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4]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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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기로 한다. 아이패드로 글을 쓰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쓰고 나면 홀가분한 느낌이 든다. 로맨-매뉴얼 만빵이라서 마음속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 임금님 귀는 당나귀” 하는 이발사의 심정이랄까. 브런치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잘 쓴 글을 올리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써서 올려야 하는데 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글은 이래야 한다는. 심리상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콘텐츠라는 콘셉을 만들고 싶다. 매뉴얼이 작동하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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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퀸이라는 패션 디자이너의 다큐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낀 건 오랜만이다. 기존의 패션쇼와는 다른 느낌. 무대 중앙 패션모델이 회전하는 원반 위에서 전위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모델로부터 2미터 정도 떨어진 양쪽에 자동차 조립하는 로봇 팔이 모델을 따라 하는 듯한 팔 놀림을 보여준다. 로봇과 인간의 조화로운 움직임. 신기하다. 패션쇼에서 이런 시도를 하다니. 앗. 갑자기 로봇의 손끝에서 형광색 잉크가 분사되기 시작한다. 모델의 흰색 원피스에 두 가지 잉크를 뿌려댄다. 놀랍다. 자연스러운 색채가 모델의 드레스에 입혀지기 시작한다. 놀라운 퍼포먼스다. 틀을 깨는 생각에 전율을 느낀다.
M자 아이디얼리스트는 예술적인 재능이 있다고 한다. 공무원이 과외시간에 자신의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는 취미 활동을 한다고 한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100만 뷰 영상이 탄생할 것이라고 황 교수는 말한다. 나도 유튜브를 생각은 한다. 생각만 하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써서 올리고 있다. 매일 쓰는 일기를 그대로 브런치에 올리고 있지는 않다. 페이지에 글을 쓰는 것은 속풀이 해장용 느낌이다. 브런치에 날것 그대로 올리고 있지 않다. 특히 일에 관해서는 쏙 빼고 있다. 쇼핑몰 운영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실제 내 삶에 가장 관련된 일인데. 이 부분을 빼고 올리고 있다. 왜 그럴까? 혹시나 쇼핑몰 판매에 지장을 줄까 봐?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올리면 안 되나? 다큐멘터리팀이 내 쇼핑몰을 취재하러 왔다면 어떻게 할 건가? 내 이야기를 빼고 다큐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하나? 아직 자기검열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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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2018.2월로 생각된다. 황심소를 들으면서 나를 들어내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내 개인적인 것을 들어내고 표현하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인터넷을 통해서 내 나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모순적인 상황이다. 처음으로 얼굴 사진을 업로드하는 순간. 눈찔끔 감고 올렸다. 지나고 보니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나에 대해서 관심도 없다.
지금 브런치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올릴까 망설이는 것도 비슷하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 없다. 내 이야기에. 나 스스로 나를 옥죄고 있는 올가미를 풀어 던져야 한다. 10년간 가장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의 현장을 부인하려고 하는가? 작은 쇼핑몰을 운영하지만. 내 1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수많은 경쟁업체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무한경쟁의 그 시장 통속에서 내 회사는 아직도 건제하다. 시즌2를 맞이해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그 시간이 좀 길긴 했다. 심리상담을 접목시키는 쇼핑몰. 그 도약을 위해서 내가 쇼핑몰 운영자라는 사실을 노출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제 나를 들어내는 실전에 들어가자. 해보면 또 재미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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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용 인스타그램을 에이젼트 송하고 함께 작업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호박 2알.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는 방법을 설명해주자마자. 에이젼트 송이 올린 사진이다. 당시 충격적이었다. 몇 년 동안 내가 만들어 놓은 회사 이미지. 고급스럽고 우아하고 세련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틀을 한방에 산산조각 냈다. 사진의 컬러티도 없고. 노출도 부족해서 뿌옇게 보인다. 예전 같으면 절대로 올리지 않았을 사진이다. 황 교수는 나에게 직접 SNS를 하지 말라고 했다. 로맨-매뉴얼의 특성상 그 틀을 깨기가 어려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차용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에이젼트 송이 자기식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내가 가이드를 한다면 또 내 스타일이 될 테니까. 그냥 버린 계정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1과 1이 만나서 0이 되는 느낌. 어느 순간부터 A와 B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C로 융합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나 혼자 했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현상이다. 놀랍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이유였다. 협업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만날 수 있었다. 신선하다. 혼자 일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갈등 상황으로부터 회피한 것이었다. 동굴 속에 혼자 은둔하는 히키코모리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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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의 현실들이 퍼뜩 인다. 이런 부분을 감추고 나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운영자라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회사의 서비스는 운영자 나 혼자서 끌고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인정하자. 츠타야 서점의 대표. 마스타 무네아키가 히라카타의 제 1호 서점을 운영할 때. 자신이 작은 잡화상을 운영한다고 자신을 비하했겠는가? 자신을 비하했다면 그가 현재 1400개의 지점을 운영하는 기업으로 성장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한다면, 그 기업의 미래가 있겠는가? 업에 대한 가치와 비전을 정리해 볼 때가 왔다. 처음 시작할 때 철학의 부재가 긴 세월 동안 회사의 에너지를 끌어올리지 못한 이유다. 인터넷에 회사 철학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