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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Sep 07. 2024

3화 그저 계속하는 마음

2N년차 밴드에게 배우는 건재하는 마음

  고등학교 때, 급식비로 음악 CD를 사 모으곤 했다. 작은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면 배가 고팠지만 그렇게라도 좋아하는 밴드들의 앨범을 가질 수 있는 게 좋았다. 그때 산 앨범들은 대부분 자우림과 일본의 라르크 앙 시엘(L’arc~en~ciel)의 것이다.   

  

  당시 나는 자우림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파애’, ‘안녕, 미미’, ‘새’, ‘마왕’ 같은 노래들을 좋아했다.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던 내 어두운 감성에 딱 맞는 노래를 만들어주는 밴드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귀했다. 팬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김윤아가 자우림을 둘러싼 구설수에 대해 팬카페에 쓴 위풍당당한 글을 보며 그를 더욱 동경했다. 솔로 앨범의 부록으로 나온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사람의 웃는 모습 뒤에 얼마나 큰 아픔이 있을 수 있는지도 배웠다.     


  세상 모든 그늘 속 비주류를 대변해 노래해 주는 듯하던 윤아 언니가 치과 의사와 결혼했을 땐 어떻게 우릴 버리고 그 세계로 떠날 수 있느냐며 혼자 토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자우림은 매번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곡을 만들어서 다시 나타나고 또다시 나타났다. 예전과 다르면서도 여전히 자우림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다른 누구도 쓸 수 없는 곡과 노랫말이었다.     


  24년째 노래방에서 거의 자우림 노래만 줄기차게 부른다. 자우림을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날 때부터 자우림 팬이 될 운명이었던 건지, 내 목소리 톤에 딱 맞는 게 거의 자우림 노래들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윤아 님처럼 성량이 풍부하거나 고음이 되는 건 결코 아니다(그는 신이다). 아무튼 나는 친구나 애인과 함께 갔을 때는 주로 ‘사랑의 병원으로 놀러 오세요’ ‘17171771’ ‘애인 발견’ ‘행복한 왕자’ ‘나비’ 같은 노래를 부르며 끼를 부리거나 분위기를 띄웠고, 혼자서는 ‘#1’ ‘샤이닝’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있지’ ‘영원히 영원히’… 너무 많아 이쯤에서 생략해야 하는 곡들을 부르며 마음을 한 겹 씻어냈다.    

 

  자우림이 없는 평행우주의 내 인생을 상상해 보면, 한국어로 된 노래 중 앨범마다 내 마음을 읽어준 듯한 느낌을 주는 가수를 찾을 수 있을까 싶다. 그곳의 나는 더 고독하고 쓸쓸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24년을 함께한 자우림은 내게 표현 그대로의 ‘인생 밴드’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주로 소도시나 외국에 살았고 늘 시간이나 돈 중 하나가 없었기 때문에 자우림 콘서트에는 대학 때 한 번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지난 연말에는 여러 모로 무리를 해서 드디어 공연장 1층 R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공연을 보는 동안 내내 후회했다. 물론 후회의 대상은 자우림의 공연을 보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만큼 좋았다. 혼자 갔지만 이때만은 파워내향인? 그게 뭔데? 라는 태도로 사지를 흔들며 뛰었고,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들으며 나라 잃은 사람처럼 오열했다.     


 보컬의 멘트에서도 절절한 진심을 느꼈다. 세상에 분노하고 사람들의 상처에 아파하는 마음과 그만큼 세상과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 그게 진짜일 뿐만 아니라 흘러넘칠 정도로 크다는 건 그곳에서 그를 처음 알게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2023년은 내게 참 많이 아픈 해였다. 그래서 그날 두 시간의 위로는 내 존재에 대한 포옹 같았다. 너 그랬지. 서럽고 억울하고 아프고 외로웠지. 감당하기 너무 벅찼지. 끝날 줄 알았는데 끝이 없고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었지.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은 알아. 


그들이 내는 소리가 그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공연 콘셉트가 심야 열차에 탄 승객(관객)들이 승무원(자우림 멤버들)의 안내를 받는 것이었는데, 정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긴 여행을 다녀오며 한 해의 응어리를 풀어낸 기분이 들었다.     


