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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Oct 21. 2023

내 미래는 어떡하지?

불안하지만 기대되고, 막연하지만 확신을 갖게 되는 교환 학기 속 자아성찰

정신없는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 교환 연구지인 플로리다 게인즈빌에 도착하면 혼자만의 달콤한 고독을 즐기며 인생 속 많은 고민들에 대한 답을 명쾌히 도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막연한 계획이지만 당장 이곳에서만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스스로에게 몰두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생각도 분명해지고 복잡한 마음이 한층 가라앉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리와 환경이 한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막대하다고 해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인생이란 내가 언제 어디에 누구랑 있든 수많은 변수와 마주해야 하는 현실 그 자체이며 상황이 복잡하더라도 굳건히 내 소신을 지키며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관들의 우선순위에 맞춰 지혜로운 선택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냥 순조로울 것을 기대했으나 조용하고 시골스러운 이곳에도 참 많은 변수가 등장하고 있다. 평화로운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동을 합성해 내는 것 자체가 나의 타고난(?) 성향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20대의 대부분을 보낸 나의 '컴포트 존 (comfort zone)'을 떠나보니 새로운 입력값들이 (input) 쉴 틈 없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그래도 날씨는 참 좋단 말이지. (최근 들어 심해진 일교차를 제외하면 말이다. 너무 여름옷만 챙겨 온 건 확실히 후회 중..)
이렇게 멋진 호수가 동네 조깅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다짐한 만큼 자주 뛰지는 못해서 아쉽지만 귀국 전까지 더 자주 뛰어야겠다!
개강 후 미식축구 시즌이라 응원팀(?) 리허설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젊음 그 차제였던 응원 단장의 모습들.

일상적으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으나 나름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브런치에 교환 일기 느낌으로 더 자주 글을 쓰고 싶었는데 충분한 시간을 찾지 못하고 있어 애석한 마음이다.) 출퇴근 생활은 한국 연구실과 꽤나 비슷하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실험 계획을 세우고, 세포 상태를 확인하고, 샘플을 만들고, 분석을 진행하고, 결과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해석하기 위해 부족한 지식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는 자원을 검색하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즉 '과학적 사고력'이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연구실 생활 속에는 수많은 변수가 등장하곤 한다. 인큐베이터 고장부터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사게 되었던 이메일 소통과 감기기운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 등 내가 미리 예측하여 대비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라는 점을 또 한 번 배우고 있다. 쳇바퀴 같은 일상생활이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크고 작게 등장하는 변수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매일을 고군분투하는 순간들. 그것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하고 고찰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순적이면서도 참 희한한 것이 나는 예상치 못한 변수 앞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계속해서 불확실성을 (uncertainty) 추구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열망하면서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최대한 많은 문을 열어두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소위 말하는 "박사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생각에 불안함이 느끼면서도 막연함을 받아들이고 반드시 궁금한 것은 다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졸업 후 "나와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도 많고, 나 역시 그 삶을 재밌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생긴 것 같다. (과연...) 확실하게 정의하고 미리 알 수 있는 정보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정보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일단은 졸업 후 다시 미국에 오자는 마음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남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내 꿈은 계속해서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 꽤나 극적인 변화(?)의 배경에는 '보스턴'이라는 도시가 존재한다. (이게 다 보스턴이 잘못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미국의 시골 생활이 힘겨웠던 나는 플로리다 게인즈빌에 도착한 직후 보스턴 여행 일정을 잡아두었다. 아직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친구들도 남아있고, 박사 후 연구원 (postdoc) 생활을 시작한 연구실 선배님들도 계시고, 비교적 최근에 보스턴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친구도 마침 시간이 되어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원래도 '장소'보다는 '사람'을 마주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편인 나에게 친구들과의 '회담'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핑계가 되었고 10월 초 가을 분위기가 만연한 보스턴에서 3박 4일이라는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Charles River (view from the  Cambridge side) (feat. 현재 내 폰 배경화면 사진)

