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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식 Oct 07. 2019

[A-11] 노사 책임경영의 이상(理想)

[A-11] 노사 책임경영의 이상(理想)

 

우리는 당신들을 불신하지만, 당신들은 우리를 신뢰하라!


회사를 경영하려면 많은 내부 규칙들이 필요하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종업원들을 회사가 정한 목표에 따라 일관성 있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이런 규정들의 대부분은 ‘종업원 각자에게 맡겨 놓으면 잘 안된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말하자면, 회사가 만든 규정들은 '불신'의 기초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경영 구루 찰스 핸디는,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종업원을 '신뢰'하지 않음을 전제로 만든 제도 안에서 종업원으로 하여금 회사를 믿고, (게다가!) 주인의식까지 가지면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파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를 괜히 경영철학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경영철학자 찰스 핸디

'근로계약'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생각없이 지나치지만, '근로계약'에서 우리는 업무장소, 노동시간 등을 정할 수 있지만, 얼마의 노력을 들여서 일을 할 것인정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불완전계약(incomplete contract)'이다. 어린왕자에게 왕은 '하품을 하라!'고 명령을 하지만, 어린왕자는 겁이 나서 하품이 나오지 않는다. '열심히 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하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얼마의 노력을 들여서 일을 할 것인가? 즉, '노동강도'의 문제는 이처럼 일방적인 지시나 불신에 기초한 제도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업인 현대자동차에서 조차 노동강도를 둘러싼 문제를 노사간에 원만히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갈등을 대충 봉합한 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정년을 채우고 할 때까지, 혹은 과격한 조합원들이 대거 은퇴하고,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한 구조조정이 가능해질 때까지.


과학적 관리법이라는 유령


지금부터 약 120 여년 전에 프레데릭 테일러(F. W. Taylor)라는 엔지니어가 과학적 관리법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하면서, 회사 안에서 기획하는 사람(Thinker)과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Doer)을 구분해 버렸다.


넥타이를 맨 비즈니스 스쿨 출신(1881년 설립된 펜실베니아 와튼 스쿨이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이지만, 정식 경영대학원에서 최초의 MBA 프로그램을 운영한 곳은 1908년 하버드 대학이었다)의 젊은이들이 스톱워치와 파일 바인더, 펜, 계산자를 들고 공장 곳곳에서 'The one best way'를 찾기 위해 뛰어 다니기 시작했고, 그 결과에 따라 노동자는 시키는 일만 하는 기계와 같은 신세가 다. 이제 노동자는 자신의 몸 동작 하나 조차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테일러리즘: 시간연구, 동작연구

과학적 관리법은, 기본적으로 종업원은 태업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회사는 가급적 임금을 적게 주고, 노동자는 가급적 일을 적게 함으로써 낮은 임금에 대한 보복을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일 쪼개기(분업)를 해서 누구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가장 단순한 형태로 업무를 만들었다. 태업을 없애기 위해 시간연구, 동작연구 그리고 복률성과급제를 채택하고 이를 통해 생산성을 이전보다 20~30%까지 끌어올림으로써, 구 소련의 레닌을 포함한 전세계의 기업가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테일러는 기업이라는 조직이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발적 헌신'과 '협조'를 통해 성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테일러리즘의 병폐에 대해 많은 지적이 있어 왔지만, 2019년 현재에도 대한민국 초일류의 자동차회사에서는 여전히 테일러리즘이 신봉되고 있다.


테일러리즘에 의해 분리되었던 기획(Thinking)과 실행(Doing)을 다시 이어 주자는 것이 바로 '노사 책임경영'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시키는 일만 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스스로 기획하고, 개선하고, 토론하고, 협조하고, 통제하는 노동자가 새로운 노사관계에서 요청되는 노동자이다.


