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족이란
벌써 한해의 3분의 1이 지나고 있다. 누가 말했나. 변명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고 못난 변명은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이라고.
우리 집에는 연말이 되면 조그만 가족행사가 있다. 모두가 둘러앉아 일 년을 회고하는 것은 아마 다른 집하고 비슷할 테지만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필기구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각자 주어진 항목을 적고 나면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식이다.
그 항목에는 세 가지가 들어있다. 첫째 나의 새해 3대 목표이다. 내년 일 년 동안 내가 달성할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가족에게 공표하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목표가 들어갈 수도 있고, 자기 계발 부분일 수도 있고, 건강이나 기타 사회봉사 등도 포함될 수 있다. 목표가 너무 많으면 달성도 쉽지 않고 그냥 계획으로 끝날 수 있기에 딱 3가지로 한정했다. 그리고 다음 해 연말이 되면 그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가 하는 점수를 스스로 매겨 발표한다. 각각의 목표에 대해 90점이다 또는 60점이다 말하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면 다른 가족들이 그에 대해 동조를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여 점수를 조정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관점이 달라 서로 눈치를 보게 된다. 자기점수를 높게 책정하면 야유가 터져나오는 등 약간의 이견이 생기지만 즐겁고 건강한 토론이 되곤 한다. 물론 목표를 남모르게 세워놓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공표를 하게 되면 약간의 의무감이 더해지고 가족 간의 공통적 관심사 되어 달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내가 금연에 성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연수 갔을 때 같이갔던 연수생들과 후지산 정상을 오른 적이 있다. 힘들게 위에 올라 무언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피우고 있던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 분화구 안으로 던졌다. 그러면서 공언을 했다. 내가 다시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는 이곳에 올라와 저것을 다시 꺼내 필 것이라고. 한국에 돌아와 몇 번이나 담배 생각이 났으나 동료들에게 쓸데없는 공언을 한 덕분에 몇 번이고 참아냈던 기억이 있다. 암튼 매년 가족에게 공표하고 자기 방에 붙여놓는 나의 목표는 은연중에 자기 암시가 되고 게을러지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효과를 가져오곤 했다.
두 번째 기입 항목은 나와 가족원의 장점과 단점 또는 개선점이다. 자신에 대한 장점을 적으면서 동시에 단점이나 개선점을 적으면 동기부여는 물론 반성의 시간도 갖게 된다. 다른 가족원에 대한 장점을 말해주면 격려가 되고 자존감이 강화된다. 상대의 개선점을 말해주는 부분은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러나 먼저 장점을 충분히 얘기해 주고 나서 본인도 알고 있으나 개선이 더딘 단점을 서로 얘기해 주면 마음이 약간은 아프면서도 받아들이게 된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이 매섭게 질책을 당하는 것보다 미리 면역효과를 주는 단련의 시간이 된다. 특히 자녀와 부모 간 또는 부부간에는 얘기를 못하는 부분이 있다. 앉혀놓고 정색을 하며 지적을 하면 마음을 다칠 수 있다. 게임 비슷한 방법의 이러한 시간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여지가 많은 것이다. 게으르던 내가 집안일을 돕거나 자기방을 그런대로 치우거나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이를 통해 길들여진 습관이다.
세 번째 기입 항목은 10대 뉴스이다. 각자 올해와 내년의 5대 뉴스를 적어내고 그것을 취합하여 공통으로 가족의 10대 뉴스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뉴스가 나올 때마다 서로 박수를 치면서 공감을 하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뉴스가 다 정리되어 발표되면 서로 돌아보며 뿌듯해하거나 감회 어린 눈빛을 보낸다. 나아가 내년도 예상 10대 뉴스를 같이 정리하면 예상되는 가족의 공통 관심사가 떠오른다. 일종의 우리 가족 내일신문이 된다. 좋은 일이면 같이 들뜨게 되고 대비가 필요한 일이면 심리적 단합을 맺게 해준다. 가족이란 개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졸업이건 승진이건 결혼이건 이사를 가는 것이건.
아무튼 이렇게 세 가지의 항목이 모두 정리되고 발표하는 시간이 끝나면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냥 가족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관심사와 칭찬 해줄 사항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단점을 지적하려다가도 상대가 스스로 내뱉은 개선점이 생각나서 멈추게 된다. 각자의 목표가 생각나면서 대화가 깊어진다. 내년 여름 가족여행을 생각하면서 말 없는 눈웃음이 교차하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비가 올 때 잠깐 처마 밑에서 같이 비를 긋다가 비가 멈추면 각자의 길로 떠나는 그런 만남이라고 누가 얘기한 적이 있다. 사람들의 라이프 사이클에서도 아이들이 다 떠나고 둘만 남은 때를 ‘빈 둥지 시기’라고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던 연말 행사도 이제 빈 둥지가 되니 같이 할 수가 없다. 역시 잠깐이었던가 보다.
그런데 어느 날 딸네 집에 가보니 초등학교 손주방 책상 앞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나의 3대 목표’가 적혀있는 것 아닌가. 적이 놀래 딸에게 물어보니 연말마다 사위랑 손자랑 앉아서 똑같이 그 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말 쪽지, 아니 눈치 게임이 대를 물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거실에 앉아 놀고 있는 손주 칭찬거리 하나가 생겼다. 손주에게 슬쩍 다가가 눈치를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