곳이 필요한 거죠. 


음악을 오래 하다 보면, 대중의 반응에 대한 요령이 생길 것도 같아요. 

분명 ‘이렇게 하면 잘될 거다’하는 감은 생기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쓸 수 있는 곡의 스펙트럼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큰 욕심은 이제 안 부려요. 그런 의미에서 난 기획력이 좋은 맞춤형 작곡가는 아니죠. 난 분석이나 기획력이 없어요. 음악 들으면서 코드도 잘 못 따요. (웃음) 그게 전문적으로 안 배워서인 것 같아요. 지금도 코드 딸 때 (조) 정치한테 물어보고 그래요. 그럴 땐 음악을 배운 친구들의 도움이나 조언을 많이 구하는 편이죠. 


음악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없었나요? 

나는 남의 음악도 잘 수용하고, 또 새로운 걸 잘 받아들이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권태에 빠진 적은 아직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아직 소모가 덜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한편으론 예능을 하는 게 내 음악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해요. 난 주로 생활의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편인데, 만약 내가 매일 연습실에 틀어박혀 기타만 치고 있으면 내 음악의 소재는 외로움, 골방, 어둠 이런 것뿐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밖에서 활동 많이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또 예능을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음악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니까. 예능 활동이 음악에 도움이 많이 되죠.  


<슈퍼스타 K 2>를 통해 강승윤과 윤종신이 연결되면서, 많은 이슈들이 생겼어요. 

(강) 승윤이에게 곡 하나 준 것 밖에 없는걸요. 좋은 색깔을 칠하면 아주 좋은 뮤지션이 될 친구예요. 좋은 곳으로 갔으니, 이제 바이 바이 해야죠. 난 좋은 원석을 발굴하는 역할까지인 것 같아요. 난 이제부터 마음으로만 응원해야죠. 


<슈퍼스타 K 2>가 ‘스타 지상주의’를 부추긴다는 비판 어린 시선도 많았어요. 

<슈퍼스타 K 2>를 통해 음악계 전체를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슈퍼스타 K 2>는 스타를 뽑는 대회예요. 스타는 말초적으로 흥밋거리를 제공해야 하죠. 스타성이 있는 친구를 뽑아야 하고, 그게 목적인 프로그램이에요. 스타가 아닌, 뮤지션을 뽑는 창구가 많이 없기 때문에 <슈퍼스타 K 2>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음악성과 스타성의 비교를 <슈퍼스타 K 2>를 통해 이야기하는 건 무리인 것 같아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멘토’라는 이미지가 더해지기도 했는데. 

그 멘토 이미지, 사실 부담스러워요. 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냥 <슈퍼스타 K 2>를 통해 만난 친구들은 각자의 소속사가 정해졌으니 그쪽에 잘 맞춰 적응했으면 좋겠어요. 그저 그 친구들과 내가 멋진 추억을 가지고 이별한 거라 생각해요. 나와 함께 했던 일들을 모두 좋은 추억으로만 가져가면 좋겠어요.



‘너의 결혼식’, ‘부디’처럼 감수성 어린, 여린 노랫말을 지어 노래를 부르는 발라드 가수 윤종신의 이미지는 라디오 프로그램 DJ의 모습을 통해 재치 있고 입담 좋은 이미지와 절충되었다. 하지만 협상라인은 여기까지. 우리는 슬픈 이별 노래 전문 가수 윤종신이 계속 사랑에 빠지고, 이별을 반복하며 노래만 부르길 바랐다. 우리네 인생에서도 희로애락의 반복은 당연할진대, 윤종신에게는 노(怒)와 애(愛)만을 강요했던 것이다. 윤종신의 희(喜)와 락(樂)은 오랜 시간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윤종신이 음악인과 예능인, 두 분야 모두 전업이라 부를 수 있는 ‘돌연변이’가 된 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과 음악계의 현실 사이의 갭 사이에서 그 스스로 찾은 나름의 돌파구가 아니었을까. 


음악을 포기하지 못해 예능으로의 우회를 선택한 건가요? 

그게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나에겐 돌파구이긴 했어요. 예능은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거니까. 하지만 음악에 대한 돌파구가 절대적으로 예능일 순 없어요. 무엇보다 공고하게 쌓여있는 성(城)이 예능이라는 분야예요.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고유의 특별한 장르죠. 굉장히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고, 수모도 겪어내야 해요. 


