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급한뭉클쟁이 May 16. 2023

우리 집 포스터를 소개합니다

집주인 취향 가득 담긴 포스터 컬렉션

모든 사물은 그 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세상의 진리(?)처럼 사물도 마찬가지다. 각 물건의 개성과 이야기의 매력에 빠지다 보면 자연스레 물욕이 차오르기마련인데 어쩌면 딱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재물을 탐내고 물질주의적 성향을 보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물품들을 찾아 모으기 시작한다. 수집가로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보다 더 전문적으로 물품에 대한 정보와 구매 경로를 물색하고 그렇게 수집된 물건 하나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만의 독창적인 (original)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 (storytelling)'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면 주로 화자는 본인이고 청자는 타인인 경우가 많다. 이는 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물건 수집에 있어서는 꼭 타인이 아닌 나 자신도 소중한 관람객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이게 더 쉽다. 본인 취향이 가득 담긴 소장품 앞에서 스스로가 관중이 되어 수집된 물품들을 관람할 때는 만족감도, 전반적인 뭉클함도 훨씬 더 크게 증폭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물건을 모으는 일을 좋아했다. 반드시 돈으로 구매하여 소장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어도 계속 수집하고 보관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들추어보는 것을 좋아했다. 정말 생뚱맞은 수집품이지만 기억을 되돌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아파트 현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자영업 사장님께는 소중한 '광고 매체'이자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생들에게는 하루치 '일거리'이며 아파트 주민과 환경미화원 선생님들에게는 '골칫거리'일 수도 있는 광고 전단지를 참 좋아했다. 아주 구체적인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광고지만의 알록달록한 색감과 번들거리는 종이 질감, 그리고 간략한 상품 설명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나가는 게 재밌게 느껴졌던 것 같다. 비슷한 이유로 나중에 커서 여행을 다닐 때도 방문한 모든 문화 시설의 팸플릿과 가이드북 그리고 입장권 티켓을 절대 사수하고 수집했다가 여행을 찬란했던 순간들을 추억하곤 했다.


슬슬 용돈을 모으고 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지금처럼 대학원생이 되어 작지만 소중한 월급을 받게 되자 구매 행위에 있어서도 본인만의 '취향'을 담아낼 여력이 생겼다. 경험적 소비 활동을 바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쌓였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화된 나의 취향에 따라 학용품, 다이어리 용 꾸미기 스티커, 목도리나 장갑 같은 패션 잡화 그리고 산미가 가볍게 맴도는 드립커피 백 등을 꾸준히 사모았다. 수집에 대한 취미는 오랜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자취를 시작하며 한층 더 진해졌는데 실제로 물리적인 공간이 늘어난 것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확장된 나만의 공간을 심심치 않게 채울 수 있는 아이템인 포스터 컬렉션이 시작되었다.


1인 가구 자취 집은 보통 원룸 또는 1.5룸 정도의 공간  대부분인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빌라나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경우 취향 담긴 벽지를 선택하기는커녕 주어진 공간 속에서 말썽을 피우지 않고 깨끗하게 살다가 이사를 떠나는 것이 '국룰'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보편적이고 개성 없는 벽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면 시간 포함해서 길게는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는 나만의 소중한 공간 속에 보다 더 '나스러운' 것들을 채워 넣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한정된 지면 위에 마음에 드는 가구를 실컷 배치할 수도 없는 터고 크고 작은 형태의 '오브제 (objet)'로 공간을 꾸미기엔 난잡하게 느껴질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곳은 바로 '벽'이었다. 포스터 장식으로 고유한 이야기 없이 텅텅 비어있는 흰색 벽지를 채워보기로 했고 이를 위해서 투박한 못을 박을 필요도 없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어차피 허용되지 않지만 말이다.)


조화로운 포스터 배치를 위해 고민해 본 결과 '포스터를 위한 포스터 구매'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칫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나의 다짐에 대해 설명을 덧붙여보자면 단순히 유명하고 유행하는 포스터를 사모으기보다는 하나씩 사연을 갖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모든 벽지를 채워 버리자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포스터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하나씩 자연스레 모이는 대로 벽에 걸어두기로 마음먹었다.


