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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Aug 14. 2024

권태, 그리고 ‘나쁜 새로운 것’에 관하여

‘우리는 사랑했지만 무지했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삶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은
고통도, 희열도 아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이다.     


에세이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랫동안 바라고 원하던 잡지사 기자가 되어 열정을 다 해 일했습니다. 몇 년 후, 점차 사그라드는 열정에 저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내심 그 열정이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꽤 오래갈 줄 알았거든요. 때마침 이직 제안이 들어와 환경을 바꾸면 다시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문득 든 생각은, 이 새로운 열정도 오래가진 않을 거란 거였어요. 

     

열렬히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은 언제나 상대로부터 입은 상처나 배신감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불확신과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한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사랑스럽던 사람이, 이제는 그 숨소리조차 싫어질 때 오래된 사랑은 절대로 새것이 될 수 없다는 진실과 시간의 야속함에 우리는 항복하고 맙니다.

      

그때 만난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는 늘 제가 품어왔던 삶의 질문을 여성 감독의 시각으로 세밀하고 깊이 있게 다뤄 두고두고 삶과 동반하는 작품이었어요. 사랑과 열정, 젊음, 시간에 대해 새로운 접근과 표현,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이 영화를 지금도 어디에선가 삶의 권태에 시름하며 앓고 있는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원제는 <테이크 디스 왈츠(Take This Waltz>입니다. 2012년 국내 개봉 당시 배급사가 국내 시장을 겨냥해 바꾼, 마치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제목 <우리도 사랑일까>는 좀 아쉽습니다. 애초에 메이저 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상업 영화가 아닌 인디 영화인 만큼 ‘테이크 디스 왈츠’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레널드 코헨의 노래에서 따온 제목인만큼 원제를 그대로 살렸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극본을 쓰고 감독한 사라 폴리는 캐나다의 배우이기도 합니다. 사라 폴리 감독은 첫 장편 영화 <어웨이 프롬 허>(2006)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의 기억이 점차 사라지며 서로에 대한 충실함에 대해 고민하는 오랜 관계 속의 부부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뤄 호평받았습니다.      


관계의 출발과 지속, 그리고 끝에 대해 사라 폴리 감독은 고민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녀의 두 번째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서는 스물여덟 살의 보헤미안이자 작가 지망생 마고(미셸 윌리엄스)와 닭고기 요리책을 준비하는 남편 루(세스 로건)의 결혼 생활을 다룹니다.      








영화의 배경은 캐나다 토론토 도심에서 조금 빗겨 난, 예술가와 힙스터들이 모여 사는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하며 개성 넘치는 ‘리틀 포르투갈’이라는 마을이에요. 여러 가지 색으로 페인트를 칠하고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로 햇빛을 투과시키는, 예술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고풍스럽고 아담한 집에서 마고는 5년째 남편 루와 함께입니다.      




유난히 길고 더운 여름, 은근히 잘 가시지 않는 후덥지근한 열기와 습기가 영화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젊은 부부 마고와 루의 관계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매력적인 이웃 다니엘(루크 커비),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불륜’을 다루는 영화의 틀을 깨고 직접 만지지 않고도 섬세하고 깊은 감정과 갈등을 묘사하며 관능으로 가득한 슬로우 댄스를 이어갑니다.    






마고는 무방비 상태로 다니엘의 매력에 이끌립니다. 하지만 자잘한 마찰과 오해, 서로에 대한 익숙함이 불러오는 권태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장난스럽고 애정 넘치는 루와의 결혼 생활도 망치고 싶지 않죠. 다니엘은 마고에게 자신을 밀어붙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고를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습니다. 그는 거리를 두고 맴돌며 마고의 양면성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르면 자신은 언제든 이용가능한 상대라는 걸 알립니다. 이러한 양면성은 사라 폴리 감독의 솔직하고 확고하며 감정적으로 관대한 이 영화를 내내 지배합니다.  

    

마고와 다니엘의 시작은 호기심이었지만 다니엘은 마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서로의 유대감은 더욱 깊어지지만 마고는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남편 루는 닭고기 요리법 개발에 몰두하느라 둘 사이에 어떤 공간이 형성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죠. 마고와 다니엘, 두 사람의 감정은 현실적인 제약과 규범으로 인해 현실적이고도 억압된 감정으로 발전합니다.      










우유부단하고 혼란스럽지만 결코 수동적이지 않은 젊은 여성

     

오늘날 영화계에서 가장 용감하고 영리한 여배우 중 한 명인 윌리엄스는 우유부단하고 혼란스럽지만 결코 수동적이지 않은 젊은 여성을 놀랍도록 눈부시게 연기합니다.   


사라 폴리 감독과 미셸 윌리엄스가 이해하는 마고의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일종의 열정입니다. 마고의 욕망의 흐름은 자신이 잘 알고 익숙하며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원하는 낯선 사람을 향한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강하게 흐르고 있죠.      


마고는 고집스럽고 예의 바르고 규율을 잘 지키지만, 이기적이기도 하고 수줍음이 많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독은 그런 면에서 인간의 다면성과 이중성, 모순성을 캐릭터의 특성과 모순을 통해 탁월하게 표현하며 마고와 루, 다니엘과 가까워지도록 합니다.     


