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1
리얼리스트 + 로맨티스트 매뉴얼 성향
“ 넌 왜 태어났다고 생각해 ? “
“ 뭐 ?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 엄마,아빠가 만나서 태어난거지. 과학적으로 그런거지. “
“ 태어난 이유가 없으니, 오늘 죽는다고해도 문제가 될껀 없겠네 ? “
“ ….. “
“ 널 탓하려는게 아니라, 누가 우리보고 왜 태어났냐고 ? 물어본적 있냐 ? “
그래. 나도 안다. 이 질문이 리얼에게는 얼마나 폭력적인 느낌으로 다가올지. 그렇지만 그 마음속으로 꼭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왜 ? 넌 대한민국 표준이니까.
“ 그럼 넌 왜 태어났는데 ? “
“ 나도 원래 이런 생각해본적 없지. 심리공부하면서 얼마전부터 생각을 하게 된데. 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요즘 <루시퍼 이펙트> 라는 책을 읽고 있거든. 1971년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라는 짐바르도 박사가 모의 죄수실험을 한 그 과정을 기록한 책인데.이거 완전 재미있어. 난 읽다보니까 자꾸 군대시절이 떠올라. 뭐,나한테 군대는 감옥의 정서가 있나봐. 우리 사는게 왠지 근데 거대한 감옥같은 생각 안드냐 ?. 내 생각이 과연 내 생각인가 ? 뭐.. 이런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 너, 쿠바혁명의 아이콘 체게바라 알지 ? 난 사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거든. 얼마전에 체게바라 영화를 봤잖아. 그 양반, 대단하더라고. 남미의 독립을 위해서 의사 때려치고 남의 나라에 가서 게릴라활동하고, 또 쿠바 혁명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더만. “
“ 잼있냐 ? “
“ 길어. 영화가. 아무튼 난 요즘 누가 나보고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말을해.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비밀이랄까. 내가 깨달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때 내가 살아있다. 라는 존재감을 느껴져. 난 그런 종족이더라고. 어찌보면 거대한 프리즌 같은 공간속에서 살아가는 노예로 길들여 지는게 아닌가 생각을 해. 이땅의 심리독립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너무 거창할까 ? 술맛 떨어지는 소리지 ? 하하 “
“ 진짜 ? 의외네.”
“ 왜,박근혜 생식기 발언으로 연대에서 짤린 교수있잖아. 심리학과 교수. 그 양반 꼭 체게바라 같더라고. 그정도 스펙이면 심리상담센터 하나 차려놓고 운영하면 돈방석에 앉을텐데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으니. 근데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알아가는 생각을 사람들과 공유하며, 심리독립을 위해서 살아가고싶어. 그게 내 사명이고, 내가 태어난 이유라고 생각해.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니라…”
“ 오호. 그래 ? “
“ 내가 널 쪼이려고 그러는건 아냐. 진짜. 한번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순 있잖아 “
벌써 맥주를 3병이나 비웠고, 친구는 소주를 2병째 들이키고 있다. 중년의 두 사내가 앉아서 술집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요즘 나랑 엮이면 이런 분위기에 빠져들고 만다.
“ 예전에 교육부인가 ? 고위직 공무원이 개돼지 발언해서 문제가 된적이 있잖아. 또 어디 기업의 아들이 개돼지 이야기를 해서 여론의 몰매를 맞은적도 있고. 근데 진짜 그 사람들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거 아닐까 ? 김동식 소설가의 <회색인간> 을 보면 지저인간들이 지상의 사람들을 납치해서 지하에 땅을 파는 일을 시키거든. 지상사람들은 굶어죽어가는 노예가 되어서 글,음악,미술 같은 예술을 잃어가며 좀비처럼 살아가. 이건 뭐 죽은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 <루시퍼 이펙트> 에 나오는 모의 감옥처럼 거대한 감옥속에 있는것 같은 생각도 들어. 장강명의 <덧글부대> 처럼 우리의 생각이 특정 집단에 의해서 디렉팅되고 있는건 아닐까 ? 이런 생각이 자꾸 드네 , 머리통이 요즘 복잡하네 “
“ 아, 또라이. 야, 근데 화장실 갔다오다 봤는데, 윗층에 노래방 있더라. 예쁘더라 “
리얼리스트는 자신에 대한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많이 불편하겠구나. 한가지 더 궁금한걸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아, 나의 호기심은 어쩌면 가학적인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 지하철 타면 임산부 좌석있잖아. 거기 남자나 임산부 아닌 여자가 타면 열받지 ? “
“ 어. 솔직히. 좀 화나지.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근데 임산부 아닌걸 어떻게 아냐. 여자는 알수가 없지.”
“ 글쎄. 3,4개월 되면 티도 안나겠지. 근데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은 여자들 있잖아. 10대도 있고, 40,50대들도 있고, 20대인데 왠지 임신하고는 거리가 먼듯한 여자도 있잖아 “
“ 그걸 어떻게 아냐 ? “
“ 애기가 있으면 몸가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 아무튼 임산부 좌석에 앉은 여자들중에 과연 임산모가 몇 퍼센트가 될까? 하는 생각이들더라. 남자들도 상당수 앉고. 그럴때 마음이 어떠니 ? 졸라 열받지 ? “
“ 맞어. 그래서 한 두칸 떨어져서 앉아서 어떤 놈이 앉나 지켜본다니까.개새리들“
“ 오호. 그러니까 피곤한거야. 스스로의 틀이 있어서 그 틀에서 벗어나면 엄청 불편해지는거야 “
로맨의 매뉴얼이 높다보니 보이는 전형적인 특성이 느껴진다. 사실 마음이 착하고 여린 사람들의 프로파일이다. 상황이 꼬이면 발작적으로 감정이 폭발할 수 있다. 돈 많은 놈이면 그건 갑질이되고, 돈없는 찌질이면 분노조절장애라고 불리울것이다.
사실 요즘 내가 쓴 몇편의 글이 어찌나 재미가 없고 딱딱한지, 한국의 가장 표준적인 친구에게 글에 대한 소감을 듣고싶어서 마련한 자리인데, 결국 쓴 글을 꺼내 놓지도 못했다. 내 마음속 감성적인 부분은 봉인이 되어버린듯 하다. 로맨과 아이디얼리스트 두가지 성향이 존재하면 적당한 긴장감으로 에세이같은 것을 잘 쓸 수있을텐데. 이 현상은 나중에 황교수를 만나면 좀더 자세하게 물어볼 예정이다.
숙취의 아침은 언제나 괴롭다. 노안으로 글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타이핑을 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속은 뒤틀리지만 마음만은 뒤틀리지 않고 깔끔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