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로 되어 있던 태그들을 ‘공감에세이’로 바꿨다. 나는 태그를 활용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 브런치에서도 글에 따라 자동으로 뜨는 태그를 눌러 대충 지정했었다. 그런데 문득 ‘에세이’보다 ‘공감에세이’를 태그로 지정하면 더 많이 읽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감’이라는 말이 왠지 공감을 얻게 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글이 더 좋은 글이겠거니. 그리고 내가 쓴 글이 ‘좋은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다시 ‘공감에세이’ 태그를 모두 ‘에세이’ 태그로 바꿨다. 내가 요새 올리고 있는 것은 분명 에세이이기는 한데, 공감할 만한 에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순전히 저에 대한 생각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지만, 공감능력이 부족한 내가 글을 써놓고 무조건 많이 공감받기를 바란다면 우스운 일 같기도 하다. 그저 ‘내 글에 위안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다.
내가 글을 쓰는 1차적인 동기는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조금씩 더 용기를 내며 쓴다. 쓰고 나면 이런 느낌이 든다. 만일 내 모습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노란색’이라는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면 그 덩어리의 부분들에 여기서 여기까지는 상아색, 여기는 개나리색, 누룽지색, 귤색… 등 구체적인 이름이 붙고, 나만의 체계에 따라 서로 손을 잡고 늘어서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가 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서 자꾸만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담아내기 위한 글’과 ‘읽히기 위한 글’ 사이
대학 때 쓰던 싸이월드 일기의 느낌은 이랬다. “자, 난 이렇게 슬프고 괴로운데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절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아, 천지간에 나 혼자 괴로워.” ‘내 싸이 홈피는 기본적으로 나의 공간’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바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블로그 게시판은 그보다는 조금 공식적인 느낌이 들어서 사생활을 쓰더라도 조금 더 ‘예쁜 똥’이 나오도록 다듬어서 썼다. 읽는 사람이 직접 아는 사이가 아니니 어떤 댓글이 달릴지도 의식이 되었다. 그래서 쓰다가 비공개로 전환해 버린 적이 많았는데, 비공개로 전환하고 나면 역시나 감정 토로 위주의 글이 되고 말았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객관적인 눈으로 글을 쓰는 것은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나를 약간 떨어져서도 보고, 다른 이의 눈으로도 그려보면서 더 성숙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브런치가 좋다는 생각을 한다. 에세이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공간이기에 솔직하게 쓰면서도, 공유하기 위해 쓴다는 전제가 있으니 한 문장 한 문장 거리감을 지켜보게 된다. 나를 담아내기 위한 글과 읽히기 위한 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긴장감이 나쁘지 않다.
이런 글쓰기는 자유영 같다. 몸통에 힘을 빼듯 잘 쓰려는 욕심을 내려 놓고, 대신 팔다리는 힘차게 움직여서 구체적인 경험과 생각을 엮어 간다. 그래야 가라앉지 않고 쭉쭉 전개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자의식과 현실 사이에서 얼굴을 담갔다 빼기를 교묘히 반복해야 계속 나아가면서 숨을 쉴 수가 있다. 나를 숨기고 가려고 하면 숨이 차고 지쳐 레인 중간에서 서 버리게 된다. 하지만 계속 쓰다 보면 나에게 맞는 리듬감이 생기고 그러면 박자에 맞춰 약간의 피로를 즐기면서 레인을 왕복할 수 있다.
