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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an 14. 2019

제주에 갔다 왔고, 나는 괜찮아졌다.

'제주도 갈 돈이면 일본을 가지'라고 생각했다.


수학여행으로, 대학 동아리 답사로 또 신입사원 연수로 갔던 제주도의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21살 때, 여행으로 간 제주도에서 렌트카 차 사고가 났다. 그 기억까지 더해져 항상 제주도는 내게 기피하던 여행지 1순위였다. 그런 제주를 심지어 혼자 다녀왔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렌트카도 다시 빌렸다.


여행 당일 편도선이 부어 열이 심하게 났다. 여행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는데 끊어둔 비행기표가 아까워, 또 눈치 보며 낸 연말의 귀한 연차가 아까워 등 떠밀리듯 출발했다. 결론은, 생애 가장 행복한 여행이었다.


혼자 간 여행에선 오롯이 내 기분만을 신경 쓰면 되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시간에 먹고, 더 보고 싶지 않다면 중간에 관광지에서 내려와 버려도 되었다. 그렇게 3박 4일간의 먹고 보았던 제주의 이야기.




#먹은 것


<심바카레>

제주도를 간다 하니 회사 동기가 시트로 정리해둔 맛집 리스트에 초대해줬다. 제주도를 자주 가는 지인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구글 스프레드였는데, 이 곳에서 여행정보를 많이 얻었다.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공개하자면 이 정도?


그중 '존맛'과 '강아지'라는 단어를 보고 찾아 간 '심바카레'. 딱 설명처럼 카페는 조용했고, 심바라는 강아지는 귀여웠고, 돈까스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우진해장국>

장담컨대, 공깃밥 한 그릇을 그렇게 빠른 속도를 비운적은 없었다. 이 식당을 고른 이유는 단지 공항에서 가까워 아침을 먹고 출발해야지라는 이유가 다였다. 유명하다했지만 고사리가 맛있어봤자라고 무시했다. 이렇게 또 뒤통수를 맞았다.


육개장보다 더 진했으며, 추어탕보다 더 고소했다. 든든하고 따뜻했다. 고사리가 가득 들어 있어 국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얼마나 푹 익혔는지, 지금 먹는 게 고사리인지 찢긴 고기인지 국물인지 모를 정도이다. 지금도 그 맛이 떠올라 침을 삼킨다. 아끼는 사람을 데려가 억지로 먹이고 싶은 집이다.



<부뚜막식당>

요가 선생님이 추천해준 갈치조림 식당이었다. 줄 서서 먹는 관광객 맛집이 아닌 현지인 추천 식당이라니. 기대감에 가득 차 도착했더니 식당 안엔 마을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었다. 오, 여기가 로컬이구나!

그런데 1인분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에 오겠노라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찰나 주인 할머니가 육지에서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고, 2인분 가격의 반으로 1인분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렇게 나온 갈치조림은 양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는 내게 1인분은 처음 만들다 보니 양 조절을 못했다고 제주도 사투리와 함께 껄껄 웃었다. 갈치조림은 정말 맛있었다. 정까지 든든한 여행지다운 식당이었다. 나중에는 꼭 둘이 가 2인분을 먹으리라.



#본 것


<새별오름>


제주도에는 3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오름들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한 곳을 꼽아 가기란 굉장히 어려웠는데 모두가 입을 모아 이 시기에 갈만한 오름으로 '새별오름'을 추천해주었다. 육지와 제주 사이 다리를 놓으려던 거대한 할멈이 치마폭에 흙을 싸 옮기다가 떨어진 흙덩이들이 오름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새별오름은 꽤 큰 흙덩어리였을 것이다. 크 큰 오름 전체에 갈대가 펼쳐져있었다. 진풍경이었다.



<제주맥주 양조장>

제주에 있는 동안 두 곳의 양조장 투어를 예약했다. 제주맥주 양조장과 맥파이 브루어리였는데, 그중 더 기억에 남는 곳은 제주맥주 양조장이다. 맥주 맛에 대한 자부심과 제주라는 지역에 대한 브랜드의 애정이 대단했다. 투어를 진행하던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맛있는 맥주를 만들지 않아요,

좋은 맥주를 만듭니다."

카스와 하이트를 넘어 10년 후에도 먹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맥주를 만든다니. 수제맥주 열풍에 한 부류로 가볍게 생각했는데 브랜드가 생각보다 진중하고 건강했다.



<요가>

'굳이 제주도까지 가서 요가를 해야 해?'

꼭, 굳이 제주도에서 요가를 하고 싶었다. 소원해진 요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선생님과 함께 '내적 기운'을 충만하게 만들고 싶었다. 요가를 끝내고 나서 왜 이효리가 제주도에서 요가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역시 그녀는 시대를 앞서가는 트렌드세터다. 나무자세를 하며 생각했다. 속부터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지.



<소심한책방>

종달리라는 조용한 마을에 있는 책방이다. 마을이 얼마나 조용하냐면, 근 몇 년 동안 이렇게나 조용하고 고요한 풍경은 처음 봤다.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시간이 멈춘 곳을 나 혼자 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마을 골목에 있는 책방이 소심한 책방이다. 주인장이 소심하게 고른 책 리스트들이 정갈하게 꽂혀있다. 교보문고에선 볼 수 없었던 책들도 몇 권 사 왔다.

계절과 조금 동 떨어지게 '입춘대길' 도 걸려있었다. 그래 언젠가 봄은 오니까.



#잔 곳


총 3박 중 2박은 게스트하우스 두 곳에서, 1박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묵었다. 제주도에 오기 전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 해진 상태였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 모두가 피곤해졌다. 낯선 이성 간의 술자리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눈치싸움도 귀찮았다. 그래서 파티가 없는 조용한 게스트하우스로 예약을 했다. 그런 날카로운 나에게 두 곳다 자신들이 만든 음식과 술을 내어주었다. 목적이 없는 술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하지 않아도, 눈에 띄기 위해 예쁜 척할 필요도 없었다. 목이 아파 말없이 있어도 제주도 흑돼지로 만든 수육이 나왔고, 시장에서 사 온 통닭이 나왔고, 제철 해산물과 딱새우로 끓인 해물탕이 나왔고 심지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도 나왔다. 쉼 이상의 것을 얻어왔다.




분명히 아픈 채 골골거리며 비행기를 탔는데, 너무나 말끔하게 건강해져서 돌아왔다. 몸뿐 아니라 정신도 맑아졌다. 서울에 도착해 공항을 나오자마자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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