뮤지션이 예능을 하는 건 피할 수 없는 비난의 대상인 것 같아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 치킨집을 내거나 편의점을 내는 것과 예능을 하는 게 뭐가 다를까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예능을 편들게 되는 것 같아요. 엔터테인먼트를 천시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유독 뮤지션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거겠죠. 

맞아요. 유독 뮤지션에게는 퓨어한 이미지에 대한 기대가 있어요. 그런 시각을 누가 만든 거며 그런 행동 강령들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한 우물을 꾸준히 파는 사람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존중하지만, 그건 그저 경향일 뿐이지 명확한 룰이 될 수는 없어요. 나 같은 돌연변이가 나왔으면 파생되는 것도 좋겠죠. 


스스로 본인이 돌연변이라 생각하시나요? 

거의 전업 수준으로 예능과 음악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처음엔 사람들이 내가 예능 하는 걸 버거워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인정을 하는 분위기죠. 내가 이걸 하면서 음악을 못하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갑자기 친 대중적인 성향을 띤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하던 색깔 그대로 음악을 계속한 거죠. 사람들이 ‘저래도 되나?’ 하는데, 안 될 건 없어요. 


예능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다 보면, 작업할 시간이 없지 않아요?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항상 음악 하는 건 아니에요. 거의 농땡이예요. (웃음) 내가 밤새 예능 녹화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음악 할 것 같죠? 안 그래요. 술 먹고 노는 시간이 더 많아요. 차라리 예전 음악만 할 때보다 지금 더 기타를 자주 잡아요. 음악에 대한 절실함도 더 커졌고. 다른 분야를 열심히 하다 보니, 내가 가진 재능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느끼고. 


대중들이 버거워하면 결국 본인도 힘들어질 텐데. 

무엇이든 처음부터 리즈너블 한 건 없어요. 처음엔 내가 뭘 해도 사람들에겐 이해가 안 되죠. 힘든 시간은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그 시간을 잘 넘기면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고 생각해요. 멋진 분야일수록 텃세도 있고, 또 그걸 견뎌내면 그 세계를 얻게 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난 텃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전문성을 필요로 하고, 잘하면 인정받는 분야일수록 텃세가 심하죠. “너 나가!”가 아니고, “여기 쉬운 곳 아니야”인 거지. “여기 들어오지 마”가 아닌 거예요. 


예능과 음악 사이를 자유자재로 누비는 감은 본능적인 건가요? 

예능도 하나의 멋진 장르기 때문에, 내가 음악에 적을 두고 예능에 살짝 걸쳐져 있다는 이미지로 비치는 걸 원치 않았어요. 두 분야 모두 몰입, 몰입이지 양쪽에 한 발씩 걸쳐 놓은 게 아니에요. 그 사이의 조율감은 정말 본능적인 것 같아요. 


예능을 하면서 본인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건가요? 

늘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걸 좋아했어요. 내가 만약 사람들의 상식선에서 어설프게 놀았다면, 계속 그 수준이었을 수도 있어요. 상식적인 면을 납득이 갈 만하게 깨는 게 좋아요. 


<라디오 스타>로 자리를 잡으면서, 예능인과 음악인의 이미지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받아들여지더라고요. 

내 생각에 지금 한국 예능 전체에서 <라디오 스타>가 가장 첨단을 달리고 있는 프로그램이지 않나 생각해요. 격한 멘트 많이 나오고, 막말도 많이 하고. 욕을 먹으면서 반대로 칭찬도 많이 받는 프로그램이에요. 곪은 걸 짜내는 느낌으로 꺼려 하는 이야기를 드러내니까.  


본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음악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는 것 같아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는 예능인이지, 뮤지션으로 비치고 싶지 않아요. 예능 나와서 내 음악 홍보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 스스로 세운 룰 같은 거죠. 예능과 음악을 철저하게 이원화하고 싶었어요. 빨간색과 파란색, 따로 존재하자. 이 둘이 섞여 보라색이 되지 말자 하는 식으로. 


<라디오 스타>의 과격한 이미지가 처음엔 조금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난 지금보다 더 선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재석과 강호동은 범 대중을 상대하기 때문에 부드러워야 하지만, 김구라나 유세윤, 윤종신은 좋아하는 사람들만 상대하는 프로그램의 MC들이죠. 


엉뚱한 길이라는 비난하고 돌아서는 음악팬들도 많았나요? 

