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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TBBB Nov 21. 2021

한국식 고통의 미화 또는 일반화, 유럽식 고통의 인정

 유럽과 한국에서 '고통'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내가 체감한 한국에서의 '고통'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겪는 일, 뭐 유별난 일이라고 티를 내나, 괜히 티 내지 마라. 이게 다 마음이 해이해서 그런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뭐 이런 정도의 느낌이었다. 대학 재수를 하게 됐을 때도 내가 제대로 한 번에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잘못이니, 또 부모님이 뒷바라지해줘야 하는 일이니 나는 고통을 느껴서는 안 됐고 그걸 표현해서도 안됐다. 재수 후 들어간 대학에서 겪는 새로운 종류의 사건 사고 자아성찰 등에서 오는 고통도 그저 감내야 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 했고, 누군가는 다 그렇지 뭐 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책을 그즈음에 발매해 온 사회의 청춘들에게 고통을 미화시키려 했다. 대학에 졸업 해 취업난에 허덕일 때도 아니 눈을 좀 낮춰서 작은 회사에 일단 지원하라는 둥, 이게 다 네가 주제 모르고 눈이 높아서 자초한 일이라는 둥의 말을 들었고, 회사에 취직해 주당 80시간을 일할 때도 어이없게 모두가 그 정도로 일을 하고 있어서 다 이러고 사는 건가 이게 당연한 건가 했다. 


이렇게 평생은 못 살겠다, 나는 내 길을 가련다 하고 떠나온 네덜란드. 처음 네덜란드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은, 누군가 내게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야?'라고 묻거나, '너의 몸/마음이 하는 소리를 따라(follow what your body/mind says)'라고 할 때였다. 물론 한국에서도 들었던 말들이지만 그 결이 달랐다. 위의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을 때 한국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멋진데 그게 될까?라는 눈빛이라던가, 현실의 잣대로 이리저리 측정되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수업 과제를 받았을 때, 한국에서의 나는 그 교수님의 성향을 살폈었다.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도 노력했고. 하지만 여기서는 네가 하고 싶지 않은걸 왜 해? 라던가 도저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게 말하고 시간을 좀 더 가져봐.라고 했고, 정말 모두들 그런 식이 었다. 몸이 아프면 눈치 보지 않고 아플 수 있었고, 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유럽식이 또 확연이 좋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글쎄요 이다. 이러한 마인드 때문에 유럽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며 안 좋게 말하면 이기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런 민낯이 코비드 시대가 도래하고서 더욱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모두를 위해 마스크를 쓰는 정책이 발효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숨 쉴 자유를 억압한다며 대규모 시위를 하기도 했고 작고 큰 시위들이 아직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모든 개개인들이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모두를 위한 정책을 반대하는 이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은 다시 중환자실이 꽉꽉 채워져 의료진들과 일반 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남자 친구 부모님의 이웃 중 한 분이 뇌종양이 발견돼 수술이 필요한데,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어 수술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중환자실은 급증한 코로나 환자들 때문에 가득 찬 거고. 


다들 조금씩만 서로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면 한국도 유럽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모두가 행복만 할 것 같은데 그 조금씩이 너무 어려운가 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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