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빈소에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는 추모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유성호
존경받는 신경정신과 의사가 사망했다. 정확히는, 살해당했다. 한데 피의자는 다름 아닌 그가 맡았던 환자였다. 근 1년여 만에, 예약도 없이 담당의를 찾았다는 환자는 조울증이라 불리는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환자와 마주한 의사는 2018년 마지막 날, 마지막 방문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렸다.
피의자의 위협이 계속되는 순간에도 의사는 진료실 바깥 복도로 나가 "도망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속수무책이었을 간호사와 다른 의료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의사는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타인을 보호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범행 현장에 서 있었다는 피의자는 경찰에 순순히 체포됐다.
이상은 경찰이 CCTV 증거 등을 토대로 밝힌 임세원 교수의 사망 경위다. 2018년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담당의인 임세원 교수가 사망했다. 피의자인 서른살 박아무개씨는 경찰조사에서 범행 동기에 대해 횡설수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2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 같은 임 교수의 사망 소식에 지인들은 물론 의료계와 임 교수로부터 진료를 받았던 환자 들 모두 애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나 임 교수가 평소 우울증 환자들 치료에 매진했고, 지난 2016년 "우울증을 가장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가슴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소개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출간,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소명의식을 다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 같은 임 교수의 소명의식은 유족의 뜻에서도 잘 나타난다. 2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임 교수 여동생 임세희씨는 빈소가 마련된 서울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족의 자랑이었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 안전과,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밝혔다.
특히 임 교수가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출간한 사실과 관련,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낙인이 없는 의사조차 고통받을 수 있음을 알리면서 사랑했던 환자를 위해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라 생각한다"며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오빠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이 있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받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전했다.
충분히 안타깝고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대한의사협회도 임 교수의 사망 이튿날인 1일 '서울 모 병원 의사 피살사건 관련 대한의사협회 입장'을 통해 애도를 표했다. 한데 이 입장문 발표 직후, 한 인기 드라마 게시판이 몸살을 앓고 있다. 그 드라마는 바로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가 임 교수의 사망에 대해 책임의 일부를 추궁한 듯한 입장문 중 '두 번째' 내용에 등장한 JTBC < SKY 캐슬 >이다.
조금은 의아한 의협의 입장문
▲JTBC 금토 드라마 'SKY 캐슬' 한 장면. 정형외과 의사인 강준상(정준호 분)은 과거 수술 결과에 불만을 품은 환자가 흉기로 위협하자, 병원 이곳저곳으로 도망치다 결국 가스총으로 환자를 제압한다.ⓒ JTBC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갈등과 폭력을 흥미위주로 각색하거나 희화화하여 시청자로 하여금 의료기관 내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동조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방송 행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상류층의 자녀 교육을 주제로 한 한 드라마에서는 수술 결과에 불만을 품은 환자가 칼을 들고 의사의 뒤를 쫓는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방송한바 있다. 이번 사건은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의협이 지적한 한 드라마는 < SKY 캐슬 >이요, "수술 결과에 불만을 품은 환자가 칼을 들고 의사의 뒤를 쫓는 장면"은 지난달 8일 방송된 6화에 등장했다. 극중 정형외과 전문의인 강준상(정준호 분)은 자신에게 허리 수술을 받은 뒤 장애를 호소하며 병원에 나타나 협박을 일삼았던 환자와 다시 맞닥뜨렸다.
해당 방송분에서 강준상은 평소 칼을 들고 수차례 위협을 가했던 그 환자와 대치하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결국 가스총을 발사해 제압한다. 강준상의 심리와 행동 위주로 코믹하게 처리된 이 장면은 대학병원 내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수술 집도 횟수를 자랑하는 강준상의 위치와 그와 배치되는 권위적이면서 소심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 이에 대해 의협은 이렇게 해석했다.
