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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Jul 08. 2023

뻔하디 뻔한 여행의 이유

물리적 벗어남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오늘은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또는 읽었듯이)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 작가의 산문 작품 제목이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는 소설가 김영하의 매혹적인 이야기는 읽자마자 당장이라도 비행기표를 구매하고 숙소 예약 어플에 접속하여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만든다. 4년 전 봄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을 읽어보며 유독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 있었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었다. 해당 구절을 읽고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던 가려움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어쩌다 보니 입학한 대학원에서 석사 신입생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후 해외 대학원 입시 준비와 관련된 결정 장애들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미래를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들에만 집중하다 보니 스스로 오늘 해야 할 일들의 목록에는 자연스럽게 소홀해졌고 "현재"에 소홀한 일상이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니 꽤나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을 읽었던 같은 해 여름, 답답하기만 했던 일상을 벗어나게 해 준 일주일간의 시카고 여행을 통해 (당시 국내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북미 학회 참석을 지원해 주는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상생활의 공기 순환을 위해 물리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걱정 근심의 원천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7일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움만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행복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같은 해 연말 코로나 19로 인해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마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졌다.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은 꿈꾸기 더 힘들어졌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답답함에 시달리던 3년간의 팬데믹이 마무리되고 작년부터 학회 및 여행을 위해 다시 비행기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주일 동안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을 위해,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는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있는 친언니를 만나기 위해 도합 42시간 동안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이동하게 되었다. 덕분에 총 18일이라는 시간 동안 대전 유성구를 벗어나 (즉, 우리 학교 응용공학동에 위치하고 있는 대학원 실험실을 벗어나) "나"라는 사람의 "현재 (present)"에 심혈을 기울여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말 찬란하고도 기쁜 순간들이 많았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배제하고 "좋았다"라고 형용하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지만 정말 "좋은" 여행이자, "quite a journey"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물리적으로 내 일상의 본진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내고 온 시간 속에서 "현재를 위협하는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를 뒤로하고" 온전히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평온의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간단하게 학회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감사하게도 우리 지도 교수님께서는 "해외 학회"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신다. 덕분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충분한 명분이 있다면 해외 학회 참석에 있어서 흔쾌히 지원해 주신다. (절 받으세요, 교수님…) 대학원생으로서 제주도, 부산 등 국내 학회는 익숙하게 다닐 기회가 많지만 당장 내 주변만 봐도 해외 학회는 굉장히 귀한 기회이기 때문에 매번 감사한 마음으로 학회에 다녀오고 있다. 이번 싱가포르 학회는 다행히도 학생 대표 활동을 통해 장학금을 받아 참석하게 된 학회이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람들과 교류하며 영감을 얻는다 (Meet people, get inspired)”는 모토에 진심이었던 나는 국제학술대회 조직 위원회 부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동기가 비슷했다. 학위과정을 밟으면서 수행한 연구 결과에 대해 발표하고, 동료 과학자들과 토론하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더 넓은 세상 속 남의 연구실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는 것인지 구경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좀 더 개입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고 이번 학회에서의 학생 대표 활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덕분에 기죽지 않고 나 자신을 알리고, 내 연구를 알리고, 나중에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때 잘 봐달라는 암묵적 부탁을 위한 네트워킹 세션에도 참여하고. 열심히 준비해 온 만큼 얻어가는 것도 분명하고 다채로운 시간이었다.

학회 일정을 마치고 산책 겸 다녀온 싱가포르 Merlion Park. 동상이 너무 인상 깊어서 관련 굿즈를 많이 샀다!
격렬한 환영인사를 보내고 있는 학회 조직 위원회
네트워킹 세션에는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근처인 Gardens by the Bay에서 케이터링 서비스와 함께 사람들과 교류했다. 우리 분야 연구하는 사람 너무 많아서 기죽을 뻔.
학회장 음식도 맛있었지만 싱가포르 도착한 첫날 먹었던 야쿤카야토스트의 세 조합을 잊을 수 없다. 나름 탄단지도 훌륭하다(?)
싱가포르까지 왔는데 칠리 크랩이랑 망고 밥은 참을 수 없지... 싱가포르에서 살다온 친구 덕분에 맛있는 음식 찾는게 훨씬 더 수훨했다. (덕분에 교수님께 메뉴 리더십 칭찬 받음!)
조식이 포함되어있던 숙소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원래 아침 시간을 제일 좋아하는데 노트북 챙겨 내려가서 식사 후 이메일도 쓰고, 학회 내용도 정리했다.

