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주로(酒路) 여기를 가 - #7. 테헤란路
나의 사무직 인생은 테헤란로에서 시작됐다.
첫 출근 날, 양복 인파와 함께 삼성역 출구를 나와 그 거리를 올려다본 게 기억난다. 마치 나도 사회의 쓸만한 일원이 된 것 같은 벅찬 기분이었다. 취준생활 동안 사원증을 맨 채 커피를 들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땐 몰랐었다. 매일 야근을 하며 사원증을 맨 채 선배들 먹을 김밥이며 샌드위치를 들고 다닐 줄은. 어떤 회사든 힘들지 않을 리가 있을까. 첫 직장인 승무원 생활을 하며 겪은 '언니'(나이가 어려도 선배는 무조건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했다)들의 시니어리티와 고된 스케쥴 근무를 경험해봤기에 내심 자신만만했다.
첫날부터 고역이었다. 몇백 장의 서류를 복사해야 했는데 복사기를 사용할 줄 몰랐다. 정장을 입고 식은땀을 몇 바가지는 흘렸다. 그렇게 시작한 사무실 업무는 비행기 안보다 고됐다. 모든 출입구가 잠길 때까지 야근을 해서 건물 개구멍으로 퇴근을 하고,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참다 보니 방광염에 걸렸다. 그런 업무 환경에서 성격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하루는 대리와 말다툼을 하다 달려들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와서 말리자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근무하다 퇴사했지만 지금도 테헤란로는 좋다.
술을 마실 때 장난스럽게 하는 말이 있다. 인생이 쓰니 술이 달다는. 고된 업무 끝에 동기들과 마시는 술은 정말 달았다. 8시간의 근무(1시간의 점심시간도 직장인에겐 근무의 연장이다) 내내 참았던 울분과 자괴감, 노동강도에 비해 적은 임금에 대한 허탈함 내일도 그다음 주도 출근해야 한다는 절망감이 점쳐진 기분에서 포스코 뒷골목을 쏘다니며 마신 술은 지금 생각해도 달았다. 왜 아빠가 항상 술냄새 가득 풍기며 퇴근을 했는지 그제야 십분 이해했다.
농민백암순대
또 순대다. 술안주로 순대만 한 건 역시 없다. 이 집은 술집이 모여있는 포스코 사거리 뒷골목에 위치한 식당이다. 그 많은 식당들 사이에도 이 집 앞에만 유독 줄이 길게 서있다. 원래도 근처 직장인들 사이에서 하동관 다음으로 손꼽히는 국물 맛집이었는데 수요미식회에 나오고부터 손님이 더 많아졌다. 아주 빨리 가던가 아주 늦게 가면 줄이 없다. 직접 만든 순대가 들어간 순대국과 순대모둠이면 점심시간에 먹었던 조미료 맛 가득한 제육볶음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오징어풍경
오징어볶음은 밥반찬으로만 먹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집의 불향 가득 나는 오징어볶음은 밥이 아닌 술과 더 잘 어울린다. 생각보다 매워서 매운걸 잘 먹지 못하는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너무 매운 음식과 소주를 같이 먹으면 빨리 취한다. 그래서 여기선 소맥을 먹는다. 이상하게 더 빨리 취한다. 어쨌든, 이 곳은 오징어 볶음 외에도 새우튀김이 유명하다. 통통한 새우와 오징어볶음을 먹고 난 후 볶아먹는 밥이면 1차 안주로 충분하다. 테라스와 지하까지 있어 모임으로도 괜찮다.
중앙해장
겨울이 오니 순대를 위협하는 술안주가 생겼다. 바로 곱창전골이다. 망원동에 청어람, 종로에 황소곱창을 뛰어넘는, 서울 최고의 곱창전골 집은 삼성동 중앙해장이다. 한우와 국내산 육우로 만든다고 하니 잡내가 가장 덜하다. 물론 이 세 곳 중에 가장 비싸기도 하다. 이 집은 2차로 많이 와 8시 정도에 사람이 가장 많다. 그 시간대면 포스코 사거리의 직장인들이 다 모인듯하다. 곱창전골과 소주를 먹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다. 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하고 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그들 틈에 있다 보면 동지애 같은 것이 샘솟기도 한다.
그러고선 이제 피곤하다며 9시 30분쯤 헤어진다. 직장인의 리듬에 맞춰진 거다. 나는 완벽한 택시 마니아인데 테헤란로에서 술을 마시면 꼭 선릉역까지 걸어가 술냄새를 풍기며 꾸역꾸역 지하철을 탄다. 술기운이 적당히 깬 채 집으로 돌아가 곯아떨어진다. 그러다 아침에 머리를 잡고 일어나 사내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해장을 한다. 평범한 일상의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그렇게 힘들었다면서 왜 테헤란로가 좋아?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답은 일은 힘들었어도 사람은 좋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몇 사람의 몫을 하는 것도, 불합리한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내 의견이 묵살되는 것도 모두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렇기 때문이란 걸 안다. 오늘도 가장 치열한 업무의 전장에서 누구보다 고된 하루를 보냈을 이들이 모여 단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