미술 스케치 작업을 하며 토론토 도심 관광용 인력거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가 다니엘은 불안하고 불안정하지만 매력적입니다.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남편 루는 이제 더 이상 마고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죠. 매일 함께 있으니까요. 마고의 내면엔 여전히 불붙기만을 기다리는 불씨가 자리하고,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봐, 이렇게 늙어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을 루는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마고와 루는 5년을 부부로 함께 살아오며 매일 같이 소소한 대화를 나누지만, 정작 마고 내면의 꿈과 열정은 다니엘 앞에서 드러내게 됩니다. 언어를 잃으면 느끼는 능력, 즉 가장 순수한 감정인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능력도 잃게 되죠. 셰익스피어를 다룬 알 파치노의 다큐멘터리 <리처드를 찾아서>에서 거리의 한 남자가 “우리가 아무런 느낌 없이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 그래서 우리는 총을 들고 서로를 쏘기 쉽고, 서로를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전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길 두려워하며 여기저기 떠돌며 사는 불안정하지만 매력적인 화가 다니엘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쓰고 있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아직은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마고 사이에 불꽃이 일렁이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지만, 마고는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용기 있게 스스로 선택합니다.   


   




미셸 윌리엄스는 엉뚱하고 불안하며 늘 사랑과 관심을 원하는 마고의 존재감에 설득력을 높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조증에 걸린 꿈의 소녀’ 캐릭터가 될 뻔한 캐릭터 마고를 땅 위에 잘 안착시켰거든요. 그녀는 삶의 두려움과 놀라움, 어색함, 지루함, 통제, 후회, 피로 같은 순간을 적나라한 자연스러움으로 전달합니다. 사랑스럽고 연약한 날 것의 얼굴을 하고 마고는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감정과 친밀감으로 자신을 자극하고 자신이 더 성장하도록 도와줄 사람을 욕망합니다.      







   





여성의 노화와 주관성에 대한 잔인한 통찰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씬 중 하나는 바로 수영장에서 아쿠아로빅을 마친 마고가 친구들과 함께 샤워실에서 섹스와 결혼,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반대편에 한 무리의 나이 든 여성들이 샤워를 하고 있고, 마고와 친구들의 젊고 탄력 있는 몸과 대비됩니다.      




이 씬에서 폴리 감독의 카메라는 착취적이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흔히 묘사되는 시선 없이 여성의 온전한 형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나체의 여성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봐오던, 운동하고 씻고 옷을 입어야 하는 몸을 가졌습니다. 젊은 육체는 노화되고, 늙은 육체도 한때는 젊었고,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체념하고 살아야 할까요, 더 늦기 전에 더욱더 욕망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할까요?     




   





이 모든 건 결국엔 끝나버릴 화려한 축제

     

영속하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뼈아픈 진실은 마고가 다니엘과 함께 스크램블러를 탈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변화와 진부함에 관한 상징적인 노래인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흐르며 돌아가는 놀이기구에서 마고는 색색의 조명이 바뀔 때마다 공포와 외로움, 기쁨, 욕망, 환희, 자유 등 다양한 감정의 음영을 드러냅니다. 놀이기구가 시간을 다해 멈추자 음악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며 갑자기 공간은 차분한 회색 방으로 바뀝니다. 황홀하고 화려하고 매혹적인 시간은 언제나 공허함과 상실감으로 이어집니다.      





   





영원히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죽음 외에도 우리가 깨닫는 가장 큰 두려움, 즉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항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시간이 운명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유발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리죠.

      

마고는 상처를 구현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상처가 얼마나 커다란 생명력을 주는지도 묘사합니다. 그녀는 새것의 환희와 낡은 것의 고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녀는 ‘오래된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나쁜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씨름합니다. 새로운 것이 영원하지 않다고 해도 새로운 것을 욕망하는 마고를, 권태를 향한 불완전한 인간의 불안정한 선택을 하는 마고를, 우리는 성자처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씬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루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니엘에게 달려간 마고가 360도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그동안 절제해 왔던 모든 것을 폭발시키고 자유와 희열을 즐기며 점차 텅 빈 공간의 살림살이가 하나둘 늘어나고 결국 둘 다 무표정한 얼굴로 TV 앞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이때 레널드 코헨의 ‘Take This Waltz’가 흐르고 마고는 다니엘과 함께 화장실에서 익숙한 듯 볼 일을 보죠.      




마고는 고통과 상처를 유발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 의심과 후회 속에서 운명의 수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마고는 매번 같은 장소에 도착하고 말죠.     




 





<우리도 사랑일까>는 많은 질문을 던지며 관객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하지만, 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마고와 루, 다니엘의 초상을 통해 누구도 특별히 호감 가는 인물로 묘사하거나 누구의 편을 들거나, 또는 어떤 선택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묻습니다. 항상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 속에서 관계에 서툴고 미성숙한 우리는 정말 삶에서 우리의 끝없는 선택으로부터 만족할 수 있을까요?      





현실보다 마법의 힘을 쫓은 마고는 결국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무지했고,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든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며, 우리는 항상 혼자임을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어웨이 프롬 허>가 은유적으로 한 여자의 ‘겨울’을 배경으로 했다면, <우리도 사랑일까>는 그보다 이른 계절에 ‘영원히’를 앞둔 한 젊은 여자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두 영화 모두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여름의 모든 색은 결국 겨울의 회색으로 녹아내린다는 걸 암시합니다.    


  

<우리도 사랑일까, Leonard Cohen ‘Take This Waltz’>

 



2012년 作 <우리도 사랑일까>는 넷플릭스왓차티빙웨이브쿠팡플레이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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