이전에 참가한 학회에서도 해외 대가들의 (즉 각 연구 분야에서 ‘빅 가이 (big guy),’ ‘빅 걸 (big girl)’이라고 일컬어지는) 강연을 듣고 포스터 발표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학회 활동에 임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특별했는데 그 차이점은 바로 스스로가 맡은 역할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 또는 구두 발표 이외에도 함께 활동 중인 학생 대표 동료들과 함께 세션을 기획했고 그 시간이 모두에게 유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연사들과 계속해서 연락하고 질의응답 시간이 원활할 수 있도록 사용가능한 도구들을 모두 다 활용했는데 덕분에 성공적으로 세션을 마치고 생명과학분야와 관련된 기업가들과 친분도 쌓을 수 있었다. (나중에 취직 기회가 있다면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우선 해외 취직이 목표라면 비자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학회 기간 내내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내 역할의 쓸모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라 더 자신감도 생기고 유익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든 자신감을 갖는 일은 참 중요한 것 같다. 안 될 일도 되게끔 만드는 미묘한 차이는 바로 자신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주일간의 학회 일정을 마치고 귀국 후 바로 다음날 다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일정은 학회나 출장이 아닌 개인 휴식을 위한 여행이었는데 바로 얼마 전부터 유럽 생활을 시작한 언니를 만나기 위한 휴가 일정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 언니를 만나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귀국 후 열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열세 시간 반짜리 비행시간을 자랑하는(?) 대한항공 국적기에 내 몸을 실었다. 여행기간 내내 비타민과 홍삼 등 면역력과 체력 증진을 위한 식품 보충제를 계속 섭취해야 했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풍요로웠다. 당장 해야 할 일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피성 휴가는 아니었으나 익숙한 곳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밀려오는 기쁜 마음도 분명했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무기력을 느끼기 시작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미천하게 느껴지는 당장의 우물을 벗어나 더 큰 세상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탐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른다. 과도한 안락함을 선사하는 일상을 벗어나 아름답지만 이질감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울 수 없는 여행지를 마음껏 흡수하다 보면 여행의 끝자락쯤 문득 일상의 달콤함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여행지에서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변수들과 이들을 대비하기 위해 맴도는 긴장감 대신 예측 가능한 대로 흘러가는 소중한 나의 일상이 보고 싶어 지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암스테르담, 베를린의 아름다움에 취해가는 본인을 발견할 때쯤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때마침 도착한 논문 리비전 이메일도 큰 몫을 했지만...) 탈-일상 속에서 이만큼의 에너지를 충전했다면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언니와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했고 곧바로 실험실로 돌아와 묵묵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손 보기 시작했다.

12시간도 안되서 다시 돌아왔던 인천공항... 계속 대한항공으로 다녔는데 나중엔 SM이 만든 비상구 탈출구 테마송(?)을 외워버렸다... (한 달 넘게 지났는데 안무도 기억난다.)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밤 열 시에 촬영한 사진. 여름 유럽이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을 벌어서 여행하는 느낌이랄까?
맛보고 싶던 납작 복숭아도 실컷 먹다오고
언니랑 같이 베를린 여행을 다녀왔는데 KLM 항공기 색깔이 예뻤다. 대한항공과 비슷하다며 갑자기 향수병에 빠진 언니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여행 도중엔 유럽 사는 언니가 마냥 부러웠다
사실 베를린은 7년 만에 다시 방문한 곳이었다. 너무 추운 겨울에 혼자 다녀온 기억이 있어서 메모리 재부팅(?)겸 따뜻하고 힙한 유럽의 대표 문화 수도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

물이든 공기든 침체된 환경에서는 탁해지고 심한 경우 썩기 마련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분명 마음 환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런 환기는 물리적인 벗어남을 통해 보다 더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꼭 해외여행이 아니어도 괜찮다. 당장의 환경을 벗어나 아주 멀리 가지 않더라도 '굳이' 집을 떠나서 '굳이' 그 동네에 유명하다는 맛집도 가보고 '굳이' 입장권을 구매하여 궁금했던 전시도 구경하고 '굳이' 한 조각에 2-3,000원 하는 엽서를 사다가 보고 싶던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그 모든 행위들은 우리에게 마음 환기의 기회를 주고 있다. 가까이서 보아야 예쁜 것도 사실이지만 멀리서 보아야 괜찮은 것도 사실이다. 마음 앓이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도 결국 한 발자국 (또는 지구 반 바퀴) 뒤에서 주시했을 때 걱정하던 일들이 별일 아닌 것 같다는 생각 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오늘도 우리들을 열심히 떠나고 있다.

엽서는 못 참는 나 1111
엽서는 못 참는 나222 고르다보면 욕심이 생긴다. 특히 장시간 비행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엽서로 마음 표현하는걸 좋아하는데 아무이 많이 사도 결국 부족하다. 더 많이 살 걸.

올여름 더 큰 "벗어남"을 앞두고 있다. 연구적 호기심을 안고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국 플로리다로 파견 연구를 떠나게 되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여행"으로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행자의 마음으로 건강하게 다녀오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일에 집중하며 실험도 실컷 하고 (어쩔 수 없는 대학원생의 실적 욕심...) 아직 미숙한 분석도 배워서 멋진 박사님으로 거듭나는 것도 이번 파견 연구의 목표 중 일부지만 마찬가지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일하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원 졸업 이후)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은 무엇인지,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등 나에게 어울리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과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응용공학동에서의 일상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좀 더 뼈저리게 느끼다 돌아오고 싶다. 그 에너지로 졸업까지 열심히 달려봐야지. 역시 귀찮지만 굳이 물리적으로 벗어나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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