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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May 24. 2021

한미정상회담 날 찾은 노무현 서거 12주기 전시회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본 미래... '2021 사람사는 세상전'


▲  "2021 사람사는 세상전" 전시 작품 중 이구영 작가의 "친구 문재인, 친구 노무현". ⓒ 노무현재단

 

"대통령은 바뀌었고 미국을 한 번도 안 가 본 대통령이고, 그런데 전쟁은 난다 하고 이런 저런 상황이었다. (중략) 미국에서 큰일 났다 사람들은 노무현 길들이기 프로그램에 들어 있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천지도 없이 겁 없는 대통령이 된 모양인데, 맛 좀 보여야지 이래 가지고, 그래서 한·미관계가 나빠진다, 나빠진다 계속 신호 보내가지고 노무현 기 좀 꺾어라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이 그때의 상황이었습니다." (2006년 12월 노무현 전 대통령,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연설 중)


실제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미동맹'은 보수가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임기 전부터 그런 의구심을 안고 출발했다. 보수언론은 노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자주‧균형 외교'를 강조하며 "사진 찍으러 미국 가지 않겠다"거나 "반미 좀 하면 어때"라고 한 발언을 두고두고 문제 삼았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제가 안팎(에서) 곱사등이 됐"다고 표현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선 "전쟁하냐"고 묻고, 반대로 미국과는 "잘 지낼 거냐?"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노 전 대통령이 취임 전까지 미국을 단 한 번도 방문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놓고 트집 잡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고졸'에다 '좌파'인 대통령이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 책을 잡히지는 않을지, '나라 망신'이나 시키지나 않을지 노 전 대통령의 '대미관'을 의심하는 눈초리가 팽배했다. 자서전 <운명이다>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선거캠프 안에서는 미국 방문 문제가 쟁점이었다. 모두들 하루라도 빨리 미국에 가라고 했다. 명을 내리기만 하면 미국 조야의 지도자들과 월가의 큰손들을 만나도록 주선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미국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비자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슨 결격 사유나 되는 것처럼 걱정했다." 


한미정상회담과 노무현 12주기


기우였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부시 대통령과 총 4번의 정상회담을 가졌고, 국제 정상회의에서도 총 4번이나 회동했다. 보수언론은 참여정부 시기 내내 '최악의 한미동맹'이라 깎아내렸지만, 노 전 대통령 사후 평가가 달라졌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현 정부와 참여정부와의 갖가지 비교 속에 일부 보수언론은 노 전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평가까지 내놨다. 그리고, 지난 201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공식 추도식에 참석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이런 회고를 전한 바 있다. 

 

"그 여느 지도자님과 마찬가지로 노 대통령님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물론 의견의 차이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의 차이는 한미동맹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공유된 가치보다 우선하는 차이는 아니었습니다. 저희 둘은 이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 총력전과는 달리 임기 말까지 종전 선언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던, 그러면서 한미동맹은 훼손하지 않으려던 노 전 대통령. 그러는 와중에 지지자들의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밀어붙였던 그가, '친구' 문재인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끌어낸 성과를 직접 목도했다면 어떤 감상을 전했을까.


사후에 더 유명해진, 노 전 대통령이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던 그 영상 속 "아, 기분 좋다"와 같은 특유의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았을까. 바로 그 한미정상회담을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시청한 22일은 마침 노무현 대통령 서거 12주기 추도식을 하루 앞둔 날이기도 했다.


이날 오후 '2021 사람사는 세상전'이 진행 중인 서울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특별관을 찾았다. 전시실은 코로나19 상황임에도 마스크를 쓰고 발열체크를 마친 남녀노소로 북적이고 있었다.


전시를 둘러보기 전, 작품 감상을 마친 이들이 적어 놓은 쪽지로 가득 찬 '추모 벽'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이중 자신을 초등학생이라 밝힌 이가 삐뚤빼뚤 정성껏 적은 쪽지 내용에 눈길이 갔다. 이날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확인된 달라진 우리의 위상과 문재인 대통령 이전 미 공화당 정부와의 협상을 이끌며 종전선언과 한반도 비핵화를 완성하려던 '노무현의 꿈'이 연결돼서였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 저는 정치인을 꿈꾸는 초등학생이에요. 오늘 이 전시를 보러 오기 전엔 제가 과연 꿈을 향해 잘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어요. 하지만 전시를 보니 누구나 그 꿈을 향해 사소한 일도 노력한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항상 대통령님을 생각하며 꿈을 향해 달려갈게요."

