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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Aug 19. 2024

친일파 독재자가 사법 살인한 '보통의 존재들' 8인

윤석열 정부 역사 왜곡 및 친일 논란과 광복절에 되새긴 인혁당 사건 의미


▲  인혁당 희생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는 실제 사형집행때 사용되었던 끈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해방 딱 되고 나니까 일제강점기 때 왜놈 경찰에서 고춧가루 물 먹여, 비행기 태워, 경찰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경찰로 다 넘어갔습니다. 일정 때 밀정하던 사람들 그대로 CIC(미군24군단 소속 첩보부대)니 특무대니 다 들어갔고.


이렇게 해서 이 사람들이 해놓은 짓이 완전히 민족 간의 불신 이걸 조장시켜 놓고 일제 때 하던 그 습성 그대로 유지시키고, 지금 우리 처지도 그 당시에 비해서 하나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갈 길을 찾을 것 같으면 어딘가에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거예요."


1988년 5월 21일 고 임종국 선생의 마지막 강연 중 일부다. 임 선생은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이후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로 인정받으며 친일 잔재 청산에 일생을 바쳤다. 민족문제연구소도, 2009년 전 국민적 성원 속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모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설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임종국 선생의 일성을 길어 올리는 일은 무척이나 시의적절해 보인다. 무려 36년이 흐른 현재, 이종찬 광복회장이 "대통령실 안에 밀정이 있다"고 개탄하는 역사의 퇴행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저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든 <친일인명사전> 속 4776명의 친일파들 이름 사이에 박정희 이름 석 글자가 자리하고 있다. 1939년 일본 군관학교에 지원하며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란 내용의 혈서를 쓴 박정희를 두고 친일파라 정의하기를 꺼리는 자들이야말로 임종국 선생이 가리켰던 "일제 때 하던 그 습성 그대로 유지 시키"는 '밀정'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친일파 박정희가 18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빼앗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 중 1975년 4월 9일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8인의 희생자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해방 이후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가를 수감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서대문형무소를 찾으면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을 정도다.


광복절을 맞아 되돌아보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의가 인혁당 사건에도 고스란히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희생자들과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았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미래를 꿈꾸고 조국 통일을 염원했던, 가장 보통의 존재들

            

▲  고 김용원 선생 생전 가족 사진. ⓒ 4.9통일평화재단


목욕탕을 경영하고 있는 자

학교도서보급소를 경영하고 있는 자

반공법 위반으로 피검된 후 무직으로 전전하던 자

삼화건설 전무이사를 거쳐 회장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른 자

삼락일어연구소 강사로 입직하여 현재에 이른 자

경기여고 교사로 취직하여 현재에 이른 자

양봉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

극동건설회사 외공부장으로 종사하고 있는 자

광신상업고등학교 윤리교사로 현재에 이른 자

브록크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

노동 및 행상에 종사하고 있는 자

승리 라사점을 경영하고 있는 자

대구고려학원 강사로 현재에 이른 자

대산 목재사를 경영하고 있는 자


국가에 의해 인혁당 사건 때 기소된 분들의 당시 직업이다. 결국 희생자들과 피해자들 모두 어떤 면에서 보통의 존재들이라 할 수 있었다. 조작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지만 어쩌면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고, 통일을 염원했던 가장 보통의 존재들일 수 있었다.


제주4.3으로부터 시작된 이 땅의 국가폭력이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참사 희생자들과 피해자들도 따지고 보면 보통의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다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의 공통점은 나라 걱정이 많았고, 민중들의 편에 서려고 했으며, 굳이 앞장 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이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고.


한마디로 조작, '용공 조작'이었다. 실체가 없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의 경력과 활동 이력을 보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과거 이력을 바탕으로 사건을 조작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저 독재 치하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었고 향후 정당 활동으로 그 목소리를 널리 퍼지게 만들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대부분은 4·19 당시 혁신계 운동을 했고, 19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 1967년 재야 대통령 단일후보 운동, 1969년에는 삼선개헌반대운동, 1971년 김대중 지지 운동 및 공정선거감시운동, 유신 이후 유신반대운동 등에 몸담았다. 시종일관 조국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또 이들 중 일부는 과거 조봉암의 진보당의 평화통일 운동을 지지했고, 일부는 김구를 지지했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간첩 사건 같지만 실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인혁당이란 조직 자체가 완성된 정당이 아니었다. 애초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2차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로 윤보선 등 유력 정치인들을 지목하려 했으나 여론의 반발이 두려워 계획을 바꿨다. 훗날 재심에서도 밝혀졌듯이, 권력자의 독재 권력 유지와 이에 동조하며 그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자들이 조작한 사건의 희생자일 따름이었다.


