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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May 22. 2021

사적 복수 다룬 '모범택시'... 쾌감과 위로 사이

<모범택시>를 흥미롭게 시청하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사적복수에 자경단을 소재로 한 하드보일드 액션 장르의 출현이 반갑기도 했거니와 동명의 원작 웹툰에서 주요 설정만 가져온 뒤 실제 사건들에서 에피소드별 소재를 취한 것도 나름 의욕적이라 평가할 만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의 일부 세트나 미술, 음악을 따왔다. 영화에서 여러 차례 묘사된 자경단 집단의 성격을 참고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한국화의 일환으로 봐 줄 수 있다. 사적복수의 주체들이 모두 범죄 피해자라는 설정 또한 피해자의 시선에서 범죄의 이면을 돌아보게 만드는 주제적 측면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 SBS 드라마 <모범택시> 관련 이미지. ⓒ SBS


관건은 <모범택시>가 끌어온 실제 사건들의 재현 방식이다. 6화부터 등장한 웹하드 업체와 디지털 성폭력 관련 에피소드들부터 살짝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모범택시>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인 백현진이 연기한 웹하드 업체 유데이터 박양진 회장과 그의 범죄 행각을  조금만 뉴스를 따라잡은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알 법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했다. 


의아한 것은 6화 초반이었다. <모범택시>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직원들 앞에서 '약을 빤' 듯 연설을 이어가는 사무실 장면을 거의 베낀 듯 가져왔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따온 드라마가 역시나 월스트리트 사상 희대의 주가조작 범죄자로 손꼽히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극화한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뒤섞어 버린 것이다.


웹툰에서 출발한 드라마가 조두순 사건을 비롯해 한국사회의 실제 강력 범죄를 소재로 삼고 그 사이에 유명 레퍼런스들의 명장면이나 전반적인 톤이나 특정 형식을 재전유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리에 방영 중인 <모범택시>가 그러한 재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회 고발과 사적 복수 


<모범택시> 박준우 감독의 전작은 역시 SBS에서 방영된 <닥터탐정>(2019)이었다. 역시나 직업환경의학전문의라는 남다른 직업의 주인공을 내세운 <닥터탐정>은 가상의 '미확진질환센터(UDC)' 구성원(실제로는 근로복지공단 산하 직업환경연구원 등에서 자문을 받았다고 함)들을 내세워 산업 재해, 인위적 환경 재해, 직업병 등의 진실을 파헤치고 피해자들을 어루만지는 추리와 수사극을 동반한 사회고발 드라마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박준우 감독은 <그것이 알고싶다> 등 시사교양 PD에서 드라마 PD로 영역을 옮긴 걸로 유명했다. 그래서일까. 소재 선택부터 남달랐던 <닥터탐정>은 고 김용균씨 사건이나 이한빛 PD 사망 사건 등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산업재해(이자 사회적 타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에피소드별로 추적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구성을 취했다. 


게다가 매 에피소드가 끝난 뒤엔 실제 사건과 피해자들을 적시하는 다큐 형식의 에필로그를 덧대기까지 했다. 드라마가 어떤 사건에서 에피소드를 취했는지를 시청자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고 사회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개별 에피소드 외에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출신 여성 주인공의 가족사가 연속 드라마 형식으로 이어졌는데 꽤나 도발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었다. <닥터탐정>의 작가가 과거 대한민국 의료계의 어두운 현실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2011)을 만든 산업의학과 전문의 출신이라고 해도 분명 의외의 형식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 <모범택시>는 사회고발 드라마라기보다 장르 활극에 훨씬 가깝다. 주제는 감독의 전작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주인공 김도기(이제훈)의 액션과 범죄자를 처단하기까지의 과정에 방점을 찍었고, 중간 중간 유머를 강화시켰다. 


쉬이 해결하기 힘든 사회 구조적 모순과 그에 기생한 동조자들이 발생시킨 사회적 타살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전작에 비해 <모범택시>는 자경단의 사적 복수의 과정에 천착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일종의 쾌감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열혈 검사' 강하나(이솜)가 사적 복수자들을 견제하고 반목하는 일종의 제도권으로서의 완충 역할을 담당하지만 드라마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사적 복수'를 둘러싼 쾌감과 윤리적 갈등 혹은 한계 그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사적 복수를 행하는 주인공들의 내적 갈등 사이에서 이제는 흔한 명제가 되어 버린 니체의 '괴물론'을 가져온 듯한 <모범택시>는 한편으로 실제 사건과 장르적 재미 사이를 부단히 오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장르적 재미를 실현시키기 위한 동력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   


쾌감과 숙고 사이  


악인들의 감옥은 어쩔 수 없이 <올드보이>의 감금방을 연상시킨다. 감금방이 등장할 때 종종 쓰이는 클래식은 역시나 '박찬욱 영화'에 흐르던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다. 우연찮게도 <복수는 나의 것>에 영향을 받은 세트도 반가움을 더한다. 


실화를 연상시키는 사건과 <모범택시>만의 캐릭터들 사이를 채우는 것은 이렇게 친숙한 작품들에서 가져온 듯한 장면이다. 때로 그것은 적극적인 패러디가 되고(영화 <신세계>나 <화양연화>, <첨밀밀>, <영웅본색> 등), 때로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나 <다크 나이트>와 같이 존경 어린 오마주의 형식을 띤다. 


여기까진 <모범택시>의 장르적 특성을 즐기는 시청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여지가 크다. 더 직접적인 방식은 폭력의 재현이다. <모범택시>는 사적 복수라는 테마를 유지하고 극적인 서사를 이어가기 위해 등장하는 폭력의 재현을 적극적으로 배치한다.  


심지어 13화는 1인칭 액션으로 유명해진, 영화 <악녀>와 <경이로운 복수>가 이미 참고한 러시아 영화 <하드코어 헨리>의 아이디어를 암전 효과와 연결시켜 폭력을 전시한다. 이런 폭력의 전시가 사적 복수에 해당하는 것만도 아니다. <모범택시>는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범죄자들에게 당하는 폭력 역시 고통스러울 정도로 전시하고 직시한다.    


그런 전시가 과연 범죄의 악행을 직시하는 한편 피해자들의 고통에 시청자들을 동참시키려는 배려 혹은 고민의 산물인지는 심히 의문이다. 사적 복수라는 테마 자체에 감정이입을 독려하기 위해, 캐릭터들의 행동에 명분을 주기 위해 폭력의 전시라는 쉬운 방법을 동력 삼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와 함께 <모범택시>는 검경으로 대변되는 공권력의 무기력함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자체로 시청자들이 혹은 범죄 피해자들이 느끼는 공분을 자극하면서도 사적 복수의 명암을 대조시키는 효과를 노린 설정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을 동반한, 자신을 갉아 먹고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적 복수가 과연 정당한지 묻는 <모범택시>는 분명 사회고발 메시지를 탑재한 흥미로운 장르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주제에 다다르는 굽이굽이가 정말 드라마가 가리키는 방향과 부합하는지, 주제와 표현 사이에서 조금은 이율배반이라 여길 구석은 없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모범택시>라는 드라마가 재현하고 추구하는 쾌감과 그 반대편에 선 숙고의 무게가 과연 동일한지도. 그 무게는 결코 매회 마지막에 범죄에 대한 경고 등 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환기시키는 자막을 삽입하는 것으로 다 채워질 수 없는 법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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