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한국에서 '고통'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내가 체감한 한국에서의 '고통'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겪는 일, 뭐 유별난 일이라고 티를 내나, 괜히 티 내지 마라. 이게 다 마음이 해이해서 그런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뭐 이런 정도의 느낌이었다. 대학 재수를 하게 됐을 때도 내가 제대로 한 번에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잘못이니, 또 부모님이 뒷바라지해줘야 하는 일이니 나는 고통을 느껴서는 안 됐고 그걸 표현해서도 안됐다. 재수 후 들어간 대학에서 겪는 새로운 종류의 사건 사고 자아성찰 등에서 오는 고통도 그저 감내야 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 했고, 누군가는 다 그렇지 뭐 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책을 그즈음에 발매해 온 사회의 청춘들에게 고통을 미화시키려 했다. 대학에 졸업 해 취업난에 허덕일 때도 아니 눈을 좀 낮춰서 작은 회사에 일단 지원하라는 둥, 이게 다 네가 주제 모르고 눈이 높아서 자초한 일이라는 둥의 말을 들었고, 회사에 취직해 주당 80시간을 일할 때도 어이없게 모두가 그 정도로 일을 하고 있어서 다 이러고 사는 건가 이게 당연한 건가 했다.
이렇게 평생은 못 살겠다, 나는 내 길을 가련다 하고 떠나온 네덜란드. 처음 네덜란드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은, 누군가 내게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야?'라고 묻거나, '너의 몸/마음이 하는 소리를 따라(follow what your body/mind says)'라고 할 때였다. 물론 한국에서도 들었던 말들이지만 그 결이 달랐다. 위의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을 때 한국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멋진데 그게 될까?라는 눈빛이라던가, 현실의 잣대로 이리저리 측정되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수업 과제를 받았을 때, 한국에서의 나는 그 교수님의 성향을 살폈었다.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도 노력했고. 하지만 여기서는 네가 하고 싶지 않은걸 왜 해? 라던가 도저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게 말하고 시간을 좀 더 가져봐.라고 했고, 정말 모두들 그런 식이 었다. 몸이 아프면 눈치 보지 않고 아플 수 있었고, 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유럽식이 또 확연이 좋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글쎄요 이다. 이러한 마인드 때문에 유럽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며 안 좋게 말하면 이기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런 민낯이 코비드 시대가 도래하고서 더욱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모두를 위해 마스크를 쓰는 정책이 발효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숨 쉴 자유를 억압한다며 대규모 시위를 하기도 했고 작고 큰 시위들이 아직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모든 개개인들이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모두를 위한 정책을 반대하는 이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은 다시 중환자실이 꽉꽉 채워져 의료진들과 일반 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남자 친구 부모님의 이웃 중 한 분이 뇌종양이 발견돼 수술이 필요한데,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어 수술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중환자실은 급증한 코로나 환자들 때문에 가득 찬 거고.
다들 조금씩만 서로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면 한국도 유럽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모두가 행복만 할 것 같은데 그 조금씩이 너무 어려운가 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