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맡겨 주세요! 직장생활 허세로 망하기

[노동편-③] 나를 조종하는 인지 오류, 달래서 떠나보내기

by 묘보살과 민바람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려 회의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첫 출근이었는데 회의날이었고, 내가 작은 발표까지 맡았다. 통유리창 너머로 상사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보였다.이번엔 어리바리하게 굴지 않을 테다!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며칠 간 경구처럼 암송한 말을 되새기며 서 있는데, 한 분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에라, 지금이다. 나는 유리문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런데 몸을 안으로 밀어넣는 속도가 문이 열리는 속도보다 빨랐다. 쿵!! 내 머리는 내 것이 아닌 듯 유리에 던져졌고 아기자기한 공간에 공격적 울림을 빚어냈다.


"아야.. 하하... 안녕하세요."

“뭐야, 등장부터 그렇게 허술해도 되는 거예요?”


문 앞에 앉은 두 분은 농담을 던져 주셨지만 벌써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생각했다. 괜찮아, 아주 명랑만화 같은 등장이었어! 내 '망신력'도 짬이 얼만데. 드넓은 곳에서도 벽에 몸을 날리고 책상 모서리에 찔려 몸을 떠는 묘기를 밥 먹듯 선보이는 나다. 이 정도에 굴할라고?


과한 목표의식의 부작용 (pixabay)


그러나 그날의 발표는 내가 부담감으로 염소처럼 떠는 바람에 한 번 중단되고, 그 후엔 발표 내용이 산으로 감으로써 중도에 정리됐다. 집에 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래, 나 낼모레 마흔인데 내 멘탈 쿠크다스다. 근데 이번엔 진짜 잘해보고 싶었다고!


망하게 둘쏘냐, 최악을 궁예했다


“시켜 주세요!!!” 처음에 스타트업 구인소식을 듣고, 이사 계획까지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렸다. 담당업무도 몰랐고 조건도 당장은 열악했지만 오랜 관심분야였다. 일을 잘해서 오래 함께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동안의 방황은 여기서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당시 ADHD가 아니라는 상담센터 의견의 여파 속에 있어서 병을 밝힐까 고민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얼빠진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아직 망치지 않았어’를 주문처럼 외며.


어느 날은 출근길 전철에서 상사와 연락을 하다 서로 같은 노선에 타고 있는 걸 알게 됐다. 종종 그랬듯 내리면 만나서 사무실까지 같이 갈 상황이었는데, 우루루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내리고 보니 또 한 역 앞서 내린 거였다. 허겁지겁 먼저 들어가시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에스컬레이터를 두세 칸씩 뛰어올라 단거리달리기로 큰길까지 전력질주했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택시를 탔지만 10분 늦게 도착한 나는 어리둥절해 있는 상사에게 눈을 맞추지 못했다. "아, 그게… 일이 좀 생겼어요." 차라리 배가 아팠다고 하지. 일하러 오면서 일은 무슨 일?


실수했다고 고백할 수도 있었지만, 얼마 전에도 같이 출장 가던 중 내가 비슷한 실수를 연달아 해서 길을 헤매게 만든 터였다. 더군다나 늘 다니는 길이고, 가만히 있으면 닿는 게 종점인데 똑바로 내리지 못했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귀여운 실수가 모이고 쌓이면 절대 귀엽지 않으니깐.


경험의 무서운 면은 그간 겪어온 나쁜 상황들이 '객관적 경험치'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최악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거다. 나는 생각했다. 눈치 빠른 나의 상사는 평소에도 내가 대중교통을 제대로 타고 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고, 그 사실은 그간 내가 선보인 다른 어설픔과 통합적으로 이해될 것이고, 결국 내가 처리하는 모든 일이 못 미더워지게 만들 거라고.


어둡게만 발휘되는 관심법(이라 믿는 것) 때문에 의욕 충만한 직장생활이 말리고 있었다.지시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누구보다 활발한 소통이 필요했지만, 머릿속엔 두 가지 시나리오만 맴돌았다.


① 이것저것 다시 묻는다 → ‘그런 것까지 알려줘야 돼? 무능하네.’

② 짐작 가는 대로 한다 → ‘왜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하지? 오만하네.’


나는 대부분 무능함보다 오만함을 택했다. 한 가지를 물을래도, 이렇게 물을까 저건 아닌데 각을 재다 혼자 태풍 맞은 나무처럼 앙상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건 ‘무능한 주제에 오만한 직원’이 되는 지름길이었다.



자학과 허세는 한 끝 차이였다


나의 삐딱한 관심법은 손잡고 노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능력이 없으면 닥치고 열심히'라는 강박관념이다. 그런데 이 강박이 허세를 낳았다. 처음부터 잘 보이려고 내가 해본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의 범주에 넣은 거다. 구멍투성이인 내가 허세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뭐라고 하신 거지?? 무슨 뜻이지??)