독재자, 그리고 친일파와 공범자들

            

▲  박정희와 박근혜 부녀. ⓒ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


1974년 4월 3일 저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특별 담화 중 일부다. 이때가 바로 인혁당(재건위)이 독재자의 입을 통해 최초로 언급된 시점이었다. 이후 그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시민들의 열망을 꺾는 정권 유지 수단으로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활용되는 순간이었다.


복기하자면, 독재자의 딸, 박근혜 또한 나쁜 역사를 반복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는 기무사의 조언대로 눈물을 흘리며 희생자를 호명했다. 이후 해경 해체를 주장했다. 훗날 기무사 문건을 따르면, 세월호 집회 참여자를 종북으로 간주했다. 문건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대통령이 된 딸이 과거 독재자 아버지가 썼던 반공 프레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세월호의 7시간은, 세월호 참사는 탄핵을 맞는 결정적 계기였고,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오래오래 자극했다. 딸이 이어받은 독재자 박정희의 프레임은 이랬다. 인혁당 희생자들의 죄목을 보자.


가.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나. 국가보안법위반 다. 내란음모위반 라. 반공법위반


공안 검사가 기소하고 독재 치하의 사법부와 대법원이 판결한 희생자들의 죄목이다. 어떻게든 '반공'이란 죄목 아래 당시 학생조직이던 민청학련과의 연결 고리를 조작해 내려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피고는 공산주의사상을 신봉하게 되자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려는 결의하에 국가 변란과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반국가 단체의 구성을 모의하고 북괴방송의 우월성을 찬양하고… 유혈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자는 논의를 함으로써 반국가 단체의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실상 희생자들은 후배격인 민청학련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고 밀접하게 관계돼 있지 않았다. 판결문의 또 다른 내용을 보면,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보통의 존재들이 무시무시한 간첩의 수괴들처럼 보일 지경이다.

 

"'유인태가 검거되었으므로 이철도 곧 검거될는지 모르니 신변을 조심하라, 검거되더라도 배후선을 절대 폭로하지 아니하여 희생자를 적게 하여야 한다'고 지시함으로써 민청학련의 구성원과 회합하여 전국에 분산된 혁신자파 세력을 재규합하여 과거 인민혁명당과 같이 통일적인 조직으로 만든 다음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여야 된다는 지령을 받고 동 지령을 수행하겠다는 결의하에 '정부를 공산폭력혁명으로 전복시키고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투쟁하자'는 등의 교양을 받고, 이에 감화되어 출옥 후 서울 시내 각 모 서점을 순방하면서 일어판 식민주의와 공산주의 서적을 구입 탐독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념을 공고히 하는 일방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의 지도요원으로서…"


친일파 독재자가 민주 시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법살인을 저지른 최악의 국가폭력. 인혁당 사건을 더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따져 보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 터다. '인혁당 생존자' 박중기 선생이 "역사를 모르면 인혁당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친일파들"이었다고 강조 또 강조하는 것은.


친일파에 의해 처단 당한 8인의 인혁당 피해자들


            

▲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구속시킨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부는 도예종·박현채(앞줄 맨 오른쪽과 둘째), 박중기(뒷줄 왼쪽 둘째) 등 12명에게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했다. ⓒ 정부기록사진집


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정희의 과거 친일 이력이나 한일협정과 같은 한일 굴욕 외교들을 떠올리면 이러한 박중기 선생의 분노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지, 왜 그가 친일 잔재 청산을 그토록 부르짖는지 숙연해질 따름이다.


어디 독재자 박정희뿐일까. 사형선고 당사자인 민복기 대법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이자 박정희 정부의 주요 인사였던 민복기의 부친은 조선 귀족 자작이자 경술국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병석이다.


인민혁명당 사건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판결한 민복기 본인도 일제강점기 판사 출신으로서 제5·6대 대법원장을 역임하고 전관 변호사로 활동했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친일파의 손에 처단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인혁당 사건 50주기를 한 해 앞둔 2024년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이는 역사 왜곡을 넘어선 뉴라이트 및 극우 친일파 인사들의 정부 요직 등용과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전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예고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 임종국 선생이, 8인의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이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며 통탄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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