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야 꺼야 걸을꺼야
4만보를 걸었던 날이 있었다.
아이폰 걸음 수에 '4만'이란 숫자가 찍힌 게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캡쳐까지 해두었던 날.
그 날 나는 내가 이렇게 걸어버릴줄 모르고
콘크리트도 부실만큼 딱딱한 닥터마틴을 신은 날이기도 했다. 가도 가도 더 멀리 가고 싶었고, 내가 모르는 더 많은 뒷모습을 만나고 싶었던 그런 날. 덕분에 엄지발톱엔 멍이 들었었다ㅠㅠ
언젠가 4만보를 걷지 못하게 될까봐 차를 못사겠어요, 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은 진심이었다.
사실 눈에도, 마음에도 담고 싶은 것 하나 없어 울고 싶어지는 날들이 더 많아질까봐 두려웠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몰라서, 무엇을 담고 싶은 건지 몰라서, 마냥 모르기만 해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다.
이런 마음을 부둥켜안고 걷다 보면, 어느 것 하나는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라 걷기는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꽤나 괜찮은 처방이 된다.
그래서 오래도록 걸은 날엔 조금은 안심하며 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어제 이런 내 마음을 누군가 알아준 것만 같았다. 술자리에서 기저에 깔린 두려운 속내는 쏙 감추고 마치 영웅담 자랑하듯 '4만보를 못걸을까봐 차를 못사겠어요 하하' 라고 똑같이 이야기했다. 여기에 돌아온 대답이 어쩌면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4만보를 걸을 줄 아는 사람이면, 아마 차를 타고 더 멀리 나가 거기서 또 4만보를 걸을 수 있을 거야'
보통은 왜, 차가 얼마나 편한데, 왜 그렇게 걸어다니는거야,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어서
나도 대충 하하 그러게요, 걷는 게 좋아요 하고 만다.
그런데 저 말엔, 내가 원하면 4만보만큼의 세상을 언제고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과 가능성이 담겨 있었던 것만 같아서 되게 근사했다.
더 멀리 멀리 걷고 싶다.
오래 오래 걸으면서 한 명도 좋고, 두 명도 좋고,
더 많은 뒷모습을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가닿은 곳에 내 마음에 담고 싶은 것들로 가득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