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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Jan 10. 2019

이현세의 '외인구단' 출발시킨 1980년 봄, 전두환

유튜브 <만화대잔치> 인터뷰 속 만화가 이현세가 준 감흥


▲2016년 10월 27일 오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2016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대통령표창을 받는 만화가 이현세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민


"젊었을 때는 다 즐겁게 사는 것이 목표고요. 또 장년기에는 일을 성공하는 게 목표죠. 그런데 나무도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야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생도 60이 넘으면 사회를 위해서 열매를 맺어줄 나이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내 목표가 있다 하면 아까 얘기한 그대로 내가 있기 때문에 주변의 여러분들이 좀 더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내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그 목표죠."
 
지난 1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인터뷰는 실로 감동적이었다. 올해로 100세를 맞은 김 교수의 인터뷰는 곡절마다 '현자'의 혜안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시인 윤동주, 소설가 황순원과 함께 수학하고, 동향이던 김일성의 집에 초대도 받았다던 이 한국현대사의 산증인은 "더 늙고 싶지 않다"는 소감과 함께 돈보다 일을 더 사랑하는 것을 건강의 비결로 꼽고 있었다.
 
2019년 새해 처음 읽(고 들)은 인터뷰 기사는 실로 감동적이었다. 김형석 교수의 경우는 철학이지만, 이렇게 한 분야에서 평생을 몸바친 장인 혹은 거장들의 혜안과 이력을 엿보는 일은 언제나 쾌감과 경이를 동반한다. 올해 두 번째로 접한 인터뷰 내용이 그랬다. 최근 만화가 이현세의 인터뷰를 단숨에 들었더랬다.



작년 12월 11일과 12일 양일에 걸쳐 유튜브, 팟캐스트 채널 <만화대잔치>에 공개된 이 '전설인터뷰' 이현세 편은 2시간이 넘는 분량을 자랑하지만 그 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기에 충분히 '가치'있고 '재미'까지 품은 인터뷰였다. 왜냐고?
 
1980, 90년대를 풍미한 이 거장(아마도 한국 만화계에 이러한 수식을 듣는 첫 번째 만화가가 바로 이현세이리라)이 들려주는 인생과 작품 이야기는 분명 자신의 분야와 장르에서 일가를 이룬 이만이 전해줄 수 있는 경험과 교훈이 녹아 있었다.
 
특히나 '설까치'와 '오혜성', '엄지'와 함께 10대와 20대를 보냈던 지금의 40대 이상 세대나 <만화 삼국지>나 <그리스 로마 신화> 단행본으로 '이현세 할아버지'를 만난 지금의 10대, 20대에게 이현세라는 이름은 분명 호기심을 자극하는 만화가 그 이상일 터.
 
70대가 되면 이루고픈 목표부터 과거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한 작품 비화, 라이벌 허영만 선생과의 비교 등.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이 거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는 그의 전성기 시절 만화들을 기억하는 이라면 분명 시대상과 대중문화가 교차하는 흥미진진한 경험담과 만화와 사람이 보이는 사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현세가 육성으로 전하는 천재와 싸워 이기는 법
   

▲팟캐스트, 유튜브 채널 <만화대잔치>와 '전설 인터뷰'를 진행한 만화가 이현세.ⓒ 웹툰협회

   
"천재와 싸워 이기는 법? 그에 대해선 만화계 들어와서가 아니라 초등학교 때 만난 친구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만난 그 (천재) 친구가 다행히 나와 다른 중학교를 갔어요. 나는 인문계로 갔고, 그 친구는 상고로 진학을 했고. 그 친구가 없으니까 살 것 같고, 다시 그림을 그려도 되겠더라고. 천재를 만나면, 정면으로 대결하지 말고 잠시 피해버려라. 우리 인생은 마라톤처럼 장거리니까. 그리고 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 됩니다."
 
이현세의 '천재와 싸워 이기는 방법'은 그가 과거 인터뷰 상에서 털어놨던 경험담을 일반인들이 블로그 글로, 동영상으로 옮겨 두고두고 회자됐던 일종의 잠언이라 할 수 있다. <만화대잔치> 속 인터뷰에서 이현세가 실제 육성으로 들려주는 이 '현답'에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보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재 아마데우스의 입장이 아닌 그 천재들의 재능을 시기하며 쫓아가야 하는 살리에르의 시각에 더 감응하기 마련이니까.
 