"그럼요! 이번 주까지 해서 보여 드릴게요."(와우~ 지금 쌓인 업무가 열 개예요! 내일의 나여, 부탁한다.)

"하하, 힘들긴요. 다 제가 배우는 건데요."(명백히 힘들다... 아니 그보다 오늘도 퇴근하고 일만 하면 진짜 애인한테 차일지도….)


한마디로 모두 '저질렀다'. 이 일을 시작한 시기 나는 노력한다는 것에 진력이 나 있었지만, 한편 보통의 결과를 내기 위해 남보다 두세 배의 시간과 수고를 쓰는 일에 너무나 익숙했다. 프로 정신이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많이 드는 게 내 특성이니 마땅히 그래야 했다. 지시를 받으면 일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한두 시간, 거래처와 통화 전에는 생각 정리에 한 시간, 통화 후에는 녹음한 정보를 반복해 들으며 이해하는 데에 또 한참이 걸리는 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그 모든 걸 동시에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여전히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태엽이 다 돼 톱니가 자꾸 멈추는 생각공장은 밤에도 주말에도 삐걱삐걱 돌아갔다. 그래야 끝없이 들어오는 업무 물량을 맞출 수 있었다.


‘일을 줄여달라고 해 볼까?’ 라는 고민 앞에는 심판관이 버티고 있었다. 최종 보스, 자격지심. 그 거대한 풍채 앞에서 생각은 급선회했다.


‘업무량이 많긴 한데… 그게 내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니, 잘 못하는 걸 말하기로 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밖에 안 될 걸.’


회사가 지키지 않은 약속들을 생각하면 속이 부글거렸다. 직원이 직접 공사구분을 위해 노력하고 계속해서 업무량 조절을 건의해야 하는 환경에 있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게 누구냐, 다름 아닌 나였다. 뒤늦게 내 상태를 전달하려 해도 매번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그간 저질러 놓은 허세가 있으니 상대방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몇 달 만에 정식 계약의 순간이 왔다. 그러나 자신감을 상실한 나는 빵빵한 풍선에서 바람 빼듯 허탈한 포기 선언을 했다. 마무리 짓는 시점도 방식도 별로였다. 무조건 기대치에 맞추려고 한 것은 결과적으로 상대에게 민폐가 되었고, 좋았던 관계마저 잃어버려 한동안 많이 자책했다.



인지 오류 인지하기


책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에서 저자 리단은 자신이 정신병을 가지고 일하면서 얻은 노하우와 잘리면서 알게 된 것들을 소개한다. 여기에 ‘일을 너무 잘하지 말 것’이 포함되는 게 재미있다. 처음부터 이것저것 할 수 있다고 드러내며 잘하려고 너무 애쓰면 오히려 나중에 능력을 의심받게 된다는 거다. (조현병, 양극성 장애, 자해와 자살 충동 등 자신이 겪고 공부해 온 여러 병증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정신병자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주는 책이다. 관심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우리는 증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정신병이 있으면 어떤 일도 잘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관점이 현실적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맥락이다. 사실 완벽한 수행은 병이 없는 사람에게도 어렵고, 마라톤을 100m 달리기처럼 하는 선수가 멀리 갈 수는 없다. 과한 스트레스와 과로는 증상을 악화시켜 앞으로 일할 용기마저 잡아먹는다.


물론 이상적인 상태는, 진단명이 확실한 사람이 '정신병 프렌들리'한 조직에서 성공적으로 병을 밝혀 강점과 약점을 공유하고, 직무 범위와 업무량을 정한 뒤 해량과 지원 속에 일하는 것. 하지만 여기에 들어맞는 경우가 현실에는 많지 않다.


그래서 다른 상상을 해 본다. 만일 내게 자격지심과 그로 인한 부정적 예측, 강박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폭망 아니면 극복'의 흑백 구도에서 벗어나 상황을 균형 있게 봤다면? 낙인 효과만 걱정하기보다 처음부터 내 한계를 터놓고 의논했을 수도 있고, 타이밍은 뒷북이어도 나를 믿어준 사람들과 좀 더 소통에 가까운 대화를 해볼 수도 있었을 거다.


내가 일하는 과정에서 겪은 문제들은 ADHD를 가딘 사람의 전형적 인지 오류를 낱낱이 보여준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씩 살펴보겠다.


