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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23.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시계 반대 방향 미로에 갇히다

(셋째 날 #03) 비 오는 동백동산에서 길을 잃다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빗줄기는 가늘어질 기미가 없다.

그래도 배가 든든하니 발걸음이 가볍다.

동백동산으로 가는 길 아마도 마을 사람들의 오랜 쉼터였을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제주도에는 마을마다 이런 나무가 꼭 한 그루씩 있는 것 같다.

photos taken with the X100F
photos taken with the X100F

동백동산 가는 길에는 매화, 장미, 동백, 들꽃이 펴있고 귤나무 밭도 있다.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용도를 알 수 없지만 멋스러운 풍경도 볼 수 있다.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동백동산에 들어서면 입구에 습지센터가 있다.

선흘 1리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고 평소에는 생태 해설도 해주시는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해설이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출입자 대장을 기록하고 탐방길을 안내받았다.

탐방길은 총 5.1km의 고리 모양으로 시계방향으로 가든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가거나 상관없다고 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갈 경우에 먼물깍습지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전체를 도는 것보다 삼십 분 정도 시간이 덜 걸리고 그 이상 가면 그냥 한 바퀴를 다 도는 편이 낫다고 했다.

점점 비가 많이 와서 가방은 습지센터에 맡기고 우산과 카메라를 챙겨 습지로 향했다.




photos taken with the X100F

비자림이나 사려니 숲에 비해서는 사람들이 덜 찾는 동백동산에 온 이유는 비 오는 날 한적한 제주 숲길을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맑은 날의 숲도 좋아하지만 비 오는 날에 젖은 나무 냄새며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좋다.

게다가 동백동산은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어 있어 자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동백동산은 크고 작은 돌과 나무, 덩굴식물이 어우러진 곶자왈 지대이다. 연중 온도 변화가 적은 독특한 미기후 덕분에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고, 난대상록활엽수의 천연림으로 학술 가치가 높아 지방기념물(제1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2011년에는 동백동산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고, 2013년 전국 생태관광지로 2014년에는 세계지질공원 명소로 지정되었다.
(출처: 동백동산 숲편지 제48호)
photos taken with the X100F

동백동산 탐방로에는 1~52번 표지판이 있는데 나는 1번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숲에는 상상 이상으로 사람이 없었다. 드물게 사람들을 마주쳤는데 나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도, 반대 방행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먼물깍 가는 길까지 나는 습지센터에서 알려준 것처럼 사람들이 시계방향으로도 가고 반대 방향으로도 가서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photos taken with the X100F

동백동산에는 다양한 식생이 자라나는데 그중에는 아름다운 새나 희귀 식물도 있지만 여러 종류의 뱀도 있다.

그래서 입구에 가장 먼저 '뱀 조심' 표지판이 있는데 나는 예전에 일본 숲에 갔을 때 '곰 조심' 표지판을 봤을 때만큼이나 긴장했다.

비도 오니까 뱀이 지렁이처럼 여기저기 있으면 어떡하지.

뱀의 생리는 하나도 모르는 나로서는 숲에서 뱀만큼은 안 마주치길 바라며 반은 숲길을 반은 땅을 보며 재게 걸었다.

다행히 먼물깍에 갈 때까지 뱀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먼물깍까지 오니 절반을 돈 셈이다. 게대가 그때까지 표지판도 촘촘하고 길도 잘 정비되어 있는 편이라 퍽 안심했다.

문제는 이쯤 오니 비는 장맛비 수준이고 쫄딱 젖었다는 점이다.

내가 젖는 건 괜찮은데 카메라가 젖어서 걱정스러웠다.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비 오는 먼물깍을 십분 정도 바라보다 남은 절반을 마저 돌기 위해 출발했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게 느껴졌지만 잔뜩 젖은 카메라가 계속 신경 쓰였다.

손수건으로 닦는데도 계속 빗물이 묻어서 아무래도 얼른 센터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조급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시멘트 길이 나왔다.

'길을 잘못 들었나?'

탐방로에 시멘트 길이 있다는 설명은 듣지 못했다.

'카메라에 정신 팔려서 길을 잘못 들었구나.'

뒤돌아 가니 표지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도통 알 수 없다.

'내가 이미 지나온 먼물깍을 가리키는데?'

길은 심지어 네 갈래다.

하나는 내가 방금 먼물깍에서 걸어온 길, 하나는 시멘트 길로 이어지고, 하나는 먼물깍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이다.

그러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하지만 내가 맞게 가고 있는 걸까?

분명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까 다른 길은 다 아닌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숲은 울창해지고 길도 발목까지 물이 들어찼다.

내가 낮에 미로공원에서 몇 바퀴를 돌더니 방향감각을 잃은 건가?

아직도 미로에 있는 기분이다.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a photo taken with the X100F

가다 보니 이제 저 멀리 풍차 날개가 보이고 길이 끊겼다.

키를 훌쩍 넘는 갈대인지 억새인지 모를 숲을 해치고 가다가 완전히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도 알았다.'