플로리다 게인즈빌이 워낙 시골이라 보스턴까지 도착하는 길은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한 고귀한 가치를 한 번 더 인정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우선 친구 덕분에 무사히 그리고 안전하게 보스턴 시내를 곳곳이 구경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반가운 얼굴들 덕분에 유독 더 알찬 일정이 되었다. 박사 초년, 말년, 포닥 등 다양한 연구적 커리어 단계를 밟고 있는 친구들과 실컷 대화하고 공감하며 유대감을 쌓아 올리다 보니 보스턴이라는 도시 자체의 매력뿐만 아니라 나 역시 이곳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엇보다 '생물공학' 전공자인 나에게 보스턴은 유독 더 매력적인 도시였다. 찰스강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캠브릿지를 따라 걷다 보면 온갖 MIT 소속 랩들이 줄지어져 있는데 한 블록을 지나면 Broad Institute, 거기서 방향을 살짝 틀으면 Koch Institute, 다시 유턴해서 돌아 나오는 길에는 Pfizer, Moderna 등 'Big-pharma'라고 일컬어지는 대형 제약회사 건물들이 거대한 스케일로 캠브릿지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하버드 다리를 통해 찰스강을 건너 보스턴 쪽으로 넘어오면 드디어 시내다운 모습의 '다운타운 (downtown)'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동네도 작지만 임팩트 있게 위치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 시설을 지나 도시 남서쪽으로 이동하면 Boston University와 그 주변 수많은 병원 건물들이 하나의 중심지를 (hub) 이루고 있다. 그곳을 바라보며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곳에 오면 참 훌륭한 동료들과 풍부한 자원 그리고 기초 연구와 임상 연구를 연결하는 중개 연구가 (나름) 용이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6월에서 10월 사이 Bostonian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완벽한 날씨만을 보고 이 도시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친구들의 말에 겁이 나기도 했지만 바이오 전공자에게 보스턴은 감히 완벽에 가까운 곳처럼 보였다. (꽤나 크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미래의 나는 보스턴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Charles River (from the Boston side)
MIT 경영대 앞에서 찍은 찰스 강의 모습. 친한 친구들 죄다 보스턴으로 포닥 데려와서(?) 같이 연구하고 놀고 든든한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다는 망상을 했다. (나 꽤나 N일지도)
M.. I.. T..
최고의 호스트였던 박사 말년차 친구 덕분에 보스턴 로컬 카페에서 브런치 도장 깼다.
아쉬운 마음에 미국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draft beer를 두 잔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고생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메뉴판이 참 공대스럽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유독 보스턴에 대한 인상이 깊어서 이를 소화하는데만 열흘 정도가 소요된 것 같다. 5년 전 연구직과는 관련이 없는 스타트업 마케팅팀 인턴으로 미국 동부에 왔을 때 정말 짧은 일정으로 보스턴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도 교환 연구 중이던 친구들을 만나고 급하게 뉴욕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는데 당시에 내게 보스턴은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5년간 바이오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서 자아를 재정의한 나에게 이제야 눈에 띄는 그곳의 시설들과 자원 무엇보다 사람들이 정말 인상 깊었다. 게다가 석사 2년 차였던 2020년 김진애 박사님의 교내 강연에 참석했다가 우수 질문자로 선정이 되어 <왜 공부하는가> 책을 선물 받아 읽어보았는데 박사님이 MIT와 보스턴이 제공하는 교육 공간에 대해 설명하신 글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았다. "배움의 문화 양식"이 가득한 MIT라는 공간에서 열렬한 토론 문화와 지적 자극을 겪으며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느끼고 진심으로 기뻐했고 "생각하게 하는 힘, 공부하게 하는 힘, 행동하게 하는 힘이 되는 의문들을 선생을 통해 얻어내는 일"에서 큰 성취감을 느끼셨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나의 부족함이 많이 보이고, '번 아웃 (burn out)'이 오려나 싶은 순간에도 스스로는 충분히 '버닝 (burning)'하지 않았음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환경 변화와 새로운 자극들 덕분에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해진 것 같다. 앞으로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좌절감에 휩싸이는 대신 굳건한 자세로 지혜로운 선택을 추구해야겠지만 이를 위해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나날들이 나에게 남은 4개월 동안 가득하길 바라본다. 이번 글은 김진애 박사님이 정리한 "박사 역량"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고 싶은데

박사의 역량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지식 체계를 조감하는 역량, 다른 하나는 자신이 설정한 문제를 속속들이 푸는 역량이다. 지식 체계의 틀을 익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식의 양은 무한하게 커져도 지식 체계의 틀은 쉽게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제를 포착하는 역량을 익히면 연구할 주제가 자꾸 보이게 되며 호기심과 궁금증 때문에라도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박사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당장의 논문 성과 자체보다도, 공부하고 연구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성과를 소통하는 능력을 익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나도 좀 더 진득한 모습으로 호기심과 궁금증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싶다. 앞으로 어떤 변수가 나를 찾아와서 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지는 미리 예측할 수 없겠지만 내가 추구하고 싶은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에 대해서는 꾸준하게 더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언제쯤 떳떳하고 자신 있고 당당하게(!) 박사 "과정생"을 벗어나 박사 "님"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일교차가 심해지다 보니 유독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진로 고민도 훌륭하지만 언제나 나에게 친절함을 베풀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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