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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Nov 05. 2023

연구하는 사람들

집요하고 독하지만 성실하기도 순수하기도 한 그들

지난 주말은 살짝 우울했다. 이게 바로 향수병인가? 싶은 의문도 들었던 게 평소 먹고 나면 입이 짜고 속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찌갯국물까지 생각이 났다. 두부랑 버섯이 잔뜩 들어간 청국장이나 돼지고기 듬뿍 들어간 묵은지 김치찌개 같은 메뉴 말이다. 그리고 한국의 찰진 쌀밥도 문득 그리웠다. 길고 얇은 재스민 쌀 (Jasmine rice) 말고 짧고 뚱뚱한 한국씩 잡곡밥에 깨 송송 뿌려져 있는 제육볶음을 한가득 올려서 쌈 싸 먹고 싶어졌다. 출국 후 80일도 채 안 됐으면서 엄살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핸드폰에 D-day 카운트다운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였다. 100일 정도 남았구나, 100일!

오늘 기준 103일 남았다! 11월 여행 일정과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금방 줄어있을 것 같은 D-day 카운트다운.

다행히 이번주는 저번주보다는 잘 지낸 것 같다. 생산성을 (productivity) 중요시하는 대학원생으로서 나름 만족스러운 일주일을 보낸 것 같다. 물론 이렇다 저렇다는 데이터로 가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탄탄한 데이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포가 다시 잘 자라기 시작했고, 미루고 미루던 분석용 원시 코드를 (source code) 다시 들춰보기 시작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 조달될까 말까 하는 소중한 환자 샘플을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날려먹긴 했으나... (지도교수님 죄송합니다) 멘털을 부여잡고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심한 위로를 스스로에게 전달했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조향 브랜드 그랑핸드의 (GRANHAND) 문구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Sometimes you win, sometimes you learn.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생산성에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다. 그래서 당장 내 눈앞의 열매는 아닐지언정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즉 'move forward'의 과정을 굉장히 좋아한다. 이번주는 우울감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열심히 몰입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고 더 노력했다. 실험 계획과 분석 그리고 '미래 준비'에 열을 올렸는데 월요일에도 세상 출근하기 싫었지만 방에서 혼자 있는 것은 더욱 끔찍하다는 생각에 영차영차 연구실에 다녀왔다. 오전에는 논문도 읽고 오후에는 지난주에 배운 실험 결과를 분석하기 위해 이웃 랩에 다녀왔다. (포닥 친구들을 사귀었다는 그 옆 랩이 맞다.) 디스커션도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알듯 말 듯 아리송한 분석법에 머리가 아파왔지만 "이번에 여기까지 왔으니 다음에 혼자 할 땐 조금 더 쉬워지겠지"라는 사고방식으로 (mentality) 천천히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게다가 당장 함께하는 연구 프로젝트도 아닌데 이렇게 정성스럽게 시간을 할애해 주는 친구가 너무 고마워서 혼자 감동받고 마인드 컨트롤에 더 열정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귀국 전에 꼭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친구들이다. 어딜 가든 곳곳에 소중한 인연이 닿는다는 사실은 매일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는 포인트 중 하나인 것 같다.

무언가 새로 배운다는 건 큰 설렘임과 동시에 나의 부족함을 직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려나.

가끔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면 (매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아보기로 한다) 잠시나마 미국에 나와있는 동안 쉽게 할 수 있는 것들로 머리를 식히곤 한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더욱 알차게 보내고 싶은 욕심에 고민해 보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포닥 (postdoc) 연구실 탐색이다. 아주 본격적으로 연구 책임자들에게 (Principal Investigator, PI)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리 알아볼 요소들이 많은 만큼 연구실 탐색에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인터넷 검색으로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서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시간적 여유도 있고 무엇보다 시차가 없기 때문에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이야기가 잘 통한다 싶으면 (미래의 나를 제발 고용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통화나 화상회의가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인데 당장 제일가고 싶은 보스턴 역시 동부지역이라 시간이 갖고, 서부 지역 역시 16시간이 아닌 3시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일정관리에도 큰 부담이 없다.


이번주 역시 내가 하고 있는 연구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연구실 또는 지역별로 매력적인 연구 시설을 자랑하고 있는 랩은 어디인지, 또 그들은 어떤 학교, 연구소, 병원의 어느 학과 소속 구성원으로 연구실을 이끌어가고 있는 PI인지 알아보기 위해 구글링을 이어갔다. 그렇게 발견하게 된 미친 걸크러쉬의 소유자로서 엄청난 연구적 이력을 자랑하며 지난 9월부터 따끈따끈하게 연구실을 갓 꾸려가기 시작한 보스턴의 한 PI를 찾게 되었다. 실제로 연구 분야도 워낙 고급 기술을 다루고 있어서 곧바로 이해하기엔 큰 어려움이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그가 던지는 연구 질문은 (research question) 나를 설레게 했다. (심지어 관상학적으로도(?) 취향을 저격하는 그는 도대체...) 떨리는 마음에 잠깐 주저했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에게 내 이력서를 첨부한 메일을 보냈다. 여기 도착하고 일찍이 CV를 업데이트해 두었는데 과거의 내가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는 반나절만에 비디오 콜을 제안하며 답장을 주었고 이틀 후 점심시간에 30분 동안 줌으로 미팅을 잡게 되었다.


