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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22. 2023

늙고 병든 교실 이데아, 그리고 수능의 나라

일 년에 단 한 번, 단 하루, 8시간.


얼마 전 말 많은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능이 끝났다. 근 10년을 해외에서 보냈기에 오랜만에 한국에서 맞는 겨울의 초입은 TV만 틀면 뉴스에서 ‘수능, 수능’ 하는 덕에 생경했다. 날씨 예보에서도 수능 당일 날씨를 한 달 전부터 이야기하는 나라, 대한민국. 윤석열의 ‘킬러 문항’ 언급과 그의 덜떨어진 훈계질을 받든 기득권으로 혼란에 빠진 한국 사회는 애꿎은 수험생 아이들에게 상처만 남겼다. 내가 이번 수능 수험생이었다면 윤석열을 상대로 소송을 했을 것이다.


이번 수능, 수험생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 있긴 하다. 한 시험장에서 시험 종료 벨이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울려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수험생 39명이 국가를 상대로 1인당 2천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한 수험생의 학부모는 “(우리 아이가) 마킹하는 도중 종이 울렸고, 손이 떨리는 와중에 몇 번을 찍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혼란한 시간을 보냈다”라며 “모의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아이였는데, 수험생이 누려야 할 공정한 시험 환경을 제공받지 못했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또 다른 수험생의 학부모는 “이미 아무거나 찍어서 표기한 우리 아이는 무기력감과 낭패감에 멘털이 붕괴됐다”라며 “결국 국어는 1점 차이로 등급이 떨어졌고, 그 이후 시험에도 영향을 받아 평상시보다 훨씬 성적이 떨어졌다"라고 토로했다.


이 기사를 보고 나는, ‘공정’이라는 단어를 한참 바라봤다. 정말? 이 학부모는 진정 수능이 공정한 시험이라고 믿는단 말인가?




교실 이데아, 1994


나는 1994년 여름, 서태지와 아이들이 ‘교실 이데아’를 발표했을 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 사물놀이를 배우고 친구들과 뛰놀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신도시로 이사해 새로 생긴 중학교 3회 졸업생이 됐다. 돈 많고 치맛바람 세기로 유명한 신도시, 학원들로 넘쳐나는 곳에서 아파트 이름만 대면 자연스럽게 부의 수준과 등급이 나뉘는 곳에서 내내 학교를 다녔지만, 우리 집이 그곳으로 이사한 건 주변에 상대적으로 싼 빌라들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나에게 닥쳐올 입시 지옥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절대 이 시스템에 순순히 녹아들지 못할 거라는 걸.



교실 이데아(1994)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 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이젠 생각해 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 봐 넌 알 수 있어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이 노래는 당시 혁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노래 가사 때문에 교사와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아 금지곡으로 지정될 뻔했다. 실제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고 그 당시 어른들이 뮤지션을 낮춰 부르던 ‘딴따라’가 되어 서울대 나온 저명인사들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서태지가 두려웠을게다.


대한민국의 괴물 같은 교육 시스템은 1960년대 박정희 때부터 2023년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붕괴 없이 견고히 이어져 온, 사회의 어른들이 아이들과 청소년을 억압해 온 무기이다. 실제로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 청소년 탈선 방지를 명목으로 교복이 부활했고, 두발 단속이 강화되었다. 그러면서도 교사는 아이들을 갖가지 창의력 넘치는 방법으로 체벌했고, 돈 있고 힘 있는 부모의 촌지는 놀랄 뉴스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건, 당시 이 노래를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고 자란 청소년들이 2023년 현재, 대부분 초중고생들의 학부모가 되어 이 괴물 같은 교육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일 년에 단 한 번, 단 하루, 8시간


미국 친구들이 한국의 수능에 대해 물으면 나는, “SAT, ACT, GRE 등 미국 대학에 가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을 그냥 한꺼번에 다 때려 박았다고 생각해”라고 답한다. 그러면 눈이 동그래진 친구들이 시험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묻는데, 내가 “일 년에 단 한 번, 단 하루, 8시간”이라고 하면 “그 시험을 대체 얼마나 준비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평생.”