뭔가 새로운 일을 하려면, 기존에 하던 일이 피해를 안 받을 순 없겠죠. 잃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이미지라는 것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사는 건 족쇄예요.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이미지 변신은 어쩌면 변신이 아닐 수도 있어요. 발라드 가수가 도자기를 굽는 일은 이미지에 맞는 일인 거죠. 그렇다고 내가 도자기가 싫은데 구울 순 없잖아요? 그게 무슨 변신이야. 사람들에게 칭송받고자 시작한 건 변신이 아닌 것 같아요. 당연히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하지만 어떻게 해, 내가 좋아하는걸. 


대신 오랜 시간 한결같이 함께해 준 팬들도 있어요. 

시간이 흘러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음악, 이야기가 달라져요. 예전엔 화를 냈던 이야기들에 지금은 슬며시 웃고 있고. 가사의 화법도 많이 바뀌고. 또 앞으로도 바뀌겠죠. 나는 교감하고 공감하는 걸 즐기려 음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팬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고, 함께 이야기하는 화제들도 비슷하게 바뀌어간다는 게 참 좋아요. 음악을 오래 하다 보니 음악으로 무언가를 가지고, 이기려는 욕심이 많이 사라졌어요.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도 많이 버린 편이죠. 대신 속이 알차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더 가치를 두게 되는 것들이 생겼나요? 

아이를 낳고 많이 느끼는 건데, 큰돈을 버는 것보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모든 일을 할 때의 기준이 되더라고요. 큰돈을 벌고 잘될 수 있는 일이지만, 남을 짓밟거나 누군가 피해를 보는 일이 생기는 건 안 하게 되는 것 같고.


2010년의 마지막 날, 윤종신은 그의 공식 사이트 윤종신 닷컴에 이런 글을 썼다. “올 한 해 들었던 얘기 중에 최고의 찬사는 ‘열심히 한다’였습니다. 교만한 40대로 늙지 않게 해 준 20~30대의 우쭐함, 우둔함과 시행착오에 감사합니다.” 인터뷰의 마지막, 가수 윤종신이 아닌 사람 윤종신의 인생에서 녹색광선을 보았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못 본 것 같다” 대답했고, 천천히 오래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을 되뇌었다. 가수와 예능인, 윤종신의 상반된 두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완벽히 분리되기까지 우리도, 그도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추억 속의 가수가 아닌,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뮤지션이자 예능인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있어주는 윤종신이 있어, 참 고맙고 다행이다. 



F.OUND magazine, February 2011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나는 학창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노래방에 가던 아이였다. 갈 곳도 할 것도 별로 없던 90년대, 그 작은 노래방 안에서 울리던 윤종신의 노래들이 오랫동안 내 추억이 되었다. 90년대 말 등장한 기획사형 아이돌로 설 곳이 없어진 가수들이 잊히기 시작했다. 윤종신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러다 그가 <라디오스타>에 김구라 옆 MC 자리에 나타났다. 많은 이들의 그의 ‘변절’을 탓했다. 내가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매달 싱글 하나씩을 발표하는 <월간 윤종신> 때문이었다. 매달 책을 만드는 에디터인 나로서 정해진 기간마다 무언가를 내놓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슨 못다 한 말이 많아 그리 음악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나의 90년대의 추억이 아닌, 세기가 바뀌어서도 ‘현재’의 뮤지션이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홍대 구석진 골목 카페에서 만난 그는 처음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다른 잡지들처럼 스튜디오에서 메이크업, 헤어에 스타일링도 하고 사진을 찍는 줄 알았던 거였다. 인터뷰를 한 시간쯤 했나. 그는 다음 스케줄을 최대한 미뤄달라고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나 역시 오랜만에 말 통하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길고 긴 인터뷰가 끝나고 카페를 나서다 노점상에 멈춰 스태프들 줘야겠다고 털 모자를 몇 개 사 갔다.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품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인터뷰가 실린 책이 나온 후, 전화를 받았다. 다른 잡지사의 기자였다. 윤종신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자신이 하고픈 말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다 했다며 나에게 연락해 보라고 했다고. 인터뷰 내용을 기사에 인용해도 되겠냐고. 나와의 인터뷰가 마음에 들었구나, 얼마나 마음이 꽉 찼는지 모른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준 인터뷰이 중 하나다. 


윤종신은 이 인터뷰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예능과 음악을 동시에 하고 있다. 가끔 그가 발표하는 음악에서 삶의 부대낌도, 외로움도, 서러움도 보이고, 삶의 지혜도, 따뜻함도, 배려도 보인다. 그걸 숨기지 않고 음악으로 보여주는 뮤지션이 귀한 세상이다. 그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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