또 이현세가 스스로 만화가 중 '1등'으로 꼽은 "형만이 형" 허영만(허형만이 그의 본명이다)과의 비교 역시 둘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미소를 짓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대가들의 경쟁 구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 미묘한 듯 확연한 차이 말이다. 이현세에 따르면, 본인이 신인일 때 이미 "형만이형은 <각시탈>을 그린 대가"였다. 하지만 그림체만큼이나, 두 사람의 성격, 세계관 차이도 확실했다.
 
"어떻게 보면, 형만이 형이 진정한 승리자 아니겠어요. 오십 후반, 육십이 돼서 <비트>, <타짜>, <식객>으로 최고 정상에 올라갔으니까. 저는 <외인구단>으로 정상에 올랐을 때가 나이 서른이 안 됐어요. 그때 저는 그 자리가 뭔지, 어떤 의미인지, 내 삶의 정점인지도 전혀 모르고 살았거든요."
 
어디 그 뿐이랴. 이현세는 자신이 "만화가 (삶의) 전부", "만화가 사는 이유"라면, 허영만은 "만화가 삶의 청량제 같은", 자신의 재능과 만화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작업 스타일도 무척 달랐다. 허영만이 새벽에 출근, 점심 전에 그 날 일을 끝내고 오후 시간을 즐긴다면, 이현세는 점심쯤에 작업실에 나와 밤늦게야 일을 끝내고, 소주 마시러 가서는 새벽에 귀가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둘이 스타일도 되게 달라요. 형만이 형은 바나 재즈바, 그리고 칵테일 이런 델 좋아하고, 나는 '두주불사'. 소주 집을 좋아하고. 형만이 형은 세련되게 술을 먹다가도, 키핑! 자기 이름 탁 적어 놓고(가고). 난 (술병을)깠다하면 일단 내일은 내일이고. 그런 스타일이니까 일정 관리도 형만이 형이 무지 잘해요."
 
과거 평론가들이 그래서 자연스레 라이벌 구도를 붙였을 게다. 이현세에 따르면, 본인은 극단적 영웅성을 추구하는 반면 허영만은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고향도 허영만은 전남 순천, 본인은 경북 경주다. 이현세는 그래서 허영만이 "서로 만날 수가 없"는, "영역이 다른데다가 성향도 다른" 스타일이라 더 신경이 쓰이는 '라이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현세가 극복할 없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허영만의 천재성은 바로 드로잉 능력이었다고. 자료가 많지 않아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시절, 동물 드로잉과 같이 사물이나 사람, 동물을 관찰하고 기억해서 다시 그림으로 재생해내는 능력은 허영만을 따라 갈 만화가가 없었다고.
 
이러한 건강한 라이벌 관계야말로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인생에 있어 이현세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줬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피해버릴 수밖에 없는 '천재'라 할지라도 생에 있어 한 번쯤은 만날 가치가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현세와 허영만과 같은 건강한 관계를 북돋을 수 있는 관계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현세도 얻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영상화'와 관련된 '불운'이었다.
 
파란만장한 삶, 드라마틱 1980년대
   

▲팟캐스트, 유튜브 채널 <만화대잔치>와 '전설 인터뷰'를 진행한 만화가 이현세.ⓒ 웹툰협회

   
"크레파스는 아버지가 제게 준 선물이었고, 고등어는 아버지가 제게 준 회초리였어요."  

1995년 KBS <인간극장>으로 소개된 '고등어와 크레파스'편에서 이현세는 숨기고 싶던 어린 시절의 아픔을 만천하에 공개한 바 있다. 한국전쟁 이후 아픈 가족사로 인해 큰집에 양자로 보내졌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청년 시절 자괴감으로 반항하다 결국 만화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훗날 중학교 교과서에 수필 자료로 실리기도 했다.
 
그 사연 속에 등장하는 연좌제와 청년시절의 방황, 색약 판정과 미대 입시 포기, '흑백'의 세계와 만화계로의 입문 등 이현세의 청년시절은 그 자체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드라마틱'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만화대잔치> 인터뷰에서 이현세는 그러한 청년기 인생 역정과 함께 만화로 발표하기 전 둘째딸의 이름을 '엄지'로 지었다거나 친동생이지만 사촌동생으로 알려졌던 만화가 이상세 작가가 자신의 그늘에 가려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는 사연, 본인이 최고작으로 꼽은 <국경의 갈가마귀>가 실제 친할머니의 사연을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 등 작품과 관련된 인생사를 줄줄이 이야기 했다. 그런 이현세에게도 아킬레스 건이 있었으니, 바로 만화 원작의 영상화였다.
 