그렇게 간 대학은 얼마나 가치 있었나?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도, 졸업 후에도, 지금까지도 내 출신 대학을 말한 적이 없다. 내 생에 가장 아까운 시간은 대학에 다녔던 시기였고, 영혼 없고 게을렀던 교수 얼굴은 기억도 안 난다. 그 대신 잡일을 도맡으며 늘 피곤하고 신경질적이었던 안쓰러운 조교가 여기저기서 베껴 쓴 학생들의 리포트를 거두고, 여기에 학점을 주고, 읽지도 않을 전공 서적을 사라고 재촉했던 것만 기억난다. 당시 대한민국의 문과 대학은 마치 한 사회가 암암리에 행하는 거대한 사기극 같았다.


재미있게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작된 게 1994년 대학에 입학하는 수험생이 처음이었으니 ‘교실 이데아’가 발표된 시기와도 비슷하다. 수능과 ‘교실 이데아’, 모두 서른 살을 맞는다. 나는 이 노래를 처음 듣던 날에도, 밤 9시까지 유리창에 창살이 친 교실에 앉아 ‘야자’를 해야만 했던 고등학교 입학식 첫날에도, 그리고 내가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던 날에도, 적어도 내 다음 세대엔, 아니 그다음 세대엔 이 뭣 같은 시스템이 바뀔 거라 믿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빈털터리인 나라였기에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아이들은 닥치고 공부만 하라는 어른들의 말에 토 달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이 더 잘 사는 나라가 되면 바뀔 거라고, 그게 안 되면 우리가 바꿀 거란 희망을 가졌다.


대한민국 전국 수험생의 운명이 같은 날, 한 시에 결정된다는 것이, 그리고 이 시스템이 30년 동안 단 한 번의 오류 없이 이어졌다는 것이 끔찍하게 신기하다. 수능 날 학교 앞에 늘어선 후배 응원단도, 수능 날 영어 듣기 평가 때문에 90여 대의 비행기가 고공에서 대기한다는 뉴스도, 아무리 전통에 추억이라 포장해도 결국 끔찍한 현실이다. 그리고 다음 차례는 당신의 아이다.


10년 전, 이제 막 결혼해 임신한 친구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어린이집을 예약 대기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을 때,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을 둔 친구가 다른 부모들 모두 아이를 방과 후 학원에 보내 친구를 사귀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한다고 했을 때, 밤 10시가 넘어 학원 앞에 늘어선 군 병력 규모의 버스에 녹초가 된 몸을 실은 아이들의 혼 빠진 무기력한 얼굴을 봤을 때, 나는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순진하고 막연했던 믿음을 거뒀다. 우리 세대 역시 우리의 어른이었던 세대를 닮아갔다. 이 괴물 같은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앞으로 더 괴물스러워질 것이 뻔했다. 나는 이 모순의 사회에서 모범적인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행복하지 않은 부모가 어떻게 아이에게 행복을 주겠단 말인가. 게다가 2000년대엔 대학 진학률이 90%를 넘었다. 고학력에 ‘에고(Ego)’ 넘치는 밀레니얼 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나는 못 배웠지만 너라도 많이 배워라” 하던 우리 부모 세대와는 달리 “학교 선생보다 내가 더 잘 알아” 하는 부모가 되었다. 자존감 없이 자존심만 센 우리 세대는 이 괴물 같은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과 시너지를 일으켜 더 일그러져만 갔다.




정치적인 아이들이 무서운 어른들


지난 10년간 해외에서 다이빙 강사로 살며 영미권과 유럽에서 온 친구들에게 주로 다이빙을 가르쳤다. 다이빙 업계에서 프로페셔널 다이버, 다이빙 강사가 되는 코스와 시험이 있는데 보통 2주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다이빙 입문 과정부터 프로페셔널까지 전 과정을 포함하기에 배우는 양도 상당하고 압박감이 큰 편인데 여기에서 한국인은 빛을 발한다. 이 정도의 심리적 부담감이나 압박감은 대한민국의 수능을 치렀다면 새 발의 피다. 유럽 친구들은 2주간의 강사 과정을 꽤 힘들어한다. 프랑스에서 온 한 친구는 평생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적이 없고, 이런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처음이라며 고통스러워했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등짝 한 대 맞으며 엄살떨지 말라고 하겠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다이빙 강사로 경험이 쌓이면서 나의 티칭법을 배우고 싶다며 내 코스를 보조하는 다이브마스터 친구들이 많았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갓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갭 이어’를 보내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바로 가지 않고 1년, 혹은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하지 않고 1년 정도 쉰다. 배낭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평소 관심 있었던 취미나 모험을 즐긴다. 더 놀라운 건 다이빙 강사가 되겠다고 ‘갭 이어’로 지구 반대편 태국으로 떠난 열아홉 딸과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부모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함께 다이빙을 하는 것이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갭 이어’를 보내고 있던 한 프랑스 친구가 내 코스를 보조했다. 교육생은 슬로바키아에서 온 친구였는데, 다이빙 교육 도중 점심시간, 동유럽과 서유럽의 갈등 문제에 대해 두 젊은 친구가 열렬히 토론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여전히 생생하다. 프랑스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정당을 고르게 하고, 언제나 학교에서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는 토론 시간을 통해 공부했다고 한다. ‘정치적’이라면 전염병처럼 호들갑 떨며 ‘중립적’인 게 고상하다 믿는 이상한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다. 프랑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인권과 자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세우고, 보수와 진보에 대해 토론하며, 다른 이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전달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상대와 함께 합의점을 도출하는 과정, 그 자체의 가치와 무게를 배운다. 한국 아이들처럼 수능 이후 치를 논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달달 외운 논리를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그 논술마저 학원을 다니며 배우니 웃기고 슬픈 일이다.



