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호수에 돌 하나를 던졌지. 한 점에서 피어나는 끝없는 파문. 그 꽃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퍼져 나갔지. 그랬어. 자긴 돌이었어. 응?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좀 들어봐. 내 가슴을 출렁거리게 만든 돌멩이였다는 말이야. 45년 전에.
기억나지. 자기 졸업식 때 조그만 선물을 들고 내려갔던 일. 두 시간을 기다리게 해 놓고 겨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며 돌아서 군중 속으로 스며들던 날. 이해하지. 이제 졸업을 했으니 확실한 상대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 당시 난 초라한 행색의 취업 준비생이었고. 마음속에선 그 선물이 이미 쓰레기통에 들어갔지만 주머닛돈이 생각나 마지못해 다시 들고 가슴을 꾹꾹 눌러가며 기차를 탔던 날.
그러고는 한참이 지났지. 난, 곧바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갔고 거기서 발랄한 아가씨의 눈짓에 빨려 들어갔지. 시내 출장 간답시고 극장에도 가고 말이야. 자기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지. 솔직한 마음을 바로 꺼내 보여주고 항상 웃음이 맴도는 얼굴. 이미 자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 아마 조금 더 달력이 찢어졌으면 회사 내에 소문이 찢겨 나갔을지 몰라.
그런데, 바로 그때, 그때였어. 데스크의 아가씨가 엽서 한 장을 흔들며 다가온 때가. 많이 보던 손글씨였어. 뭐라 썼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암튼 내가 그립다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난 순간 얼어붙었어. 그렇게 몇 년을 같이 지내면서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던 여인의 느닷없는 엽서를 보고. 난 어떡해야지? 거의 기억을 지워가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새 여인과 그런대로 잘 맞아 가는 데. 난 어떡하지?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얄밉기까지 했어. 어디서 몰래 보고 있다가 훼방 놓으러 나온 것 같기도 했어.
왜 그런 말 있지.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 말이야. 잡힐 만하면 도망가고 하면서 애를 태우라고. 그래야 사냥의 맛이 난다고. 마치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도망가다가 너무 안 보이는 데 숨어 있으면 안 된다는 얘기야. 못 찾는 사이에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이 나타나면 누가 토끼를 생각하겠어. 그 간격을 잘 유지하라는 게 연애비법이지. 지금 내 입장이 그런 것 아니겠어. 자기가 좀 오래 있었어. 괜찮은 사슴이 나타났단 말이야.
판단이 서지 않아 고민하니 친구가 한마디 했어. 따지지 말고 당장 내려가라고. 그 한마디의 울림이 컸어. 난 그날 저녁 기차를 탄 거야. 다음날을 월차로 둘러대고. 헤르만 헷세의 말이 생각나. 인간의 행동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고. 비합리적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해치우느냐에 달렸다고. 맞는 말이야. 내 머리보다 가슴이 이미 달리는 기차에 앉아 있었어. 자기 엽서는 아마 심리학에 나오는 티핑 포인트 아니면 레버리지 포인트였을지 몰라. 큰 수압을 견디던 댐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구멍으로 무너진다는.
하긴 역사를 뒤져봐도 그런 일이 많은 것 같아. 영웅도 그렇게 많이 탄생됐고. 아니 윈스턴 처칠을 보라고. 육군사관학교 졸업시험에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지리문제를 볼 때 얘기야. 세계의 무수한 국가 중에 딱 하나의 나라가 문제로 나오고 그 나라에 대해 모든 것을 쓰라는 식이지. 며칠 만에 무슨 수로 그 많은 나라를 다 외우겠어. 처칠은 시험 전날 조용히 책상에 앉았지. 그러고는 세계지도를 펴놓고 눈을 감고 연필로 찍었다는 거야. 뉴질랜드가 나왔대. 그래서 밤새 그 나라에 대해서만 팠다지. 다음날 어떻게 됐겠어? 처칠의 자서전이니 해피엔딩 아니겠어? 맞아. 바로 뉴질랜드가 시험에 나온 거야.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돼. 만약 졸업시험을 패스하지 못하면 사관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그러면 처칠이 수상이 됐겠어? 완전히 불합리한 행동이지. 운칠기삼이기도 하고.
어쨌든 얘기가 다른 데로 갔는데 핵심은 자기 엽서 한 장이 그린 파문 한 잎에 내 인생이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는 거야. 자석처럼.
그러고 보면 난 아직 가슴으로 살고 있는지 몰라. 가끔 싸울 때 합리적인 이유를 대도 자기한테는 전혀 안 먹힐 때가 많은 것 보면.
도대체 이 머린 왜 달려 있는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