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u Jul 12. 2019

내 친구 ‘해피’를 먹는다고?


내가 6살 무렵부터 엄마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가족을 부양할 의지가 없었던 아빠와 이혼한 이후로 온전히 혼자 가족을 지켜 낸 것이다. 덕분에 나와 언니는 한동안 이모 댁에 머물러야 했다. 일을 하는 엄마 대신 이모가 우리를 돌봐주셨기 때문이다.   


이모네 집은 식구가 여섯이었다.


가족 모두 함께 식사를 할 때에는 명절이 아닌데도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당시 집안의 막내였던 나는 사촌오빠와 언니들 틈에서 사랑과 귀여움을 아낌없이 받는 동시에 모든 장난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 여름, 온 가족이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모는 내 얼굴을 장난스럽게 쳐다 보며 말씀하셨다.  


하루, 네가 먹는 그거 뭔 줄 아니?”


나는 하얀 무와 고기가 잔뜩 들어있던 국에 밥을 말아 한 숟가락을 떠먹으며 ‘뭔데요?’ 라고 되물었다.

  

“그거, 해피야”


해피는 어릴 적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었다. ‘뭐? 지금 내가 먹는 게 해피라고?’ 입에 들어간 고기를 당장 뱉고 싶었다. 가족들은 나를 보며 킥킥 웃었다. 모두가 한 마디씩 보태며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진짜야, 해피 집에 가봐, 없을 걸? 넌 지금 해피를 먹는 거야.’


두려움과 충격에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며 가족들은 장난에 성공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는 얼굴을 보여줄 때까지 장난을 치는 것을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삼복더위에 개고기를 먹는 일이 흔했다. 서울에 있는 큰 시장에 가면 장터 한 복판에 입을 벌리고 죽어 있는 개를 쉽게 볼 수 있었고, 털이 다 뽑힌 채로 붉게 굳어있는 개고기를 사기 위해 시장에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1990년대 초반에도 「동물보호법」은 있었지만 동물을 보호의 대상으로 대하는 인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보호'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 그로테스크한 경험은 내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내 입에 넣은 고기의 정체가 ‘해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맛있게 밥을 먹던 내 모습과 ‘해피’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던 순간의 공포가 혼재되어 있는 장면들이다.


다행이도 이 일은 복날을 맞아 가족들이 어린 조카를 놀려주기 위해 벌인 해프닝이었고, 나는 이후로도 몇 년을 더 해피와 살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장난으로 우리 이모는 내게 곰국을 끓여주시며 ‘뒷산에서 잡아온 곰으로 끓인 국’이라고 알려 주시기도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한 마리의 곰’을 생각하며 밥을 먹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동네의 작은 시장에는 살아있는 닭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정육점이 있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지나가도 거리낌 없이 걸어 다니던 닭은 내가 선뜻 다가가지  못 할 만큼 몸집이 컸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 앞을 지나는데 커다란 닭의 날개가 주인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그는 상자가 쌓여있는 가게 앞을 반 바퀴 돌아 나오더니 바닥에 놓인 둥그런 나무 도마 위에 손에 쥔 닭을 눕히고는 칼로 목을 내리쳤다.


순식간이었다.

닭의 목이 거리 위에 떨어졌다. 나는 온 몸이 굳은 채로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보았다.


처음 알았다. 닭의 몸통과 목을 분리해도 부리와 눈이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다. 이후로 나는 그곳을 지날 때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닭고기는 맛있었지만, 닭이 고기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너무 끔찍했다.


‘해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 때 내가 먹은 것은 ‘개’가 아닌 ‘소’가 들어간 무국이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해피’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고, 내가 먹은 고기가 ‘해피’가 아니 어서 다행이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설마, 개가 아니라 소라서 괜찮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맞다. 분명하게도 나는, 그래서 괜찮을 수 있었다.