17년 지기 친구의 집들이 선물로 시작된 나의 포스터 컬랙션의 첫 번째 작품은 아트 갤러리 "Grace Of God"의 시그니처 달력 포스터이다. 패브릭 재질로 만들어진 해당 작품은 테마별로 알록달록한 사진 조각들을 붙여 완성된 콜라주 작품이다. 보통 음식을 테마로 한 작품이 많은데 빵과 계란, 그리고 버터를 곁들인 브런치, 일본식 라멘, 도넛과 케이크, 그리고 꽃다발 등 재치 있는 사진들과 개성 넘치는 배치 전략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매력을 가진 작품들이다. 매번 엄청난 선물 센스를 자랑하는 그녀 덕분에 제대로 취향 저격 당한 나는 2021년 1월 선물 받은 그 작품을 시작으로 나는 매년초 연례행사처럼 Grace Of God의 패브릭 달력 포스터를 사모으고 있다. (내년에는 또 어떤 작품이 판매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궁금해 정말.)

2021년 1월 친구에게 선물 받은 빵 달력 포스터. 
2021년을 시작으로 Grace of God 달력 포스터에 입덕하고 말았다. (사실 달력 포스터 말고 티셔츠 굿즈도 구매한 적 있다.)
올해는 더 일찌감치 구매해서 2022년 연말부터 받아 본 빵/브런치 테마의 달력 포스터. 다른 디자인도 있긴 한데 노란 색감의 탄수화물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가 있어서 좋다.
괜히 떼어내기 아쉬워서 3년 치 쭉 장식하고 있다. 내년 초에는 미국에 있어서 빠른 구매는 어렵겠지만 꼭 하나 더 추가해야지!

두 번째 작품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패브릭 포스터다. 이 작품 역시 고유한 '썰'을 갖고 있다. 해당 패브릭 포스터는 대전 시립 미술관 아트샵에서 구매했지만 내가 처음 이 작품을 감상한 곳은 무더웠던 2018년 여름, 뉴욕 현대 미술관 (MoMA, Museum of Modern Art)이다.  학부 졸업을 4개월 앞두고 있다는 해방감과 (물론 4개월 후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땐 꽤나 긍정적인 성향을 보유하고 있었나 보다) 처음으로 밟아본 미국 대륙의 물질적 풍성함 덕분에 나는 말 그대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두 달 정도 뉴욕에서 머물렀지만 본인을 '여행자'로 치부하며 끊임없이 소비에 대한 합리화를 수행하던 나는 번듯한 직장이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쇼핑과 문화생활에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뉴욕 생활의 반이 지나갈 무렵 함께 인턴십에 떠난 친구들과 동행하는 대신 처음으로 혼자 도심 속을 여행했고 센트럴 파크 산책 후 MoMA에 도착한 나는 오디오 가이드 속 큐레이터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작품 하나하나를 음미했다. 수많은 작품들 중 상상했던 것보다 규모도 작고 유명세로 인해 몰려있는 인파 때문에 차분한 감상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 당시에는 스스로가 지구 반대편, 지구의 수도라고 불리는 '뉴욕'의 한 복판에서 MoMA 속 반 고흐의 작품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하게 느껴졌고, 귀국 후 대학원 생활을 이어나간 지 3년이 지난 2021년 여름, 같은 작품을 포스터로 마주하게 되니 유독 반가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원작을 처음 접했을 때의 뭉클함을 오랜 시간 간직하기 위해 큰 고민 없이 포스터를 구매했고 지금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벽을 위풍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2018년 여름 뉴욕 MoMA에서 마주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당시 무료였던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전시를 즐겼더니 더 좋았다. 
그렇게 반 고흐의 작품은 (진품은 아니지만) 우리 집 거실 한쪽 벽을 장식하게 된다. 볼 때마다 뉴욕 생각 나는 중. 

다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바로 파리 지도가 그려진 포스터다. 파리 마래지구의 Enograph 포스터 샵에서 구매한 작품인데 여기에도 우리만의 이야기가 있다. 8박 10일 동안 꿈같은 파리 여행을 마무리하기 전 마지막 오후,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떠나기 전 언니와 나는 마래지구 숙소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리고 싶은 디자이너 스토어를 찾고 있던 중 길 찾기에 자신감을 비치던 언니가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무튼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귀국 전 조금이라도 파리를 더 즐겨야 한다는 마음에 길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유독 속상하게 느껴지던 찰나 언니가 파리 여행 전 구글맵에 저장해 둔 포스터 샵인 Enograph를 갑작스럽게 발견하게 되었다. 평소에 유치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걸 바로 세렌디피티 (serendipity; 뜻밖의 재미)라고 하는 걸까... 싶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도착하게 된 포스터샵에서 언니와 나는 파리 여행을 기념할 수 있는 지도 포스터를 구매했다.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 건물은 무엇이고, 저 건물을 무엇이며,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도시를 산책하고 나니 슬슬 대략적인 동네 파악이 완료되던 시점이었다. 파리에서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추억하고자 마음에 지도를 더욱 진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지도가 그려진 포스터를 구매했는데 패브릭이 아닌 종이 질감의 포스터라 귀국길에 구겨지지 않도록 챙기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도 있다.