"피의자가 이 방송을 보고 모방한 것이 아니더라도 방송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료진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하거나 진료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써서 항의해도 된다는 식의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송 행태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진료 결과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면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선정적인 기사를 내보내 의사와 의료기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부추기는 언론의 행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장의 맥락이 좀 이상하다. "피의자가 이 방송을 보고 모방한 것이 아니더라도"라는 전제를 단 의협은 "의료진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하거나 진료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써서 항의해도 된다는 식의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 SKY 캐슬 >과 같은 묘사는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기본적인 팩트 체크 없이 "선정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언론의 행태"도 꼬집었다.
하지만 < SKY 캐슬 >이 정말 그렇게 묘사했을까. 드라마 속 강준상은 속물근성이 다분한 의사로 묘사됐다. 수술 집도 수는 압도적이지만, 환자보다는 자신의 권위와 권력욕만 부리는 의사다. 준상은 환자에게 "수술 후 부작용을 설명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집도한 환자의 수술 후 부작용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주장하며, 장애의 책임을 호소하는 환자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따돌리는 의사다.
< SKY 캐슬 > 속 설정만 보면, 준상은 환자의 거듭된 장애와 고통 호소를 무시해 왔고, 그런 철저하고 의도된 무관심이 환자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든 것으로 묘사됐다. 드라마이니만큼, 조금 과장돼 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 속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설정이요, 묘사 역시 크게 과하거나 선정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다만, 관계자들이나 같은 피해를 겪은 환자나 환자 가족들이 보기에 경우에 따라 거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일 수 있다. 또한 폭언이나 욕설 등 폭력을 옹호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의협도 일찍이 이 부분을 지적했다.
<SKY캐슬>의 해당 장면과 관련해 의협이 지난 11일 JTBC에 보낸 공문을 보자. 의협은 "귀 방송사에서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 SKY 캐슬 > 5, 6화에서는 환자가 칼을 들고 의사를 위협하여 가스총으로 제압하는 등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폭력장면들이 여과 없이 방영된 바 있습니다"며 "또한 드라마 전반에서 의사직업에 대해 폄하하거나, 부정적이며 왜곡된 묘사도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다.
의료 환경에서 빚어지는 의료진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은 당연히 근절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근절" 운운한 의협의 빠른 항의는 의사직업에 대한 드라마의 극적이고 보기에 따라 부정적인 묘사와 결부돼 있는 모양새다. 이러한 의협의 이른 항의는 임 교수 사망 이후 뒤늦게 엉뚱한 방향으로 옮겨 붙는 모양새다. 바로 '모방범죄' 논란 말이다.
'모방범죄' 부추긴 의협이 돌아볼 일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빈소에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는 추모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유성호
"그러니까 8일에 그런 드라마가 방영됐다고 보이고요. 거기서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칼을 들고 의사를 위협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약간 희화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 이런 부분은 매스컴이라는 걸 통해서 암시 효과가 크거든요. 진짜 말하자면 드라마에서 이런 걸 하게 되면 은연 중에 이런 걸 해도 된다? 이런 암시가 탁.
특히 정상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탁 암시가 행동적으로 암시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의사협회에서 굉장히 항의공문을 발송했고 위험하다, 이런 건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끝내 이런 일이 생기니까 더더욱 의사협회라든가 국민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거죠."
2일 KBS1라디오 <오태훈의 시사본부>에 출연한 프로파일러 오상훈씨는 위와 같이 주장했다. 오씨는 "칼을 들어서 의사를 위협하는 행위가 딱 보이면 저게 저래도 되는구나라고,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그냥 이게 모범이 되는 겁니다"며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문제가 될 수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요컨대,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드라마 속 폭력 묘사가 '모방'의 "모범"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모방범죄' 이론을 반영하듯, 2일까지 < SKY 캐슬 > 시청자 게시판은 모방범죄는 물론 제작진 책임까지 거론하는 100여개의 게시글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다.
