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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봄 Nov 15. 2020

성인 ADHD, 스케줄러 (메모)의 중요성

까먹지 않아서 좋아


 ADHD 진단받기 전, 매번 혼이 나는 상황에 메모하는 습관을 길들이려고 한적 있다. 그러나 매번 실패했다. 마감 일정을 쓴 메모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렸다. 중요한 일정을 쓴 메모는 보지도 않고 덩그러니 책상 위에 놓인 채 먼지만 쌓여갔다.


 잡생각과 망상, 그리고 혼잡한 내 머릿속에 중요한 것을 적은 메모가 들어올 자리는 없어 보였다.





 성인 ADHD를 진단받은 나는, 스케줄러를 사서 일정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잘 잊어버리는 ADHD에게 메모하는 습관은 좋다는 글을 읽었고, 이제 약을 먹고 있으니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다이어리를 사면 일기를 써야 한다는 왠지 모를 압박감이 들 거 같았고, 애초에 목적이 일정관리와 해야 할 일을 적는 것이기에 나는 가벼운 스케줄러를 샀다. 다이어리처럼 생겼지만, 일기를 쓰는 공간이 적기 때문에 스케줄 관리에 적합한 것 같았다.


 처음 습관을 길들이기는 어려웠지만, 계속 쓰다 보니 ADHD에게 스케줄러나 메모의 습관이 좋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



능률을 올려준 스케줄러


 그렇게 3개월째 나는 스케줄러를 빼놓지 않고 쓰고 있다. 내가 스케줄러를 쓰면서 무엇이 변했을까?


 대충 말하자면, 굉장히 많이 변했다.


 ADHD 약을 먹기 전 나는 일정 관리에 있어서 최악이었다. 약속을 잊어버리는 건 기본이었고, 일을 할 때 마감 시간을 몰라서 여러 번 묻는 일이 많았다. 마감 일정을 메모 하긴 하지만, 쓴 걸 잊어버려서 들여다보는 일이 없었다. 남이 보기엔 그냥 적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어차피 들여다보지도 않을 걸 왜 적나 몰라.


 하지만 약을 먹고 난 후, 스케줄러를 쓰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스케줄러에 적은 마감 일정을 보면서 일의 순서를 짜기도 하고, 먼저 프로젝트 마감이 얼마 안 남았는데 진행이 어디까지 됐냐는 일에 대한 쓸모 있는 질문도 한다. 무리하지 않게 일정을 정리하고, 기업에게 피드백 오는 날짜를 적어놓고 그전에 해야 할 일을 짜서 순서대로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질문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내가 나서서 스케줄러를 살펴보며 대답하는 일도 많아졌다. 중요한 것은 빼놓지 않게 되었고, 회의할 때도 스케줄러 안에 있는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말할 수 있어서 회의에서 내 의견을 정리하고 말하는 일도 편해졌다.


 회사 업무와 일정 관리가 스케줄러에 빼곡히 적혀 있으니, 스케줄러만 있어도 회사 업무는 어느 정도 진행이 됐다. 나는 중요한 일정이나 말을 할 때마다 스케줄러를 꺼내서 바로 적는 습관을 길들였고, 회의할 때도 스케줄러 뒤편에 있는 메모 부분에 중요한 것을 빼곡히 적는다.


 “하루 봄 씨, 많이 변했어~”


 그렇게 칭찬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회의할 때 낙서나 하고, 일정 관리도 제대로 못해서 마감 날짜로 모르던 내가 먼저 대답해주고, 스케줄러에 정리를 하니 많이가 아니라 사람 하나가 바뀐 수준일 거다. 게다가 업무 순서를 짤 줄 몰라서 사장님이 직접 짜주기까지 했으니, 사람이 얼마나 달라 보였을까? (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는 거지만…. 나를 자르지 않고 안고 가 준 회사에게 한 번 더 감사하다)


 스케줄러를 쓰면서 업무 능력만 좋아진 게 아니다. 나는 회사뿐만이 아니라 다른 할 일도 많았다. 그림도 그려야 하고, 영상 편집도 해야 했으며, 촬영도 해야 하고, 글도 쓰고, 청소, 소설 쓰기, 이모티콘 구상 등…. 시간을 정하지 않거나 일정을 나누는 게 아니라면 정신없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스케줄러에 일을 나눠서 적어 놓았다.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10분 정도 명상을 하자. 그다음 인스타 툰을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브런치 글을 쓰거나 소설을 적자.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영상 편집하고, 자막은 내일, 남은 시간에는 조금이라도 운동하고, 자기 전까지 이모티콘 구상하고. 그걸 스케줄러에 작은 글씨로 정리하고, 하지 못한 거나 오늘 못할 거 같은 건 다음 날로 옮겨 놓는다.


 그렇게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나니 끝내는 일도 많아졌고, 주말에 시간이 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케줄러에 적은 대로 생활하는 게 주말에도 빡빡해서 힘들었지만,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끝마치는 일도 많아졌고, 일정을 배분하니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쉬는 시간이 생겨버렸다.


 이처럼 ADHD 약, 콘서타를 먹으면서 스케줄러를 쓰게 되니 많은 게 달려졌다.




 사실 이번에도 까먹을까 봐 걱정하긴 했었다. 다이어리처럼 3일 만에 포기해버리고 책장에 꽂힌 채 먼지만 쌓일 줄 알았다. 하지만 작은 스케줄러는 내 가방에 항상 들어있었고, 아침마다 일정 관리를 하며 해야 할 일을 적으니 미루지 않게 되었다. (내가 저녁에 적지 않은 이유는 나는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밤에 적으면 다이어리처럼 책장에 꽂힌 채 청소할 때 발견할 거 같았다. 게다가 콘서타 약효가 끝나는 밤이 되면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일정 관리와 중요한 것이 적혀있는 스케줄러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진짜로 직장인이 된 기분도 들었고, 괜히 스케줄러를 뒤적거리며 대답을 하면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올라간다. ADHD 약을 먹기 전에는 하지도 못했던 걸 하게 되니 소소한 거라도 기뻤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 하는 건데도 말이다. 이게 보통 사람인가? 일반인은 항상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나는 이렇게 소소한 거라도 재밌어 죽겠는데.


 스케줄러가 뭐라고 작은 성취감까지 느껴버린다. 빼곡히 적힌 스케줄러를 보다 보면 ‘내가 미루지 않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다니!’하며 뿌듯해진다.


 그래서 ADHD 앓고 있는 사람에게 메모하는 습관이 좋다는 말이 있는 거 같다. 잊어버리는 게 많은 ADHD에겐 메모가 중요한 것이고, 웬만하면 나처럼 아침에 일정을 정리하거나 가방에 들어갈만한 작은 수첩이나 스케줄러가 가장 좋은 거 같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약효가 있을 때 정리하는 게 가장 좋은 거 같고, 무거운 거나 가방에 들어가지 못할 거는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가방에 들어가거나 항상 소지할 수 있는 작은 걸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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