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영화 '내 이름은' 베를린 행, 응원합니다

by 하성태의 시네마틱

오래간만에 반가운 소식이다. 베를린발이다. 19일 영화계에 따르면, 정지영 감독 신작이자 배우 염혜란을 내세운 <내 이름은>이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2024년 <파묘>가 선정됐던 그 부문이다. 한국영화계로도 노장 정지영 감독 개인으로도, 제주4.3 영화로서도 기분 좋고 응원할 만한 소식임에 틀림없다.


2월 개최하는 베를린 국제영화제는 전 세계 국제영화제의 포문을 연다. 올해는 단골인 홍상수 감독을 비롯해 정지영 감독과 신예 유재인 감독이 이름을 올렸다.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이름은 단연 정지영 감독이다. 그는 유독 주요 국제영화제들과 인연이 없었다. 1980년대 커리어를 시작해 한국영화 뉴웨이브가 당도하기 전 <남부군>(1989)과 <하얀전쟁>(1992)이란 선 굵은 작품들을 선보인 그다.


3대 국제영화제와 연을 맺지 못한 채 지난해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던 정지영 감독은 데뷔 44년 만에 베를린에 초청받았다. 그것도 흔치 않은 제주4.3을 소재로 한 상업 장편 극영화로 말이다.


정지영 감독 4.3 영화가 전해준 반가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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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이름은> 정지영 감독.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주4.3 소재 영화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지슬>이다. 제주 출신으로 지역에서 독립예술 영화를 작업하던 오멸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인 <지슬>은 2013년 제2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 시네마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로는 최초였다. 지금은 미국 인디 영화계를 선도하는 메이저 영화제로 거듭났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대중들에겐 생소한 영화제였다. 한국영화계로서도, 4.3 운동과 제주 지역 문화예술계 모두에게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변방의 흑백 독립예술 영화가 제주4.3을 대중예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할까.


그로부터 13년이 흘렀지만 4.3을 다룬 상업 장편 극영화의 탄생은 요원한 듯 보였다. 4.3 소재 장편 다큐도 속속 완성됐다.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고 극장에 걸렸다. 거기까지였다. 너른 관객들에게 쉬이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극영화일 수밖에 없다. 허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인 양 총대를 메는 이는 드물었다.


잘 알려지다시피,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7년 7개월간 이어지며 3만여 명이 희생당한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이자 제노사이드다. <내 이름은>은 그런 태생적 조건을 넘어선 영화다. 2020년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공모했다. 대상작이 <내 이름은>이었다. 수상 후 표류하던 시나리오와 정지영 감독이 만났다. 정 감독이 대형 배급사와 작업한 <소년들> 차기작이었다.


정지영 감독의 근작 <블랙 머니>, <소년들>은 적잖은 예산이 투입되고 낯익은 배우들이 출연한 상업영화였다. 4.3을 주제로 50여 년을 오가는 세월의 무게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통해 세대를 잇는 작품을 표방한다. 투자가 문제였다. 하필 한국영화 위기가 찾아왔다. 투자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더군다나 상업영화로 제작된 적 없는 '4.3 영화'였다.


제주도민들의 힘이 절실했다. '4·3영화' <내 이름은> 제작 범국민·범도민 후원회'가 결성됐다. <순이삼촌> 현기영 작가 등 도민들의 성원이 이어졌다. 텀블벅 후원에 이어 영화진흥위원회 2025년도 중예산 한국영화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됐고, 마침내 베를린 진출 소식을 알려 왔다.


2년 전 4월, 2024 서울 4.3 영화제 토크에 참여한 정지영 감독은 오동진 평론가와의 대담에서 4.3 영화를 만들게 된 것과 관련해 '운명'과 '책임' 등을 언급했다. 빨치산을 소재로 한 <남부군>부터 한국영화 속 리얼리즘과 사회파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서 4.3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어떤 책무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방대한 약시와 사건이 얽힌 4.3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부연 속 결기와 같은 다짐을 내보이기도 했다.


<순이삼촌> 노작가의 바람, 4.3 영화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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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이름은>의 주연배우 염혜란.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내 이름은>은 4.3 제78주년을 맞는 2026년 4월 개봉을 앞뒀다. 사실 <내 이름은>에 앞서 기억해야 할 이름 아니 제목은 또 있다. 지난해 11월 말 개봉한 하명미 감독 <한란> 역시 4.3을 주제로 우여곡절 끝에 완성돼 관객들과 3개월째 만나는 장편 극영화다. <신과 함께> 김향기가 1948년 가을 4.3의 복판이던 한라산에서 딸을 지키고자 분투하는 엄마 역을 연기했다.


2025 아이치 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최근 제14회 헬싱키시네아시아영화제 초청 소식을 전해왔다. 또 독립영화로는 적잖은 스코어인 2만 8000여 명(20일 기준)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했다. 의미 있는 숫자인 건 맞지만 부족하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내 이름은>이 첫선을 보일 오는 4월, <한란> 역시 일본 개봉을 추진 중이다. 일본 오사카는 특히 4.3 당시 제주를 떠난 제주도민들이 재일조선인으로 터를 잡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한란>의 여정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3만 명의 희생자는 3만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기영 작가는 4.3에 대해 종종 이런 설명을 했다. 당시 제주 인구는 30만이었다. 4.3 사건으로 인해 제주 인구 10분의 1이 희생당했다. 미군정 시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 우리 군이, 경찰이, 서북청년단이란 테러 단체가 제주도민 3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현기영 작가는 이 비극과 참극을 빗대 4.3은 3만이란 개별 영혼들의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아울러 사석에서 만난 이 노작가는 소설이 아닌 영화의 중요성을 강조 또 강조하고 있었다. 소설보다 더 많은 대중이 볼 수 있는 4.3 소재 극 영화들이 계속해서 제작되고 극장에 걸리고 국제영화제에 선보여야 한다는 통찰이자 바람이었다. 광주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와 <택시 운전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 작가의 바람처럼 4.3 소재 극영화들은 이제 발걸음을 뗀 정도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2024년 말이었다. 그 이후로 식지 않은 4.3에 대한 관심을, 현기영 작가의 바람을 정지영 감독과 <내 이름은>이 현실화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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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이름은’ 포스터.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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