화제 속에 방영되는 드라마 속 장면이 실제 사건과 시기 상 '오비이락' 식으로 맞아떨어졌다고 해서, 비난의 화살을 그 방향을 돌리는 것이 온당할까. 그렇다면,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필두로 오씨와 같이 프로파일러가 종종 출연하는 범죄나 사건사고를 다루는 탐사보도나 시사교양 프로그램과 그 내용 속 재연 장면은 어떠한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의 맨얼굴이 재연되고, 범죄의 상세 과정이 '모범'적으로 묘사되지 않던가.
서사나 재연 프로그램을 비교하자는 뜻이 아니다. '모방범죄'론의 실효성을 돌이켜 보자는 얘기다. 강력 범죄 혹은 대중이 분노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영화를, 드라마를 희생양 삼거나 가해자의 심리적 요인 중 하나로 지목하는 일이 지치지도 않고 반복된다. 안타까운 사건과 피해자 앞에 그 책임 소재를 돌리기 위해 혹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건의 연원이나 비난의 화살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그 보다는 피의자의 실질적인 범행 동기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나 범행이 벌어지고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던 환경적·구조적 요인을 살피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게 급선무 아닐까. 그것이 또 다른 범죄를 막기 위해서라도 만만한 대중문화를 때리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일 아닐까. 이번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관련 법안에 대해 돌아보고 미비점을 어떻게 재정비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의협의 입장문도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앞선 입장문 첫 번째 내용에서 의협은 임 교수 사건이 "예고된 비극"이라고 진단 한 뒤 아래와 같이 호소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목이다.
"의료현장에서 분명한 폭행의 의도를 가진 사람의 접근에 대해서 의료진은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절대 개인의 힘으로 예방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료계는 그동안 정부와 정치권을 향하여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의료진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여 왔으나 번번이 좌절되어 왔다."
안타까운 임 교수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임 교수의 사망은 최근 국회에서 응급의료 종사자에 대한 폭행 처벌을 강화하는 일명 '응급의료법' 법안이 통과된 직후 벌어진 참극이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응급실 등 주취 환자에 의한 폭력의 경우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 의료진을 향한 '묻지마' 폭행이나 막무가내 폭언 등은 근절돼야 마땅하다.
"정치권이 의료진에 대한 폭력사건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의협의 목소리는 정부여당과 국회에 확실히 전달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치권의 '응답'은 물론이고. 더불어 의료계 스스로도 응급의료법 외에 향후 강제진단 법 등을 포함, 환자가 의료기관 내에서 일으킬 수 있는 사건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지책이나 자구책 마련을 위해 정치권과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임 교수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임 교수 사건처럼, 신경정신과 환자의 이례적인 사건 하나를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롯된 일반적인 '모방범죄'로 '또' 한 번 몰아가거나 의료진에 대한 폭력 장면을 무조건 '근절'돼야 할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분명 섣불러 보인다. 피의자 박씨의 검경의 수사결과가 더 나와 봐야겠지만, 그리고 의협의 주장대로 이번 사건이 피의자의 정신질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더더욱 피의자의 상태나 상황에 앞서 유명 드라마를 희생양 삼아 '모방범죄' 쪽으로 몰고 가는 언론 플레이는 결코 생산적일 수 없다. 그보다는 아래 의협의 입장문 대로 정신질환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경고하는 식의 입장이, 이미 일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의 강력 범죄로 인해 커져버린 그 편견을 약화시키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 아니겠는가.
"이번 사건이 정신질환자에 대한 막연한 오해나 사회적 편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사건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적절하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의 공격성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정신질환자의 의료 이용의 문턱이 더 낮아져야 하며 정신질환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를 어렵게 하는 사회적 인식과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이 매우 시급하다고 본다. 하지만, 오히려 섣부른 언론의 추측성 보도나 소셜미디어 상의 잘못된 정보의 무분별한 공유가 대중의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부추길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2일 의료계는 유족의 뜻에 따라 '임세원법'을 만들기로 했다. 위급한 상황에 의료진이 대피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중단 없이 치료받을 수 있게 관리를 강화하는 방안과 자살예방 교육 활성화 방안도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임세원 교수의 안타까운 사망이 불러온 '사후약방문'이지만, 고인의 뜻이 제대로 담기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