그는 똑똑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근 들어 (아니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마주한 사람들 중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똑 부러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똑똑함' 그 자체가 묻어나는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친절했다. (물론 친절하고 '나이스한' 과학자들도 많지만 우리 모두 '실력'과 '인성'은 '제로 섬  (zero sum)' 관계라고 인지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모든 질문에 대해 세 가지 포인트로 정리해서 답변하는 그의 논리 정연함과 어떤 연구 디스커션에서든 새로운 호기심을 발견해 내는, 그리고 그 지적 호기심으로부터 새로운 연구 질문을 던지는 그의 창의성과 추진력이 정말 돋보이는 짧고 굵은 미팅이었다. 그는 어떤 포닥을 뽑고 싶은지, 반대로 포닥 연구실을 찾을 때 어떤 요소를 살펴보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중 하나는 닮고 싶은 멘토가 연구실 PI 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라는 점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신을 얻기에는 30분도 충분했다. ) 다만 당장은 내가 그의 연구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직접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언제쯤 나 스스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날이 올까?)


금주 후반부의 실험에는 실수가 잦아 속상했지만 이번주 내내 주변 또는 잠재적 동료들과 연구적 디스커션을 이어가다 보니 긍정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대화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누누이 언급하지만 난 이야기 나누는 일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한 마디 한 마디를 덧붙이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향이다. 특정 주제에 대해서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그 속에서 새롭게 샘솟는 아이디어를 키워나가고 그다음을 계획하는 일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래서인지 '연구'라는 일을 하면서도 내가 가장 큰 재미와 보람을 느낄 때는 바로 누군가와 서로의 연구에 대해 소통하는 순간이다. 랩세미나 발표 차례가 오더라도 내용이나 데이터의 퀄리티 또는 전체적 흐름의 논리적 탄탄함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지만 발표 그 자체는 언제나 큰 기쁨이다. (그래서 포스터 발표든 구두 발표든 대학원생으로서 학회를 참석하는 일이 제일 재밌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번주 역시 실험 분석 그 자체든 짧지만 강렬했던 연구실 소개와 연구 주제 브레인스토밍이든 서로 알고 있는 지식을 공유하며 건설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기 위한 대화는 나에게 소중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두 번째는 내가 연구에 진심인 사람들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하며 나 역시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점이다. 나 또한 '연구'를 커리어로 선택한 대학원생으로서 이는 나르시시즘적 발언인 건가? 싶은 의문점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잘 되어간다는 가정 하에) 연구하는 내 모습을 좋아하는 것 같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실험에 지겨움도 지루함도 자주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정 연구 과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논리적 빈틈을 꼼꼼히 채우고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깊게 고민하는 일이 숭고하게 (noble)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비교적 선한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라고 아직까지는 생각하고 있다. 연구계 역시 살벌하게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잘 나가는' 연구자로 거듭날 수 있지만 유독 '과학'을 진로로 선택한 사람들만의 순수함이 엿보일 때가 있다. 당장의 달콤함 보다는 좀 더 진득하게 결과를 살펴보겠다는 마음가짐과 누가 뭐래도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자 하는 집념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절대 이쪽 분야에서 '야망'이 자리 잡을 곳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연구를 심지어 잘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맥락이나 환경 속에서도 질문을 던지고 말겠다는,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방법과 지능적 자원을 스스로 마련해 보겠다는 집요함이 돋보이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똑똑하다"는 형용사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다면적인 재능을 존경하고, 닮고 싶고 나도 그 능력치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연구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건강한 자극을 얻은 덕분에 마인드 컨트롤은 여전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내가 하는 일을 이어나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 같다. 말이나 글로보면 마인드컨트롤 진짜 잘하는 거 같은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찔리는 마음도 있지만 말이다... 벌써 2주 후면 게인즈빌에서 보낼 시간이 반 밖에 남지 않았다는 현실에 한국이 그리우면서도 귀국 후 지금이 얼마나 그리울까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이른 오전 연구실에 출근해서 퇴근 후 요가 수련을 마치고 오늘 저녁은 무엇을 해먹을지 고민하는 일상이 대학원 박사과정 말년차에게 얼마나 소중할까? 그러니 친구들이 가족들이 보고 싶더라도 지금을 더 즐겨야겠다고 다짐한다. 다음 주 다가오는 생일을 앞두고(!) 여러 금융 치료법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곳의 소중한 인연들과 하루하루를 아끼며 남은 11월도 알차게 지내봐야겠다.

핼로윈 기념 파티에 가는대신 룸메랑 제일 좋아하는 시트콤을 보며 저녁과 함께 딥톡. 그리고 자녀분과 Trick or Treat 에 다녀온 연구실 박사님께서 미국식 사탕을 챙겨주셨다
버스나 우버를 타고 힙겹게 또는 비싸게 장을 보러 가는대신 Instacart 라는 어플을 사용해서 먹거리를 배달 받는 중이다. 이번 주말 아침도 친구랑 영상통화하면서 아침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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