  한편 부러웠다. 한껏 아름다운 그들이 부러웠다. 그 아름다움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고등학교 때 취해 있던 어떤 기분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 세상에 없던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가슴 벅찬 욕구, 누가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마치 공기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 그렇다. 그건 소위 말하는 ‘예술뽕’이 차오른 것이었다. 공연장을 나와 집으로 향하며, 나다움이 흘러넘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이 자신을 제약하는 습관을 벗어던지고 나도 아직 잘 모르는 나의 영역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 자유로움에 스스로 포만감이 들 정도로 나다워지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    


  자우림은 우리나라 밴드이니 2n년째 현역인 걸 자연스레 알았지만 라르크 앙 시엘은 근황이 어떤지 궁금해 재작년쯤 검색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아주 깜짝 놀라버렸는데, 그들 또한 여전히 활발하게 공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만으로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덕후의 급발진이 될 것이므로 이번 호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라르크의 노래는 나의 내면에서 자우림이 충족해줄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의 감성을 담당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로 출발해 국민적으로 사랑받는 밴드가 되고, 자신들만의 독특하고 마이너한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을 함께 해왔다는 점에서 두 밴드는 닮아있다.     


  제일 사랑한 두 밴드가 모두 건재하다니, 내가 보는 눈이 있다는 점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뮤지션과 팬의 관계성을 넘어, 그렇게 오래도록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나를 고무한다. 그들이 어떤 자리를 목표로 했다면 지금껏 사랑받으며 그 자리에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순간순간 그때의 열망에 따라 할 수 있는 선택들을 해오지 않았을까.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 중 하나이지 않을까. 그 열망의 순수함이 은연중 전해지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 취향의 음악을 한다는 것과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 그 밖에 지금은 또 다른 이유로 그들을 사랑한다.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것만으로 마치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살아온 내 시간을 모두 지지받는 것 같다.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까지 응원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페이스메이커다. 그들의 아름다움과 빛남을 내가 똑같이 가질 수 없지만, 그들은 내 안에서 고유한 것을 꺼낼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 자기다움을 꺼내고 그것을 고수했기에 대체 불가능한 밴드가 된 자우림과 라르크를 보면서, 내 서사를 써나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쓰는 삶을 늦게 시작한 만큼 다른 작가들에게 부러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이미 단단히 자리를 잡고 내가 쓰고 싶은 주제와 소재를 다루어낸 사람들을 볼 때 그렇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이 제일 슬픈 일인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지난 선택을 아쉬워하고 조바심을 내는 시기가 한 번씩 온다. 내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결과물이 한심해 보여 사기가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내가 문학을 하고 싶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자리에 오르려고 작가를 꿈꾼 게 아니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있는, 일상의 언어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가슴에 쌓이는 것을 꺼내 나의 목소리를 스스로 듣고 싶었다.     


 음악도, 문학도, 아무리 닿으려 애써도 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뻗길 반복하는 일일 것이다. 다른 누가 아닌 자신이 만든 기준에 닿지 않아 괴로워하고, 가져본 적 없는 아름다움을 막연히 그리워하고, 속속들이 보면서도 깨지 못하는 한계에 숨막혀 하는 일. 그럼에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쓰지 않는 삶보다 쓰는 삶이 나를 더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덜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좌우할 수 없는 결과에까지 고통받는 건 어리석다. 그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는 게 현명하고 생산적이다. 만약 나라는 사람의 서사가 누군가에게 닿아 영감이 되고 그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가 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이유도 나만의 길을 나다운 색깔로 만들어왔기 때문일 테니.    

 

 얼마 전에는 자우림의 곡 중 평소 잘 부르지 않던 ‘팬이야’를 혼자 불렀다. 새삼스러웠다. 2002년도에 세상에 나온 이 노랫말의 의미를 예전엔 몰랐구나. 내가 나의 팬이 되어준다는 마음이 어떤 건지 갑자기 와닿은 것이다.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요소요소의 고유함을 아끼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자유롭고 패기 있는 자기애.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무슨 일이 생겨도 변심하지 않을 팬 한 명을 얻은 기분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의 영역 안에서 독보적이다. 자신의 빛깔을 스스로 가치 없게 여기지만 않는다면 그 빛은 퇴색되지 않는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순간들로 삶을 채울 수 있길 바란다. ‘해냄’이 아니라 ‘해 나감’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길. 지나간 선택과 오지 않은 결과가 아니라 지금으로만 가득한 시간을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누릴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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