만약에 꼭 둘 중에 한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면 내 글은 ‘나를 담아내기 위한 글’ 쪽에 기울기를 바란다. 쓰는 일을 업으로 하기 위해서는 팔리는 글인지 의식하는 것도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출세욕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주윤 작가의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라는 적나라하고도 현실적인 책 제목이 너무도 속시원하게 느껴졌다는 게 증거다. 좀 더 잘 표현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 나가야 할 것 같다. 나의 수필은 사건보다는 감상 위주이고, 너무 시적인 데가 있고, 쓸데없이 길다. 브런치 글 치고는 인용도 예도 없고, 사진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이 넓디넓은 세상에 나보다 잘 쓰는 사람은 거친 표현으로 말해 쌔고 쌨지만, 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관심받지 못할 소재라도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라면? 내가 느낀 것들이 너무 우중충해서 최대한 담백하게 써 봐도 남들 눈에는 정이 안 가는 이야기라면? 나는 우선 나 자신만 생각하며 쓰고 싶다. 내 안에 탑재된 독자의 눈을 오프 상태로 해 두고. 써 놓고 정 보이지 못할 글이라면 비공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쓰는 이가 자유롭지 못한 글이 좋은 글일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전달이 가능한 방식으로 나를 담아내기만 한다면, 그걸 지켜보면서 자기 마음의 일부를 쓰다듬어 보는 사람도 적게나마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이도저도 아닌 모습 그대로 지도를 그려보자
나는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다. 기질면에서 예술가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자타공인이지만 곧바로 세상에 알려질 만큼 재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다. 회사든 공공기관이든 원양어선이든 어디에 집어넣어도 이 악물고 버텨볼 사람이지만 어디에도 맘을 붙이지는 못한다. 넓고 얕은 흥미 덕에 열 우물을 파서 한 우물도 물길이 안 뚫리고 있다. 그래서 나의 글 역시 이렇다 할 개성 없이 어느 카테고리에 넣기 어려운 글일지도 모르겠다. 심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전문가 흉내를 내기는 어렵다, 외국생활을 몇 번 했지만 그저 살기 바빠 제대로 기록도 못 했다, 뭐 그런 식. 써 놓고 보면 요새 유행하는 이야기의 변주일 뿐이기도 하다. 단연코 그래도 좋다. 좋아서 하는 일에까지 등수를 매기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니까. (그리고 물이 안 나오는 열 우물이 괜찮은 관광 상품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항상 있다. 나의 타고난 재능 중 하나는 합리화 능력이다.)
고등학생 시절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자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아파트 꼭대기층에 내린 뒤, 걸어 내려오면서 집집마다 전단을 붙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옥상이나 가장 높은 계단참의 창문에서 전단지를 한 장 접어 종이비행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이비행기가 어디까지 날아갈지 궁금해 하며 힘껏 앞으로 밀어 보내곤 했다. 얇은 전단지로 접은 비행기는 푹 고꾸라져 곤두박질치기도 했지만, 이따금 큰 바람에 실려 앞 건물까지 날아가기도 했다. (쓰레기 불법투기 문제는 잠시 접어둡니다.) 가끔은 전단지에 단어나 문장을 적었다. 뭐라고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잘 있어요?’나 ‘나도 갈래요.’ 같은 무의미한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걸 발견하는 상상을 했다. 어쩌면 나처럼 어디로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주워서 읽어보지는 않았을까. 이게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면서 신기해 하지 않을까. 그러면 왠지 모르게 설렜다. 수많은 계단을 빙글빙글 돌며 뛰어 내려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 내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는 이국의 보물지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약간의 설렘을 가지고 쓴다. 당신의 ‘감感’은 잘 알 수 없어도 ‘공共’만은 늘 품어두고 싶다. 뭔가를 얻어가게 하자고 욕심 부리지 않고 묵묵히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꾸 눈이 갈 만큼 멋있지도 않고 저절로 다가갈 만큼 친근하거나 유쾌하지 못한 글이라도, 깊은 곳을 지켜보는 조용한 눈길만은 보인다면 좋겠다.
요즘 나는 살아온 시간을 글로 정리해 두는 작업에 빠져 있다. 안 쓰던 이어폰처럼 뒤죽박죽 엉킨 생각과 감정이 풀려 나간다. 마치 이사 오고 몇 달째 ‘아, 저거 다 어떻게 좀 해야 되는데….’하고 바라보고 한숨만 쉬던 짐들을 풀어헤쳐 정리하는 일 같다. 상자에 각각 견출지를 붙인다. ‘버리고 싶지만 남겨둬야 할 기억’이나 ‘남겨두고 싶지만 버려야 할 감정’ 같은 것들. 버려야 할 것은 집 밖에 내 놓고, 남겨둘 것은 어느 방에 둘지 곰곰이 생각한다. 이 과정은 가슴이 꽉 차도록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