"솔직히 얘기해도 되죠? (만족스러운 작품이) 단 한편도 없어요(웃음). 드라마 <폴리스>는 초반이 좋았어요. 이병헌도 나왔고. 근데 중간 4회 정도 돼서 담당 PD가 야외촬영이 감당이 안 되니까 도망을 가버렸어. 나머지 PD 두 명이 한 편씩 번갈아 가면서 찍은 건데, 그러니까 드라마 자체가 뒤에 가서 희한해 졌지. 내가 만든 <아마겟돈>도 그렇고 영상 쪽은 재앙이었어. 벌 받은 건가(웃음)."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 속 최재성.ⓒ 판시네마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유독 이현세 원작의 '영상화'는 흡족한 작품이 없었단다. 더군다나 본인이 제작에 직접 관여했고, 이병헌이 목소리 연기를 자청했던 애니메이션 <아마겟돈>까지도 '재앙'과 같은 평가와 흥행을 경험했으니, 오죽했을까. 이후 직접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던 이현세에게 있어 <타짜>나 <비트>와 같은 걸출한 작품의 원작자로 자리매김한 허영만 작가는 또 한 번의 '질투'를 안기지 않았을까.
 
물론 이러한 '원작자'로서의 명성을 처음 누린 것 역시 이현세가 먼저였다. 1980년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원작이었던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오혜성'을 연기한 '신인' 최재성을 당대의 스타로 만들고, 주제곡 '난 너에게' 열풍을 일으키며 요즘말로 '대세 영화', '천만각'에 등극한 바 있다. 하지만 이 흥행 영화 역시 이현세의 눈에 차지 않았단다. 당시 이장호 감독에게 100점 만점에 30점을 줄 정도였다니까. 흡족했던 최재성의 연기와 달리 야구 장면이 문제였다.
 
"이장호 감독이 야구를 몰랐어. 어느 정도냐면, 해태 선수들하고 같이 훈련을 해서 영화를 찍었는데, 배우들을 6개월 트레이닝 시켜서 프로의 자세가 나올 수 없는 거잖나. 근데 이장호 감독이 야구의 기본을 아예 모르고, 야구 장면 찍을 땐 벤치에서 자고 딴 짓을 했단 말이야.

특수 촬영도 없는데다 배우들도 야구 기본기가 없으니 카메라가 전부 로우 앵글(앙각)이야. 조상구의 너클볼은 꼭 제대로 찍고 싶었는데, 애니메이션 하나 찍는데 그 당시 2천만 원을 달라고 하더라고. 배우들 개런티가 다 해서 8천인가 그랬던 시절인데."

원작료로 그 당시 받은 500만 원을 그날로 이장호 감독과의 술자리 자금으로 탕진해 버렸다는 기분파 이현세 작가. 그는 그렇게 당시 고향 선후배든, 친했던 배우든 연으로 얽힌 이들과 만화의 영상화 작업을 했지만, 지금껏 흡족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는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또 하나, 이현세가 <공포의 외인구단>을 작업하게 된 사연 역시 시대와 조응한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외인구단'은 전두환 대통령하고, 1980년 쿠데타, 국보위랑 연관이 있어요. 당시 국보위가 한 가장 큰 행사가 삼청교육대였는데, 모든 일이 그렇듯, 밤거리가 조용해지니 국민들 반응은 나쁘지 않았어요. 그 다음에 (국보위가) 국민들이 좋아할 걸로 예상한 게, 만화가 애들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얘기였거든. 조사해 보니까, 만화로 밥 벌어 먹는 사람들이 당시 30만이 넘었다는 거지. 그래서 '이건 좀 부담 되겠는데? 작가들 좀 어떻게 해 봐!' 그렇게 된 거지.

1980년 봄, 지금은 애니메이션 센터 건물이 당시 안기부 건물이었다고. 대한민국 만화가들이 거기 다 모였어요.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자정결의를 했어. 되게 웃기지(웃음). '1. 우리는 불량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1. 우리는 미풍약속에 저해되는 만화를 그리지 않겠다 1 우리는 공권력을 부당하게 표현하는 만화를 그리지 않겠다'. 이런 게 한 20가지가 돼. 거길 내려오는데 정말 슬프더라고. 이러다 만화가 다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감마저 들고."
 