             

▲   "2021 사람사는 세상전" 전시 작품 중 김호성 작가의 "탄핵중 관저에서". ⓒ 노무현재단

              

▲  22일 오후 찾은 "2021 사람사는 세상전".  ⓒ 하성태

             

▲   22일 오후 찾은 "2021 사람사는 세상전". ⓒ 하성태


기억과 그리움


지난 19일 개막해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사람사는 세상전'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박재동 시사만화가를 비롯해 서양화, 한국화, 인물화, 만화, 서예, 조각 등 미술 각 분야의 99명의 작가가 그린 다채로운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직접 마주한 작품들은 친숙하면서도 신선했다. 누구는 '노무현의 미소'를 떠올렸고, 누구는 '노무현의 눈물'을 길어 올렸다. 과거 대통령 재직 시절이나 퇴임 후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접해 온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 대다수였지만, 온전히 작가의 기억을 승화시킨 작품도 적지 않았다. 물론 '노무현의 친구들'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 중 '친구' 문재인 대통령 또한 빠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노무현의 얼굴'이 구성의 전부는 아니었다. 각 장르가 망라된 만큼 작가 본인들이 '인간 노무현' 혹은 '정치인 노무현'에게 받은 인상을 자유롭게 펼쳐 놓은 작품도 여럿이었다. 이들 모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어떤 '공통의 기억'이 예술이란 개인의 기억으로 승화된 작품들이리라. 지난 19일 개막식에 참석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축사에서 전한 그리움 또한 엇비슷한 맥락이었다.


"나흘 후면 노무현 대통령 12주기가 오는데, 사실 이 전시회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에 이런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번도 꿈에서 노무현 대통령님을 뵙지 못했거든요, 제가 12년 동안. 오늘 새벽에 잠이 깰 때쯤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상당히 긴 시간 꿈을 꿨습니다. 그리고 깰 때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안아 드렸거든요. 꿈에서 제가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제가 정면으로 보고 안아드렸는데요. 잠에서 깨면서 이 전시회 생각을 자꾸 해서 그랬나 싶어 좋더라고요. 아마도 출품하신 예술가분들도 그렇고 관람하러 오신 시민 분들도 다 비슷한 마음 아닐까 해요.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줬는데요. 누군가의 원망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이나 어떤 분노, 이런 것들을 시간이 많이 덜어내 준 것 같아요. 하지만 시간이 그리움은 못 덜어가는 거 아닌가, 오늘 아침잠에서 깨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을 더 짙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사진과 영상일 터. '사람사는 세상전'은 미술 작품 외에도 다양한 세부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고 노무현 대통령 전속 사진사'로 유명한 장철영 작가의 특별 사진전이었다.


지난 2017년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란 사진집을 내놓고 다큐멘턴리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던 장 작가의 사진 작품들은, 역대 대통령 중 특히 서민 친화적이면서 나름 '포토제닉'하기로 유명한 노 전 대통령의 '친숙하면서도, 신선한' 모습이 다수 담겨 있었다. 장 작가가 이번에 공개한 수십 점의 사진은 '미공개' 작품이라 더 의미가 깊었다.


한편 노무현재단은 전시를 직접 찾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온라인 미술 아카이브 플랫폼 '아티파이(ARTIFY)'를 통한 온라인 갤러리를 마련해 놓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고려해 추도식마저도 간소하게 치르는 재단 측의 배려라 할 만했다.

             

▲   "2021 사람사는 세상전" 전시 작품 중 황용운 작가의 "노무현없는 노무현시대". ⓒ 하성태


             

▲   "2021 사람사는 세상전" 전시 작품들. ⓒ 노무현재단

             

▲   "2021 사람사는 세상전" 전시 중 장철영 작가의 미공개 사진. ⓒ 하성태

             

▲   "2021 사람사는 세상전" 전시 작품 중 장철영 작가의 미공개 사진. ⓒ 하성태


과거와 미래 
 

"그 사람이 걸어온 과거를 보아야, 그 사람이 걸어갈 미래가 보이는 법입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온라인 갤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02년 2월 국민경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나섰던 노 전 대통령의 말이다. '2021 사람사는 세상전'을 관람하고 관람할, 온라인 갤러리를 통해 접하고 접할 시민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치인의 꿈을 향해 달려가겠다던 초등학생을 포함해 이들 모두 '노무현이 걸어온 과거' 속 대한민국을 복기하는 동시에 향후 대한민국이 걸어갈 미래를 각자 전망해 봤을 터.


이들 모두 공교롭게도 전시 기간과 겹친 한미정상회담 및 문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남다르게 지켜봤을 것이다. 참여정부의 시즌2라 불리는 현 정부가 야심 차게 준비한 한미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굳건하고 깊은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한편 "세계적인 K팝 밴드"와 "오스카상을 휩쓴 <기생충>"을 소개하는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적어도 20여 년 전 "사진 찍으러 미국 가지 않겠다"며 일찌감치 한미 관계에 있어 '자주와 균형'을 강조했던 노 전 대통령만큼은 예견했을 법하다. 당선 전 미국 한 번 가보지 않고도 연임을 이어갔던 부시 전 대통령과 8차례 대거리를 하고 한미동맹을 굳건히 지킨 그 노 전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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