(1) "폭망 아니면 극복 둘 중 하나야.": 중간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흑백논리'

(2) "여러 번 실수하면 누구든 날 무시하게 돼.": 전에 겪은 사건을 일반화해서 모든 상황에 같은 결론을 적용하는 '과잉일반화'

(3) "나는 보통 사람보다 능력이 떨어지니까 무조건 사람들한테 맞춰야 돼.": 기준이 합리적인지 따져보지 않는 '강박적 부담'

(4) "지난 출장에서 난 방해만 됐어.":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는 '부정적 초점'

(5) "상사 표정을 보니 분명 내가 맘에 안 드는 거네." :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해석하는 '속단하기', 모든 걸 자신과 연결짓는 '개인화'

(6) "이미지를 망쳤으니 여기서도 안 좋은 일만 남은 거야.": 결과를 과장하는 '재앙화'


ADHD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부정적 자동사고에 압도되기 쉽다. '다 잘 해내도 보통이 될까말까인데 자꾸 실수를 하니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게 알려져 배척받을 것이다' 등. 여기에는 충동조절 부족으로 결론을 속단하는 경향이 한몫을 한다. (Young and Bramham, 216-218쪽)


나는 현재에 대한 생각을 먼저 바꾸려 노력했다. 눈앞의 사건에 압도되는 대신 그 일이 생각만큼 중요한 게 아닐 수 있음을 인지하고, 사람의 생각을 다 안다고 여기는 대신 가능성을 두루 열어두려 했다. 현재 겪는 일을 균형 있게 바라보게 되면서 지난 일에 대한 평가나 미래를 보는 눈도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인상이 바뀌면 자신을 규정하는 말도 달라졌다.


먼저 인지오류를 갖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그런 면이 있지' 정도로는 부족하다. 앞으로 마주할 상황에서 잊지 않고 떠올릴 수 있으려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는지 구체적인 경험을 생각하는 게 좋다. 또, 판단이나 감정과는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상황 자체만 보려고 애써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라서, 문장화해서 말해보거나 적어보는 게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상사가 자신이 직장에서 웃지 않아서 잘린 경험을 얘기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내가 표정이 안 좋은 걸 지적하고 있다"는 판단으로 넘어갔다면, '사실 단계'로 돌아가서 생각을 마치는 것이다. 나는 속상함이나 분노가 자꾸 따라오면 '사실'의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그 방법이 판단과 감정을 부정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뭐든 '반반'이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내 짐작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전철에서 잘못 내렸다는 얘기를 들으면 상사가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자신이 상사로서 완벽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 편히 날 대하게 될 수도 있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의외로 좋은 부산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실수를 했을 때 내가 낮게 평가될 수도 있지만, 나에 대한 이해가 쌓여 장기적으로는 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



'잘' 망했다는 자부심


시도했던 일에 실패했다면, 실패하기까지의 수고를 스스로 알아줄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방향이 좀 잘못됐을지라도 내가 노력한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 '잘' 망했다는 자부심으로 또 나아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자부심이 자격지심을 대체하는 날도 올 거다. 그것만큼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다.


정신병자의 인지 오류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트라우마에 젖은 뇌가 부정적 시나리오만 쓰는 AI처럼 구니까. 너무 자주 망치다 보니 망치다와 망하다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서사를 쓰려면 알아야 한다. 정신병이 있어도, 일을 잘 못해도, 아예 일이 없어도 모든 게 망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다 바뀌었냐고? 당연히 이것도 허세다. 인지 오류도 허세도 관성의 법칙 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찬찬히 되짚어보면 솔찬히 바뀌었다. 지금은 나에게 붙였던 무능력자라는 이름표를 뗐다. 함부로 이름표를 붙이지 않는다. 규정되지 않은 애매한 상태에서 점차 편안해지는 게 변화라는 걸 느낀다.


인지 오류로 삶이 힘들어서 바꿔보고 싶다면 조금씩 재구조화를 해 나가자. 그런데 안 바뀐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나. 살 수 있는 대로 살자. 내 삶이 틀렸다고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덧붙이는 말


인지 오류는 선천적 기질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학습된 경험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인지행동치료는 이 중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경험을 쌓으면 인지 방식을 재구조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인지행동치료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연습'인데, 제가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을 때는 '자동적 사고 기록지'를 자주 작성했습니다. 종이에 상황, 감정, 신체반응, 자동적 사고, 생각의 오류 유형, 그 생각에 대한 자기 반박을 적어보는 겁니다. 이 과정은 누가 꼭 지도할 필요가 없어서 숙제로도 했어요. 그러니 꼭 상담을 받지 않더라도 혼자서 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맘에 걸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사고 과정을 기록해서 살펴 보면 자신이 자주 저지르는 인지 오류가 뭔지 알게 됩니다.


항목 중 '자기 반박'은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예전에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다' 등 생각의 오류가 사실이 아닌 이유를 찾아서 적습니다. 생각의 방향을 억지로 돌리는 일이라 자신을 속이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가본 길이 다시 찾기 쉽듯이 써 보고 나면 그 생각이 자기 것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경험 쌓기 정도로 생각하면 연습 과정이 한결 가볍게 넘겨지지 않을까 합니다.



책에는 브런치보다 많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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