유신체제와 신군부로 권력이 이행되던 시기에도, 만화는 여전히 '불량', '퇴폐'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이현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만화는 아동에 준한다는 대통령령의 심의기준에 제약을 받았다. 성인물에 속하는 고우영 선생의 만화 속 묘사도 신문연재였기에 신문윤리 기준을 적용받아 가능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만화가 이현세에게는 절망으로 다가왔을 터. 그때 떠올린 것이 1980년 막 출범한 프로야구였다고.
 
"단행본을 못 내니까, 남녀노소에게 읽히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각성이 됐다고. 남녀노소가 다 읽되 심의를 피할 수 있는 게 뭘까 작가마다 노력을 했고. 난 프로야구도 출범됐으니, 야구로 가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다 싶었다고. 남녀 얘기도, 연봉 얘기도, 권모술수 얘기까지 모두.

또 당시 삼미슈퍼스타즈가 도깨비 구단, 외인구단으로 불렸는데, 마지막 구단이라 완전 오합지졸이었다고. 인천 연고였는데 광주에서 2명, 경북에서 2명, 그런 식으로. 그때 '너구리' 장명부가 일본에서 왔었다고. 늦게 시작했으니까 일본 프로구단에서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권리를 준 거지. 장명부 선수가 굉장히 잘 던졌고, 삼미가 무조건 이겼어. 근데 무지 혹사를 당해서는 나중에 어깨가 망가지고, 일본 북해도 어디서 죽었다고 하더라고. 그게 소재가 된 거지."
 
이현세, 70대 목표를 앞당기다
   

▲팟캐스트, 유튜브 채널 <만화대잔치>와 '전설 인터뷰'를 진행한 만화가 이현세.ⓒ 웹툰협회

   
"약간 화려했고, 약간 거만했고, 약간 오만하기도 했고, 즐겁기도 했고. 그렇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앞서가면서 받았던 것들에 대해 '왜 나만?', '왜?' 그래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걷는 게 길이 되고 그랬으니까."
 
스타 만화가로서의 삶을 이현세 작가는 이렇게 자평했다. 지금도 자신이 출연한 맥주 광고를 뚜렷이 기억한다는 이현세. 아마도 그는 한국 만화계를 통틀어 만화가 개인이 스타성을 인정받은 유일무이한 인물일 것이다(MBC 예능 <나혼자 산다>로 매주 시청자들을 만나는 '기안84'는 아예 다른 경우이니 제외하도록 하자).
 
그런 과거의 유명세와 달리, 이현세는 자신의 위치나 세간의 평가를 부풀리거나 과하게 겸손해하지 않고, 되도록 정확하게 자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과 달리 웹툰의 시대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의 시대로 변한 지금, 만화가 이현세의 향후 목표는 무엇일까. 이현세는 70대 목표를 조금 앞당기게 됐다며 이렇게 밝혔다.
 
"70대부터는 뭘 할까. 지난 9월부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화실을 해체했거든요. 지루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차에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우리나라의 정령을 다 살려봐야겠다! 적어도 문화콘텐츠 면에서 우리는 고유의 귀신이나 정령을 잃어버린 나라거든. 그게 어른 동화나 어린이 동화와도 연관이 되고. 민담까지 총망라해서.

그걸 잃어버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예요. 일제 36년 간 총독부가 일본의 정신을 심어야 식민지로 통일이 되니까. 성황당 같은 곳을 미개한 짓이라고 다 없앤 거지. 자기네들 신사는 지속시켰으면서. 또 이후에 이승만 박사가 집권하면서 불행해져. 미국에서 선교사의 힘을 안고 들어왔으니 예수 외에는 전부 잡귀신이라고 전부 박살을 냈다고. 빅정희 대통령도 일본 육사에서 교육을 받았으니까, 오로지 미신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만 했고."
 
이현세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또 하나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거친 이 노작가는 그렇게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상 중이었다. 그리고 <만화대잔치>의 진행자는 다음 생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만화가로 태어난다면, 지금과 똑같이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삶과 전혀 성공 보장이 없는 삶 중 어떤 쪽을 택하겠느냐고. 영원한 '청년' 이현세의 답은 어쩌면 이미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돈보다 일을 더 사랑하는 것을 건강의 비결"로 꼽은 김형석 교수와 비교한다면, 만화가 이현세는 실제로 아직 '청년' 아니겠는가. 
 
"새로운 삶을 선택할 거다. 이미 전력질주를 해서 풀코스를 뛰었기 때문에, 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다시 뛴 다면 두 번 살진 않겠어요. 지루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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