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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20.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기억 속 새파란 바다를 향해

(둘째 날 #01) 십 년만에 성산일출봉을 다시 올랐다


어제는 하루 종일 20km를 걸어 다녔다.

덕분에 아주 아주 깊게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어제저녁에 버스를 놓쳐 고생하다가 도착한 식당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이 떠오르고 그탓인지 창밖의 제주 시내가 한층 칙칙해 보였다.

어제저녁 식사를 한 식당에는 미리 한 명만 식사할 거라고 얘기를 하고 갔다.

도착해서 요리 하나와 와인 350ml를 주문했는데 사장이 와서는 몇 번이나 계속해서 음식을 더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혼자 많이 안 먹는다고 사양했지만 몇 번이나 다시 와서는 양이 부족할 거라며 메뉴판을 들이밀었고 starter 메뉴를 추가해야만 했다.

나온 음식은 결국 누가 봐도 2인분이었고 절반을 겨우 먹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남은 와인을 마시는데 사장이 왔다 갔다 하며 얼른 먹고 나가길 바라는 투로 눈치를 줬다.

혼자서 거의 7만 원어치를 아주 불쾌하게 먹는 경험도 드물 것 같다.

버스 놓쳐서 거의 한 시간을 영하의 제주 바람을 맞으며 도로에서 고생하다가 택시를 타고 굳이 서귀포까지 가서 그 꼴을 보고 제주시로 돌아왔으니 어제저녁은 정말 기분 나쁜 마무리였다

.



하지만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첫째, 버스 배차를 확실히 확인한다.

어제 저녁에 열 받아서는 잠도 안 자고 버스 배차 표를 뒤져서 제주 버스 시간표 보는 법도 알고 오늘 하루치 버스도 다 꿰고 있다.

물론 그 덕에 새벽 한 시에 잤다.

둘째, 식당을 안 가면 안 갔지 다시는 이상한 곳에 함부로 가지 않는다.

너무 기분 나빠 식당 리뷰를 찾아보니 난장판이었다.

절반 정도는 별점 5점. 그런데 내용이 거기서 거기다.

절반 정도는 나와 비슷한 경험.

제대로 낚였다.

블로그에' 어디 어디 가볼 만한 곳 10' 이런 거에 음식점이 섞여있다? 또는 '어디 어디 맛집 추천 10'?

맛집을 찾는 것도 안목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행히 호텔 조식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비수기 평일 제주 숙소는 아주 저렴하구나.

조식 포함 1박에 약 9만 원 정도였는데 예약하고 나서 알았지만 아스타 호텔은 4성급 숙소였고 직원도 친절한데 조식까지 맛있어서 몹시 만족스러웠다.

역시 빅데이터는 믿을만하다. 숙소 후기를 꼼꼼히 찾아보고 예약하길 잘했다.

이제 식당도 꼭 지도 앱에서 리뷰를 확인할 테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숙소에서 더 가까운 정류장도 있지만 터미널까지 겨우 10분 남짓이니 걸어갈만하다.

제주 시내에서 성산일출봉까지는 거진 50km, 버스로 1시간 반 넘게 걸린다.

사실 성산일출봉은 아침 일출을 보려고 여행 코스에 포함시켰는데 첫 차를 타도 일출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이번 여행은 엄연히 버스 여행인 만큼 주요 행선지까지는 버스로 왕복하고, 그 사이사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만 택시를 타려고 다짐했다. 그러니 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은 다음으로 미뤄야지.

미련을 버리고 나니 한 시간 넘는 버스 여행은 나름의 재미가 있다.

졸다가 깨다가 차창을 보면 풍경이 휙휙 바뀐다.




성산일출봉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잠시간 걷는다.

비록 관광지이지만 상가 사이사이 옛날 가옥들이 눈에 띈다.

날씨도 아침에는 잔뜩 흐리더니 그래도 낮이 되니 조금 개는 것 같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다.

파란 바다를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니까.




성산일출봉 가는 길에 동암사에 들렀다.

새삼 제주에 절이 많다 싶었다.

조용한 절간에 녹음된 스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절에서 어린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경계심이 강한지 멀찍이서 바라보다 다가서면 도망가고 다가서면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절에 가면 종종 고양이를 마주치는 건 스님들이 잘해주셔서 그런 건가?

나는 고양이를 만나면 그 절의 스님이 좋은 분들일 거라고 짐작하곤 한다.

고양이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어제 산방산을 너무 신나게 오른 탓일까.

성산일출봉을 오르는데 근육통이 느껴졌다.

몇 달간 운동을 거의 못한 데다가 어제 신난다고 하늘그네 타고 산에 오르고 20km를 돌아다녔으니 근육통이 없는 게 이상하긴 하다.


마지막으로 성산일출봉에 올랐을 땐 어땠더라.

그땐 고등학생이었고 학교 교칙이니 뭐니 해서 교복을 입고 성산일출봉에 올라야 했다.

학교의 명성을 높이고 학생의 품위를 갖추고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그날 제주는 여느 때처럼 바람이 정말 많이 불었고 여학생들 치마가 다 뒤집어졌다.

여자애들은 치마를 붙잡고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어쨌든 정상까지 가야 했다.

어기적거리며 봉우리를 오르는데 그런 우리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크게 웃고 떠들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생각난다.

그때 치마를 입으라고 했던 선생님들도 미웠고 중국인 관광객들도 싫었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 이런 건가 했다.

결국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치마는 감당이 안 되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뛰어다녔다.

집합 시간만 맞추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단짝 친구랑 거의 망아지처럼 봉우리에 뛰어올라갔다가 뛰어 내려와서는 해안길까지 내려가서 놀았다.

사실 해안길은 수학여행 인솔 코스에 없었기 때문에 거의 나랑 친구만 거기서 놀다가 집합 시간에 합류했었다.

하여간 그땐 그렇게 뛰어놀아도 하나도 안 아팠는데.

그다음 날 한라산에서도 뛰어다녔다.

옛날 생각을 하며 오르다 보니 금세 정상에 다 달았다.

정상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네다섯 살 된 남자아기들이 특히 여럿 있었다.

가족 여행을 온 것 같은데 저렇게 어린애들도 산을 잘 타는구나 싶었다.

하긴 애들이 제일 체력이 좋다.

그중에 한 명은 폴짝폴짝 뛰어다녀서 할아버지가 거의 울상이 되어서는 '다쳐! 다쳐!'하고 좇아다니셨다.

내려오는 길이 조금 가팔라서 무섭기도 했지만 금방 내려왔다.

성산일출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사실 꼭대기가 아니라 해안가다.

고등학생 때 본 그 새파란 바다를 잊지 못한다.




하산길을 쭉 따라 내려가면 해안가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아래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은 기억 속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십 년 전에는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바다는 꿈처럼 새파랬다.

오늘 바다는 여전히 짙푸르지만 날씨가 흐려서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해안가에 밀려든 쓰레기에 인상을 찌푸리게 됐다.

예전엔 정말 깨끗해서 까만 바위에 반짝반짝 부서지는 파도가 보석 같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기억만 강하게 남아서 더 대조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안타까웠다.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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