생산성은 노동자가 책임지고, 사용자는 고용을 책임진다


생산성은 노동자가 책임지고, 사용자는 고용을 책임진다. 이게 바로 필자가 생각하는 노사 책임경영이다. 이건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1996년 YS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하면서 밝힌 '신노사관계 구상'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YS 이래 '사회적 합의'를 통 새로운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 노력 계속지만, 우리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노사 책임경영은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노와 사의 영역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경영자가 할 일이 따로 있고, 노동자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테일러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은 다 함께 의논해서 하는 것이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쪼개서 동일한 작업만 하루종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업도 사회시스템의 하나라는 사실과 노동자의 자발적 헌신이 기업의 성과를 높인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테일러리즘을 극복하고, 구분된 기획과 실행을 다시 통합하는 것이 새로운 노사관계의 출발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글을 다듬고 있는 동안, 우연히 유튜브(YouTube)에서 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남북통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선 서로를 '인정(!)'하고, 자유로운 왕래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후에 통일에 관한 방안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것이라는 요지의 말이었다.  너무 싱거운 말이 아니냐고 할 법도 하다.


그러나 도올의 견해는 필자가 노사관계 등에 관해 가지고 있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다. 필자는 줄곧 우리가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독일 등의 선진제도에 대해 그 제도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그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는지를 꼼꼼하게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해 왔다(브런치에서 지금 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노와 사가 각자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 두어야 한다고 먈해 왔다(상대에 대한 '인정'을 위해). 상대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라고 생각다. 노동강도에 관한 입장과 데이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각각의 노동조건에 관한 입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고용 유지와 생산성 및 임금과의 관계에 관한 입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등 지금까지 노사 간에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갈등의 대상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입장 차를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의 말에 반대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담합'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입지가 최선은 아닐지라도, 만족할 만한 상태이므로 이대로가 좋아. 적당히 투쟁(혹은 교섭)하는 척만 하면 돼'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 다음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기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다.  긴 말을 짧게 정리하면, 필자는 그 기본적인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모든 제도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노사관계로 좁혀서 말하자면, 1)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2) 노사의 입장 정리, 3) 외국 선진제도에 대한 구체적 이해, 이 3 가지가 갖춰 진다면 굳이 해외의 선진제도를 모방할 필요없이, 우리 사회에 적합한, 적절한 제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리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물론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 각국에서 성공적이었던 유명한 제도들을 우리나라에 이식하는 허망한 노력들을 하는 것보다는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모방으로 일관했던 그 숱한 모델들이 지금 우리사회에서 잘 작동하고 있는가? 필자가 여러 지면에서 주장했듯이 절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A4 용지 한 장 정도의 분량에 ‘그 제도는 이렇고', 따라서 ‘우리는 이래야 한다’는 정책까지 제시한 글을 본 적도 있는데, ... 그건 쉬워도 너무 쉽다. 그런 무책임한 주장은 제발 안했으면 좋겠다.


편의주의와 무책임이 난무하는 사회이다 보니, 대충 소리 높여 주장하고(전문가인 체하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주장들이 활개를 치는데, 필자는 [앞 글]에서 그러한 문제를 여러 번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고치려면 여러 분야의 많은 전문가가 오랜 시간 토론을 거쳐,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필자가 광주광역시에서 광주형 일자리모델을 설계하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관찰해 보니, 사회학자는 기업 경영을 모르고, 또 노동법도 잘 모르고, 법학자는 기업 경영에 무지하고, 경영학자는 노동법에 무지하고, 노동조합은 또 …, 이러니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이 주장만 난무하고, 구체적인 안(action plan)을 만들자고 하면, 하나마나한 공허한 문장들만 잡다하게 나열하고 마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듯, ‘안다는 것’은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에 대해 그 경계를 아는 것이다. 그게 아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즉 지식인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무지한 영역’을 감추기에 급급하지 말고 함께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지금 열리고 있는 수 많은 토론회, 세미나, 각종 제도화된 학술행사 등에 참석해 보면 알겠지만, 백날 회의를 거쳐 봐야 결과는 빈 손이다.


1990년 걸프전쟁 때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이라크를 공격했던 미국의 슈워츠콥(Schwarzkopf: 독일어로 검은 머리라는 뜻. 독일계 미국인이다) 장군은, 미국이 냉전에 대비해서 온갖 비상대책을 마련해 놓았지만, 정작 냉전에서 승리했을 때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서는 시나리오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 소련이 붕괴해서 냉전체제가 막을 내렸을 때 미국 군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슈워츠콥 장군

노사관계는 분명히 획기적인 변화를 맞을 것이다. 100 여년 전의 낡은 시스템이 계속 작동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변화하는 노사관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생각)이 필요하다. 나중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지 말고, 이제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자.


<다음 글>

[B-1] ‘독일 이야기’의 후반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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