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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Feb 16. 2021

[19C, 영국 낭만주의1] 본질에 대하여

윌리엄 터너 <호수에 지는 석양>


윌리엄 터너 <Sun setting over a lake>

[2017, 내셔널 갤러리 방문 후기]



  고대 동굴 미술부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거쳐 낭만주의까지 왔지만, 영국 화가의 작품은 18C에 이르러서야 미술사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에 이르러 영국 미술계의 영향력은 미국조차 뛰어넘을 만큼 엄청나지만, 18세기 이전까지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섬나라가 갖는 특성도 있었고 보수적인 왕권의 특징도 있었겠지요. 간혹 몇 명의 위대한 초상화가들이 있었지만 영국의 독자적인 스타일이라기보다 플랑드르나 프랑스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았지요.



  그렇다고 영국의 문화 수준이 뒤쳐져 있었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할 때, 영국 미술의 힘은 문학에 있다고 생각해요. 당장 17C에 셰익스피어만 해도 유럽의 문학계를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근래에 <해리포터>가 시대를 이끌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문학은 가장 대표적인 인문학이며 철학이기에 철학을 시각화하는 미술에 있어서도 영국의 저력은 시간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낭만주의는 나라별로 각기 다른 양상을 나타납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시대를 고발하고 인간의 감정을 직접 고양하는 것으로 집중했다면 독일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숭엄한 자연이나 관념적인 방향에서 낭만을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땠을까요? 영국은 이미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덕분에 “낭만” 그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집중했습니다. 개념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움, 있는 그대로의 자연미를 나타냈달까요? 그리고, 영국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최고의 화가가 바로 윌리엄 터너입니다. 



영화 <미스터 터너>
<Slavers throwing overboard the dead and dying> / <Snow Storm>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그림과 영화 속 장면


  예전에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일대기를 그린 <미스터 터너>라는 영화를 봤었습니다. 제가 심미안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술 영화답게 거의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단조로운 장면이 대부분이더군요. 다만, 윌리엄 터너의 존재가 미술사적으로 인상주의와 영국의 풍경화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에서, 감독이 의도적으로 표현한 몇몇의 미장센이 기억에 남습니다. 해질녘의 바다같이, 그가 그린 실제 그림과 영화 장면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었지요.



  윌리엄 터너는 당시에 유행하던 낭만주의나 신고전주의에서 탈피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추구했던 화가입니다. 열다섯의 나이로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만큼 천재였지요. 무려 30여 년을 앞서 인상주의가 가진 철학을 실천한 화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앞서간 천재가 외로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까요? 당대의 사람들은 말년의 그의 미술세계를 이해하는 이는 매우 적었습니다. 심지어 그를 비웃기도 했지요. 사람들에게 “비누 거품과 회반죽 덩어리”로 그린 그림이라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카메라의 등장에 좌절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필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리기는 어려웠겠지요. 더구나, 후에 나타난 라파엘 전파 특유의 강렬한 그림에 쓴웃음을 짓고 맙니다. 본인의 시대가 종말이 왔음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란 게 쉽게 변하던가요? 넘어지고 깨지고 힘들어도 하고 싶은  있으면 기어이 하고 마는  사람 아니던가요? 고집도 철학이 있으면 신념이 되곤 합니다.


  그가 생각했던 미학의 본질은 빛이었습니다. 사실, 본다는  자체가 빛을 느끼는 것이니까요. 윌리엄 터너 이후에 인상주의가 탄생했고, 현대에 이르러 미니멀리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빛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빛이라는 미학적 개념은 카메라의 등장과는 별개로 현재까지도 미술작품이라는 모습으로 계속 나타나고 있지요.



  이처럼, 터너의 신념이 수세기에 걸쳐 유지될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점인  같아요. 스타일보다는 본질에 집중했다는 . 사실,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라는 연속의 질문에 다섯 번 이상 답하기도 어렵다지요. 그 질문들 사이에 불필요한 것들을 배제하고, 중요한 것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통찰력(洞察力)입니다. 그런데 통찰의 통자가 꿰뚫는(通) 것이 아니라, 골짜기(洞)이라는 사실이 좀 의아하기도 합니다.


  골짜기에는 많은 것들이 모여듭니다. 빗물이 모이고, 낙엽과 돌덩이도 굴러옵니다. 그렇게 어지럽게 쌓인 가운데 길은 하나지요. 그래서 많은 것들이 모인 골짜기() 관찰()하여 길을 찾는 것이 통찰이라 하는가 봅니다. 다양한 경험은 본질을 꿰뚫어 볼  있는 힘이 되고, 그것은  목적을 이끄는 힘이 됩니다.

영화 <미스터 터너> 중.



  윌리엄 터너도 화가로써는 드물게 수많은 여행을 했습니다. 수많은 골짜기들도 지났을 테고, 넘어지기도 했을 것이며, 돌덩이를 황금으로 착각할 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의 길을 찾았겠지요. 그 길이 좁고 희미해도 빛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을 겁니다.


  영화 속 윌리엄 터너는 임종 직전에 "태양은 신이다"라고 외치고 숨을 거둡니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빛의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일 뿐,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세상의 근원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천지는 빛이 있으라 함에 창조되었으니까요.


  그림은 기교의 아름다움보다, 그 뜻과 의도가 명확할 때 빛납니다. 한 획이 본질에 가까울수록 우리는 명작(master piece)라고 부르지요. 이처럼, 수단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목적은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모습이 다양한 만큼, 살아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잘 살기 위한 방법을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한 해답은 터너가 평생을 천착했던 밝고 따뜻한 빛의 느낌인 것 같아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고, 그것을 인정받으며,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이고, 더불어 유한한 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이유라 믿습니다.



[참고]

영화 <미스터 터너>

사진 <Mioomaroo>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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