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초롬히 핀 에델바이스가 문제였을까. 보였다 가렸다 하는 실안개가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산 정상의 적막을 찢는 청량한 새소리가 그랬을까. 그녀를 선녀로 만든 것은. 아니 한 마리의 새로 보이게 한 것은. 하늘하늘한 손목에 든 꽃은 신부의 부케였고 까르르 웃는 입모양은 그레이스 켈리가 현신한 것이었다. 7월의 소백산 정상. 그 연극 같은 장면에서 나는 목석이 되었다.
얘기는 그 전날로 돌아간다. 군 제대를 하자마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입장에서 앞날을 설계하고 무언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결심 아닌 결심을 하나 했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나 자신의 각오를 굳건히 하고 오겠노라고. 일주일 간의 여정으로 우선 소백산을 택했고 풍기 희방사역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했다. 마침 남자 대학생 일행 4명이 오르고 있었다. 같이 동행하며 학창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희방폭포쯤 오르니 날이 어두워졌다. 폭포 옆에 산행자를 위한 민박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방학 시즌이라 방이 다 차고 한 개만 남았단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남은 한 방을 같이 쓰기로 했다. 휘발유 버너로 불을 붙여 어렵게 저녁밥을 끓여 먹고 나니 캄캄한 산중에 남자들 다섯 명이 앉아할 일이 없었다.
마침 옆방에 까르르 웃어가며 무언가 게임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치기가 발동하여 같이 합석할 수 있는 그룹을 찾아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나갔다 오더니 마침 5명의 여대생 그룹이 있고 조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배구 게임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 같은 팀원이 돌아가며 리시브, 토스, 스트라이크 하며 상대팀의 번호를 말하면 상대방에서 이를 받아 똑같은 순서로 받아 수비와 공격을 하는 것이다. 박자와 번호를 놓치면 벌을 받는 것이다. 여대생 사이사이에 끼어 게임을 배워가며 하느라 애를 먹었다. 게임의 룰이 익숙자 않아 몇 번이나 벌을 받았다. 특히 바로 옆에 앉은 여대생이 유난히 쾌활하여 내 무릎을 쳐 가면서 까르륵 웃어 넘어갔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내일 산행을 위해 억지로 일행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고 했지만 밥을 짓는 동안 어제의 여대생들은 벌써 산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려니 하고 짐을 정리하여 천천히 정상을 향했다. 그런데 그 정상에서 어디서 들은 듯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아닌가. 저만치 누군가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꽃을 꺾고 있었다. 그런데 운무가 엷게 쌓인 산 정상하며 새소리 하며 가지가지 들꽃들이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인 것이다. 아니 영화 「사운드오브 뮤직」의 여주인공으로 보였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바로 어제 옆에 앉았던 여대생 아닌가. 어제 옆에 앉아있을 때는 그저 쾌활한 처자 정도로 보였었다. 갑자기 가슴이 일렁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간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지금 나를 찾는 여행을 하는 중이고 그 어떤 것에 마음을 쓸 틈이 없는 놈이라고. 눈을 돌려 다음 봉우리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데 말썽이 생겼다. 군대에서나 신던 워커라는 헌 신발을 신고 왔는데 신발의 앞창이 터져 나간 것이다. 다른 신발도 없고 당시는 붙일 본드 같은 것도 없는 형편이라 주위에 있는 칡넝쿨을 잘라 묶었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만큼 되어 산행을 시작하는 데 아까 본 그 여대생이 뒤처져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쪽은 새 신발을 신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뒤꿈치를 물기 시작한 그녀의 발은 앞서간 일행과 한참이나 벌어져 있었다. 결국 칡넝쿨로 묶은 발과 뒤꿈치가 까인 발이 뒤에 남아 같이 걷게 되었다. 비로봉에서 순흥 소수서원까지는 꽤나 걸어야 했다. 가슴은 제멋대로 설레나 마음은 엄하게 지켜보고 있는 상태로 밋밋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대학 졸업반이고 전공이 과학 쪽이라는 것과 대구라는 도시의 중학교 동창들이라는 것 정도. 몇 시간을 걸어 신작로로 나왔다.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저쪽은 영주로 해서 대구를 가야 하니 오른쪽으로 가는 버스를, 나는 부석사 쪽으로 가야 하니 왼쪽으로 가는 버스를. 몇 시간 동안 말을 섞으며 내려왔으면서도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은 채였다. 몇 번이나 이름이나 주소를 물어볼까 했으나 자신 속의 검열관이 지키고 있는 터였다. 저 쪽의 버스가 먼저 도착했다. 순간적으로 아니 본능적으로 이름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버스에 오르는 것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사이 버스의 문이 닫혀 버렸다. 그리고 포장이 안된 신작로에 뽀얀 먼지를 내며 버스의 크기가 작아지지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쿵’하고 내려앉는 것이 있었다. 본능이었을까. 아니 후회였을까. 순간적으로 사람에겐 일생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니야.’ 그녀를 놓친다는 것은 커다란 실수라고 위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깊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소리였다. 그때 무언가가 떠올랐다. 시골의 버스는 큰 정류장에서 보통 몇십 분 서 있는다는 생각이. 그래, 저 버스도 다음 정류장에서 한참 서 있을 거야. 저 모롱이만 돌아가면 서있을 거야. 무언가 불끈 솟았다. 어깨의 무거운 배낭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버스 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군대에서도 완전군장을 하고 그런 속도로 달려본 적이 없다. 휘발유 버너와 텐트까지 묶인 그 무게의 배낭이 나를 매달고 달렸다. 거의 날았다. 한 시간 같은 십여 분이 지나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런데. 버스가 막 떠나고 있었다. 그렇게 숨도 눌러가며 날아왔는데 버스가 떠나는 것이었다. 다시 폴폴 거리며 매몰차게 떠나는 버스가 원망스러웠다. 떨어져 있던 고개를 한동안 들지 못했다. 큰 숨을 내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뭐랬어. 주변에 흔들리지 말랬지?’ ‘그래,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찾았다. ‘그래, 이건 기회가 아니라 그냥 스침이었어. 가자 부석사로.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심호흡을 하고 난 뒤 툴툴대며 도착하는 버스에 발을 올렸다.
먼지로 뽀얗게 덮여 회색이 된 칡넝쿨표 워커의 역할은 이렇게 저물었다. 내 3막 5장의 러브스토리 중 겨우 1막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