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와 해시태그로 인생을 요약할 수는 없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산업혁명이 자원의 고갈을 초래했다면, 작금의 시대는 첨단의 IT기술과 통신기술, 신자유주의 무역질서에 따른 세계화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문화다양성의 고갈을 경험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지역적이거나 지협적 가치는 세계화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로 수렴돼, 결국 그 거대 다수가 소수의 싹을 먹어 치우는 기이한 현상의 한 복판에 우리는 서 있다.
자본은 지역을 벗어나 전 세계 어느 곳이든 그 막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인터넷 환경은 케이블을 벗어나 공기 중에 흡수되었고 손바닥 안에 그 둥지를 공고히 틀었다. 그렇게 발달된 통신환경은 세계 곳곳의 소식을 온 세상으로 전해 나르고 있으며, 세계화에 따른 빈번한 인적 물적 이동은 문화의 이동과 전파를 한결 손쉽게 하고 있어 지구촌이란 말이 현실이 되었다. 언뜻 생각하면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우리는 각종 영상과 음원, 자료들을 인터넷의 다양한 플랫폼과 경로를 통해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거나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심지어 SNS 서비스를 통해서는 개인의 깊숙한 사생활까지도 세계 곳곳으로 퍼 나를 수 있으며, 누구나 원한다면 개인을 깊이 관찰(감시)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다양성의 위기라니.
불행히도 이러한 환경에 <힘>이 더해지면 긍정적 부분은 매우 우려스러운 국면으로 변하게 된다.
몇몇 콘텐츠들은 상업적인 이유로 적극적으로 유포될 것이며, 그 콘텐츠들이 폭넓게 유포되면 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선택받지 못한 이야기들은 상대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매체를 장악하는 자본력 혹은 권력은 결국 적자생존 든든한 지지기반이 된다. 든든한 우성의 DNA를 가진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가장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은 “힘 Power”인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상의 음원차트의 신뢰도에 관한 문제가 방송을 통해 불거졌다. 상위에 랭킹 되기 위하여 매크로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조작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련의 조작 과정이 거래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 페이지 혹은 상위에 랭크되지 않는 음원들은 그만큼 노출의 기회가 줄게 되고, 순위권 밖으로 밀려 사라지게 되는 현실. 그래서 인기곡은 더욱더 클릭수를 올려간다.
‘영어’라고 하는 힘 있는 언어가 수많은 언어를 잠식해 버린 것처럼, 힘 있는 “문화”가 그렇지 않은 수많은 문화를 삼켜 버리는 일은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상식적 이야기다. 80년대 중반 이후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으로 대별되는 국제무역질서(?)는 자국의 영향력을 또 다른 방법으로 세계에 강요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 교묘한 무기의 공포는 군국적 식민시대의 그것처럼 무력과 강압을 바탕으로 시장을 개방하도록 강요해 왔으며, 그 시장의 상품 안에는 문화는 물론 라이프스타일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것들이 포함되었다. 겆잡을 수 없이 몰려든 소위 글로벌한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은 우리 주변 일상을 일시에 점령하였으며 이제는 내 주변을 구성하는 아주 친숙한 것들이 되었다. 이러한 선진 문화(?)의 무차별적 쇄도는 마치 전 세계를 상대로 펼치는 장기적 세뇌 프로젝트와 다름 아닌 것이 되었다.
이처럼 자유로운 소통은 다양한 의견들과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만, 불행히도 상업적 활동으로 이야기가 옮겨지는 순간 생산적 순기능은 역기능과 우려로 돌변하고 만다. 마치 무한 증식을 통해 장기와 우리의 신체를 잠식해 가는 암세포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화와 문화적 다양성의 풍부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1%를 위한 99%의 희생을 요구하며 탐욕스러운 금융구조를 강변하고 있는 세계 금융의 심장 월스트리트의 모습은 1%의 경제강국을 위한 99%의 국가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를 상대로 ‘주주의 최대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글로벌 기업이 있는 한, 자국의 잠재적 이익을 위해 문화적 강요를 정책으로 삼는 패권 국가가 존재하는 한, <힘>으로 구축해가는 통일(?)은 다양성을 먹이 삼아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의 내용들은 세상을 설명하기 무거운 주제의 시선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좀 가벼운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키워드, 해시태그...
SNS를 통해 수많은 개인의 일상이 #해시태그와 함께 노출된다.
#셀카, #먹방, #일상, #행복, #...
그렇게 노출된 태그들은 관심분야를 검색할 때 동일한 태그 내용을 묶어서 보여주거나 관심 있는 주제의 내용물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꼬리표다. 긍정적 부분이다. 하지만 최근 해시태그가 사용되고 있는 양상은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이미지와 짧은 글에는 상황을 설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태그들이 더해지고, 이러한 나열은 연출되었거나 과장 된 한순간을 멋지게 설명하는 또 다른 자아가 된다. 자신을 가장 잘 말해주는 표현행위라 여기며 더 많은 좋아요와 하트를 기대한다. 이렇게 키워드나 해시태그는 세상의 모습을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온갖 유형의 태그들을 양산하며 SNS를 타고 넘쳐난다. 자극적이고 지극히 짤막한 문장들이 해시태그로 통합되어 끝없이 나열된다. 범용화 되어 집중될 수는 있지만 그 속에는 스토리가 없다.
우리는 이제 결정해야 한다.
‘좋아요, 나빠요...’가 내 생각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부, 명예, 권력이라는 키워드가 그러한 것들을 담보해 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늘어나는 하트 숫자가 나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주류가 아니더라도 진솔하게 자신을 바라볼 기회가 된다면 비주류가 주저 없이 되어야 하며, 외부의 무차별적 쇄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장벽을 쳐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넘어서야만 한다. 수많은 다름과 낯섦. 좋음과 싫음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의견을 만들고 경향과 취향, 문화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물리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경계를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