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편-②] 공존질환이 성인 ADHD 진단에 미치는 영향
"네, 확실히 아니에요. 보면 알아요."
상담선생님의 눈빛과 목소리는 단호했다. ADHD를 다루는 상담센터를 찾은 것은 4년 전 직장 스트레스가 직장 공포증으로 변했을 때다. 내게는 그간 꾹꾹 눌러 담은 ADHD의 설움으로 푸진 말잔치를 하리라는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야무진 계획은 선생님의 몇 마디에 전면 수정되었다. 선생님은 내가 작성해서 들고 간 의심 증상 목록도 보지 않겠다고 하셨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때문에 말이 잘 생각 안 나고 안 들리기도 해요. 인지행동치료를 하면 나아질 거예요.“
‘그런가?’
내 경우는 자가 진단 항목을 보고 "어라, 이거 나랑 비슷한데? 혹시 나도 ADHD?"라고 의심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살면서 반복된 ‘이상한 점’을 목록으로 적은 것이 있었는데 그게 진단 항목들과 95% 일치했다. 심증은 200%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단언하시는 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정신건강전문가의 판단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기대치에 민감한 나는 쭈뼛거리다 11회의 상담을 결제해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선생님의 말을 믿고 우울과 불안을 다스려 보기로 했다.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현상은 우울이나 불안이 지속된 경우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경우, ADHD로 문제를 많이 겪어서 우울하고 불안해졌는지, 반대로 우울장애와 불안장애를 앓다 보니 일상이 엉켜서 ADHD 증상과 비슷해진 것인지 아리송하다. 한마디로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전문가들이 택하는 방법은 다른 질환이 사라져도 ADHD가 남아있는지 보는 것이다. 내가 우울할 때 만난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모두 '우울증부터 치료하자'고 권했던 것을 나는 이해한다. 어찌 그분들에게 무속인의 능력을 요구하랴. 그래도 안타까운 이유는 기저질환인 ADHD를 그대로 둔 채 공존질환만 치료할 경우, 치료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 역시 우울증 개선에 집중했으나 상담이 중기에 접어들면서 '이게 아닌데' 싶었다. 당장 어설프고 두서 없는 내 모습은 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믿음이 활활 타오르도록 장작이 되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성과에 따라 내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자기 암시도 매번 그 불길 속에 한 줌 재로 사라졌다. 상담 이전과 다른 결의 정체감이 찾아왔고, 어영부영 상담 주기만 늘리다 마지막 회기가 되어서야 털어놓고 말았다.
"선생님, 아무래도 저는 ADHD 때문에 힘든 게 더 큰 것 같아요."
솔직한 생각을 진작 말하지 않고 상담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있었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말 ADHD도 아니고 우울증도 그대로라면 내가 나아지는 길은 영영 없는 거 아닐까' 기약 없이 암담해졌다.
우울감과 우울증이 다르듯, 비ADHD도 종종 주의집중이 어렵고 과잉행동을 하지만 ADHD인들은 그것이 정상적 생활을 방해할 만큼 반복, 지속된다. 자신이 ADHD인지 곧바로 확인하기 어려운 분들은 먼저 주의집중력, 과잉행동, 충동성 관련 증상이 최소 6개월 이상 유지됐는지 생각해 보자.
ADHD는 대부분 '본 투 비 ADHD', 선천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주의집중력과 행동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불균형으로 발생한다.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영향이 가장 크고, 드물게 뇌 손상, 뇌의 후천적 질병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인 ADHD 역시 아동기 ADHD가 성인기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단 시 12세 이전에도 증상을 보였는지를 확인한다.
공존질환과의 구분을 돕기 위해 지나온 삶을 차분히 돌아볼 필요도 있다. 의심 증상으로 생각되는 첫 기억은 언제인지, 정서적 문제나 불면 등이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인생의 중대한 사건 이후 변화한 점이 있는지 등을 짚어보면 검사지를 작성하거나 전문가와 이야기할 때 진단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증상과 가까운 지인의 평가를 미리 기록해 가는 것과 다녔던 학교의 생활기록부를 떼어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ADHD 증상 때문에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중 두 군데 이상에서 생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는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나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 44쪽).