한숨을 내쉬고 시계를 보니 네시가 되어간다.

두시 좀 넘어서 동산에 들어왔으니 아까 그 갈림길로 돌아가 빨리 가면 그렇지 늦은 시간은 아니다.

다시 그 물길을 해치고 갈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도와달라고 할 사람도 없다.

정말 단 한 명도 없는 곳으로 온 것이다.

지도 앱을 켜니 지도 상 내 위치가 실제 위치와 1km 이상 차이가 날 수 있다는 문구가 뜬다.

지도 위에 빨간 점은 어림짐작해도 코스에서 한참 벗어나 구사산 가까이에 찍혀있다.

기운도 좋다. 잠깐 헤맨 것 같은데 아주 멀리 와버렸다.

올 때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되돌아갔다.



문제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봐도 도저히 길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습지센터를 가리키는 표지판은 어디에도 없다. 제자리를 십여분 맴돌며 헤매다 가벼운 우비 차림의 아저씨와 마주쳤다. 척 보기에도 동네 분 같았다.

헤매다가 잠깐 사이에 두 번 세 번 마주치자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너는 어디 가니?"

"동백동산 한 바퀴 돌고 있었는데 습지센터로 돌아가는 길을 영 모르겠어요. 저는 습지센터에서 저쪽 먼물깍 방향으로 돌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아저씨가 다음 표지판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줬다.

시멘트 길로 쭉 가다가 뒤돌아보면 습지센터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었다.

말도 안 나오게 황당했다.

'표지판을 이렇게 두면 어떻게 알아. 가는 방향 등 뒤에 두면 어떻게 보냐고.'

아마 그곳이 '서쪽 입구'여서 거기서부터 들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고려해 표지판을 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던 사람은 어떡하라고요.

곤경에서 구해준 아저씨께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감사하다. 아저씨 정말로 감사해요.




아주 잠깐은 마을 산책길과도 겹쳐서 길이 잘 닦여 있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주 잠깐이었다는 점이다.

동백동산을 돌 때 몸소 체험한 주의 사항인데 1번부터 돌면 습지센터 쪽 입구부터 서쪽 입구까지는 그래도 길이 잘 닦여 있다. 짚단을 깔아 두거나 표지판이 촘촘해 길을 헤맬 걱정이 별로 없다.

서쪽 입구에서부터는 잠깐 시멘트 길이 나와서 완전히 코스에서 이탈한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길이 있다.

시멘트 길이 끝나고 다시 숲길이 시작되는데 문제는 여기다.

주의를 기울이고 봐도 이게 길인지 그냥 나무 사이인지 알기 어렵다.

아주 드물게 표지판이 있어서 겨우 길을 안 잃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습지 센터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더더욱 길 같지 않다. 표지판도 안 보인다.

먼물깍 가던 길에 반대방향에서 오던 사람들은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를 돈 게 아니라 비도 오니 먼물깍까지만 가고 되돌아오는 길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이 길을 걷고 있는 건 나밖에 없을게 뻔했다.

실제로 먼물깍을 지나서는 서쪽 입구에 아저씨 말고는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때까지 무섭지 않았던 숲길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고 아름다운 숲 가운데 속으로 험한 말을 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비가 오는 동백동산에서 이제 거의 경보를 했다.

비 오는 숲에 해까지 지면 꼼짝없이 조난이다.

그렇게 헐떡이며 숲 길을 해치고 가다 습지센터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a photo taken with the iphone se2

센터에 맡긴 짐을 찾는데 처음에 설명해주신 분 뒤편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잘 둘러봤어요?'하고 묻는다.

나는 그냥 서쪽 입구에서 갑자기 시멘트 길이 나와서 조금 헤맸다고만 했다.

"아이고, 거기가 표지판도 별로 없고 좀 헷갈려요. 아까 설명을 듣고 가지."

나는 맹세코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어쨌거나 무사히 나왔으니 이제 다 옛날 일이다.

카메라를 닦으며 센터 내부를 둘러보니 처음 받은 안내 책자 외에도 다양한 책자가 있어 그중 몇 개를 더 받았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썼다는 책과 손수 디자인한 북클립, 가방 등을 둘러봤다.

카메라는 잔뜩 습기가 차서 아쉬운 대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니 아주머니가 갑자기 책장을 분주하게 정리하며 묻는다.

"블로그 하나 봐요? 예쁘게 찍게 치워드려야지 그럼."

기대와 달리 난 특별히 블로그를 하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눈에 띄게 아쉬워하시더니 정돈을 그만두고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건 다 마을 주민들이 만든 거예요.

여기 책도 직접 쓴 거고. 꿀도 직접 양봉한 거예요."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나는 그중에 [나는 이제 동백씨가 되어간다.]라는 책 한 권과 아까 숲에서 만난 팔색조가 새겨진 북클립을 샀다.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날씨 좋을 때 꼭 한 번 다시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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