답이 없는 내 나라에 묻는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견고하게 이어진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거대한 공룡이 되어 버렸다. 빠른 시일 내에 가장 먼저 사라질 직업군이 대학교수라는데 우리는 어쩔 텐가? 사람들은 더 이상 대학에 갈 필요가 없어지고, 그리고 오매불망 내 자식이 되길 원하는 의사, 판사, 변호사가 곧 사라질 직업 1순위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창의력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 부모들은, 어른들은, 사회 기득권은 뭘, 어떻게 할 텐가? 어떤 답이든 내놓는 AI 시대에 아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법’ ‘자살하는 법’ ‘세상을 끝내는 법’ 같은 질문 대신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인가?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은 끝났다. 끝나도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한국만 안 끝났다. 이제는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을 어떻게 병합해 어떤 의미를 부여해 어디에 쓸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국어와 수학은 보충수업까지 하며 목숨 걸고 가르치면서 정작 목숨이 걸린 CPR와 수영은 가르치지 않는 나라, 논리와 토론 대신 저열한 정치판을 어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은 정치적이 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나라, 저출산에 나라가 소멸된다 하면서도 이미 태어난 아이들 지켜주지도 못하며 고립과 경쟁으로 내모는 나라, 아이들의 미래를 멋지게 만들어주겠다며 나만 믿으라 큰소리치면서 오히려 그들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


창의력 없는 어른들은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까지 아이들에게 무책임하게 떠맡긴다. 죽도록 공부하지 않아도, 죽도록 공부해서 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죽도록 공부해서 서울대에 가서 의사, 변호사가 되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도 소소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지 못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삶을 도대체 언제까지 대물림할 텐가. 철학이 얕은 대한민국 사회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어른들은 고집을 꺾지 않고 자존심을 부릴 텐가.


철학 없는 교육 시스템은 결국 돈을 좇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산업화를 거치며 천박한 자본주의와 돈에 미쳐 돌아가는 사회를 신봉해 온 어른들은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서 돈 많이 벌어라”라고만 가르쳤지, 과연 스스로 어떤 부모인지를 성찰한 적이 있었나? 그리고 자식 세대에 좀 더 좋은 부모가 되는 법을 가르칠 순 없었나?


지금 교육을 받아야 할 건 아이들이 아닌 부모 세대이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대한민국의 민낯,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질 일들, 아이들에게 “넌 몰라도 돼”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함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환경, 복지, 저출산, 교육 문제를 왜 40년도 전에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 20년 후면 세상에 없을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나?


모든 것이 하루의 시험으로 판가름되고, 누군가는 그마저도 공정하다 받아들이며 숙명을 따르는 수능의 나라, 더 이상 잘못된 걸 바꾸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애늙은이 같은 대한민국. 비참하고 슬프고 기괴한 나라에서 나는 여전히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반항하며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제대로 된 교육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이 다시 받아야 하며, 공정하지 않은 나라에서 수능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판타지도 거둬야 한다.



교육의 역설은 사람이 교육으로 눈을 뜨면서
자신을 교육해준 사회를 검토하게 된다는 점이다.
- 제임스 볼드윈



교육 받은 사람들이여, 왜 우리는 같은 고통을 대물림하는 데 동참하고 순응하나. 왜 아무 것도 하지 않나. 왜 아무도 질문하지 않나. 왜 아무도 토론하지 않나. 대한민국은 왜, 도대체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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