증상들이 다른 신체적 질병에 의한 것이 아닌지도 의심해 보자. 내 경우는 공교롭게도 부신피로증후군을 가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 병이 집중력과 기억력 저하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혹시 몸이 나아지면 ADHD로 의심되는 증상도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부신피로증후군이 생긴 건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였고, 나는 학창시절부터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게다가 꾸준히 '특이할 정도로 활동이 많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충동적인 말과 행동들로 애를 먹어온 건 전형적인 ADHD 증상에 속했다. 부신피로증후군은 원인이 아니라, ADHD 증상으로 무리한 생활을 하며 오랜 시간 스트레스가 쌓인 결과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몸에 쌓인 알루미늄이나 중금속이 브레인 포그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에 모발 검사도 두 번 해 봤지만, 문제가 될 만한 수치는 나오지 않았다.
성인 ADHD 진단 과정 (http://www.sgclinic.net/sub/sub_03_01.php)
-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진단기준 9가지 중 5가지 이상에 해당되는지 평가
- 과거력 상 12세 이전에 발병했는지 평가
- 여러 환경에서 증상이 나타나는지 평가
- 사회적, 학업적, 직업적 기능에 분명한 문제를 야기하는지 평가
- 내과적, 정신건강의학과적 다른 질환에 의한 증상일 가능성 배제
- 동반질환 여부 평가
- 평가척도 시행
ADHD의 유형과 병증 양상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그러니 인터넷의 자가진단 문항이나 주변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근거로만 여기는 것이 좋다. 늘 멍한 상태로 다녀도 계획과 주변 정리는 힘들지 않을 수 있고, 과잉행동이나 충동성이 학습에 따른 억제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병은 학업이나 직업적 성취, 지능에 따라 판단할 수 없고, 집중을 잘하는가보다 집중에 대한 '통제'를 잘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ADHD인의 10%는 치료 없이도 큰 문제 없이 생활한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왜 이렇게 일상적인 것들이 힘들지?"라는 의문을 오랫동안 가져왔다면, 꼭 '성인ADHD' 전문가를 찾아 여러 검사를 받아보자. 병명을 확인하는 일조차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큰 산을 넘은 뒤에는 치료를 통해 점차 내 뜻대로 되는 일상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문제를 정확히 전달하는 일은 몹시 까다롭다. 증상 자체만 나열하면 마치 누구나 겪는 현상 같고, SF 드라마처럼 뇌와 뇌의 연동이 가능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대로 보여주지 못해 답답했던 것들을 표현하려면 약간의 문학적 감성을 발동시켜야 한다.
뇌에 안개가 자욱한 느낌, 남들이 100킬로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50킬로로 달리면서 길을 막는 느낌,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너댓 개의 라디오 채널을 헤치고 간신히 마주 앉은 사람 말을 듣는데, 그 말이 모스부호처럼 끊겨서 들리는 느낌, 초 단위로 다른 시험을 보느라 머리가 혹사당하는 느낌 등. '공감 진단기'까지 갈 것 없이, 과거의 내가 잘 표현했다면 공존질환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과는 분명 다른 점들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 넘는 상담 동안 마음에 새기게 된 것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문제에 대해 실제보다 더 큰 책임을 자신에게 지운다면 그건 가장 중요한 사람을 홀대하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정확한 검사를 미루고 인생의 암흑기를 쭉쭉 늘린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혼자 헤맨 시간만큼, 비슷한 길을 헤매는 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생겼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한 정지음 작가가 인터뷰에서 전한 말처럼.
"살면서 낭비된 시간이라 생각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중했던 시간이 있고 소중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어야 그 시간들의 가치가 서로 맞물리면서 '지금'도 의미가 생긴다. 그런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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