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by 걸침


오늘도 대화를 하다 목소리가 커진다.


나의 주장, 나의 태도란 무엇인가.

그저 내가 지나왔던 길에서 주운, 읽었던 책에서 얻은, 만났던 사람에게서 들은

그 기억들의 집합 아니겠는가.

내가 만약 다른 길, 다른 책,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나의 주장이 지금과 같았을까.

내 의견을 고집할 일이 아니다.


그 기억마저 저렇듯 찢어지고, 틑어지고, 불타고, 뭉개졌는데

그 너덜너덜한 기억들의 조합을 트로피처럼 자랑삼아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내 기억을 그렇게 믿을 일이 아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보듯이 우리는 그저 장기기억으로 남은 핵심기억만을 쥐고 살아간다.

창고에 버려진 저 수많은 단기기억이나 감각기억들의 더미를 보라. 지금은 전혀 낯설고 못생긴, 나뒹굴어져 있는 기억들.

그 장면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저 수많은 기억들이 바로 나였고, 지금의 나를 만든 것 아니겠는가.

그것은 마치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핵심기억이나 기쁨이 같은 주연 뒤에서

쓸쓸히 망치를 들고 무대를 고치고 조명을 맞추고 분장을 해주는 그런 슬픔이나 소심이 같은 스태프들의 모습 아닌가. 그러나 기쁨이를 행복하게 한 것이 결국 슬픔이 아니었던가.

스탭이 없으면 과연 연극이 올라갈 수 있을까.


일 년간 캠핑으로 세계여행 하던 중에 어느 섬에서 만난 젊은 아빠의 말이 생각난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어린 딸 앞에서 기타를 쳐주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저 두 살도 안된 딸이 커서 과연 생각이나 나겠냐'라고. 아빠가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도 좋아요. 저 아이의 기억에 무언가 하나 얹어 놓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요." 그의 한마디는 저녁 내내 나를 먹먹하게 했다. 꼭 핵심기억으로 남지 않아도 좋다는 뜻 아닌가. 우리의 일생이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지듯이 말이다.


그런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고.

그동안 버려진 기억들, 관심받지 못한 기억들을 조심스레 꺼내봐야겠다.

슬픔이도 까칠이도 소심이도..

그들이 다시 살아 환해지는 얼굴을 보고 싶다.

어둡고 칙칙해 보였던 그림이 움직인다. 서로 떠들고 있다.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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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생긴 기억들 75 cmX35 cm 한지, 수묵. 유화 콜라주, 걸침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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