파리 마레 지구에서 방문한 Enograph 포스터 샵. 짐 여유가 있고 장식할 공간이 충분하다면 솔직히 하나씩 다 사고 오고 싶었다. 색감도 파리만의 도심 속 풍경도 다 너무 예뻤
치즈나 파스타를 테마로 한 포스터도 있다. 볼 때마다 너무 배고파질 것 같아서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파리 도심이 한눈에 보이는 지도 포스터를 선택했다. 한 번 여행을 다녀오니 어디가 어딘지 파악할 수 있고, 당시 그곳을 걷고 있던 추억들이 떠올라서 너무 좋다. 

네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일리야 밀스타인 (Ilya Milstein)의 작품이 담긴 패브릭 포스터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작가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공간과 사람들의 고유한 매력을 개성 있게 그려낸 작품들이 인상적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칼럼계의 아이돌(!)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님의 <공부란 무엇인가> 표지 아트워크를 좋아해서 알게 된 작품이다. 따뜻한 분위기 속 책장이 서적으로 가득 차있는 공간 안에서 독서 또는 집필 중 생각에 잠겨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는 작품 속 남자의 뒷모습이 인상 깊은데 어떤 사색에 빠진 것일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꽤나 큰 사이즈의 패브릭 포스터를 구매해서 미닫이 문을 장식했는데 내가 추구하는 분위기와도 잘 맞고 유독 좋아하는 그림이라 더 마음에 드는 소비라고 생각했다.

색감도 짙어서 더 좋았던 일리야 밀스타인의 포스터. 존경하는 김영민 교수님의 "공부란 무엇인가"의 표지 작품이라 알게 되었는데 해당 작품이 나의 최애지만 다른 작품들도 다 매력있다

사실 소개할 포스터는 더 많지만 거의 시리즈 물 분량이 될 것 같으니 한 가지 작품만 더 엄선하여 소개하자면 바로 "You don't know how lovely you are"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액자형 포스터다. 번역하면 "당신은 스스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는군요"라는 의미인데 참 설레는 한 마디다. 좋아하는 썸남한테 받은 선물이었다면 더 기절각이겠지만(?) 좋아하는 동네 친구한테 받은 선물이라 더 좋았다. 같은 연구실에서 석사 공부를 마치고 타 연구실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한 동네 친구인 그녀는 유독 내가 연구실 안팎에서 느끼는 공허함이나 불안감, 또는 스트레스에 대해 잘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솔로몬' 고민해결능력을 통해 매번 나에게 효과적인 생각 회로 정리법을 소개해줬는데 이는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직접적인 해결 방안은 아니었지만 속상함 속에서 하루빨리 헤쳐 나올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 전략이었다. 사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그냥 그녀와 수다 떠는 시간 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 큰 힘이 되었다. 2년 전 연말, 계속되는 논문 투고 준비와 게재 거절 연락에 지칠 때로 지친 나에게 차 한 잔, 맥주 한 잔을 함께 해준 그녀 덕분에 나의 소중함, 나의 사랑스러움을 잊지 않고 자존감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나도 꼭 같은 마음을 그녀에게 선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이어리 쓰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포스터와 스티커를 함께 선물했던 소중한 친구. 그녀의 마음이 닿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실용성은 없지만 예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물건들을 "예쁜 쓰레기"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이러한 명명법에는 유독 냉정하고 차가운 마음과 더불어 절대적인 논리상의 오류가 존재한다. '쓰레기'란 더 이상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또는 이미 내다 버린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그 누가 이토록 예쁘고 귀여운 물건들을 내다 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쓸모'없이 예쁘기만 하다는 말도 앞뒤가 매끄럽지 못하다. 나에게 쓸 만한 가치란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계속 쳐다보고 추억하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되새긴다는 의미인데 그 누구도 특정 물건들이 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지레짐작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거창한 합리화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상관없다. 당장 내 공간 속 벽들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포스터들처럼 이 세상 모든 물건에는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은 것들이 없다. 유일한 관건은 물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화자의 마음 가짐이자 그 이야기의 진가를 알아보고 함께 감동할 수 있는 청자의 열린 마음일 것이다. 계속해서 선물 같은 포스터로 가득 찬 나만의 공간에서 뭉클한 일상의 행복을 곱씹어가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