'소'라서 괜찮았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의 저자 멜라니 조이(Melanie Joy)는 나의 아이러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Schema)를 갖고 있다.”고 말이다. 스키마란 우리의 인식과 경험, 생각 등을 구조화하는 틀을 말한다.


멜라니 조이에 따르면 “우리가 특정 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사냥 할지, 도망칠지, 박멸할지, 사랑할지, 아니면 먹을지’가 결정된다.”


즉, 사람들은 누구나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는 스키마를 갖고 있다. 때문에 ‘먹을 수 없다고 분류한 동물’이 도살되어 식탁 위에 ‘고기’의 형태로 나온 것을 접하면 그것의 살아있는 모습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고, 대상 동물에 대한 연민과 함께 역겨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동물이 ‘어떤 동물인가’ 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떠한 가,이다.1)


멜라니 조이가 사회심리학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개고기’와 ‘소고기’의 차이를 이해했다면 마고 드멜로(Margo DeMello)는 사회문화적인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는 미국과 서구 사회에서는 개가 인간의 사냥 동반자로 가축화 됐기 때문에 ‘애완동물’의 지위를 얻었으며 일단 어떤 동물이 ‘애완용’으로 정의되면 ‘식용’으로 소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애완동물이 되는 것은 ‘가족’으로 여겨지는 것이고, 가족의 일원을 먹는 것은 그 일원이 설령 ‘동물’일지라도 상징적인 형태의 ‘식인’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특정 동물이 어떤 사회에서 식품으로 소비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해당 동물이 갖는 ‘다른 어떠한 기능’이 ‘먹을 수 있다’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을 때 사회는 그 동물을 ‘먹을 수 있는 동물’로 간주한다.2)


이렇게 접근해보면 보편적으로 ‘소, 돼지, 닭’이라는 ‘농장동물’은 우리 사회에서 ‘먹는 용도’ 외에 다른 기능이 발달되지 않거나 혹은 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먹을 수 있는 동물’로 소비하는 것이고, ‘개’는 과거에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용’의 기능도 하는 동물이었지만, 사회가 변화할 수록 ‘반려동물’로서 기능할 때의 시장(market)이 보다 더 커지고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동물’(또는 먹으면 안 되는 동물)이라는 상징을 공고히 해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필요에 의한 용도가 다를 뿐 결국 어느 쪽이든 '인간중심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논리지만 말이다.  


어릴 적 내가 ‘해피’를 먹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던 것은 나는 그 강아지를 ‘먹을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 ‘친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름 모를 ‘소’는 내 머릿속에서 특정 지을 수 없었고,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정육점 앞에서 만난 닭도 마찬가지다. 도살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이후 닭고기를 먹을 때는 ‘해피’를 먹는다고 생각했을 때만큼의 불편함과 공포는 분명 없었다.


결국 나에게도 내가(혹은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그 동물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일이었다.



변화하는 사회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나에게 ‘개’는 고기가 아닌 가족의 의미를 가진 동물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의 나는 우리 사회가 ‘먹을 수 있다.’고 분명히 정해놓은 동물들이 살아가는 환경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나는 내 친구와 가족의 역할을 하는 동물들 뿐만 아니라 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동물들도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각자의 습성에 맞는 환경을 누려야 하며 마지막 순간에는 인도적인 도살방법을 통해 조금이나마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9년에도 법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으니 여전히 어딘가에서 ‘개’는 밀도살을 통해 고기로 소비되고 있겠지만 이와 관련된 논쟁들은 오직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그 도덕적 진보는 동물에 대한 처우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라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언론을 통해 자주 등장하고, ‘동물복지와 동물권’과 같은 개념이 빼놓을 수 없는 정치·사회적 의제가 되었으며 성행하던 보신탕집이 사라진 거리에는 동물병원이나 반려동물용품점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변화는 뒤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1) 멜라니 조이(Melanie Joy). 2011.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모멘토.

2) 마고 드멜로(Margo DeMello), 2018.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공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