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간
[2015년쯤의 기억]
몇 주 뒤면 사옥을 이전한다고 합니다. 늘 똑같은 곳인 줄 알았는데 이제 곧 떠난다고 생각하니 주변이 다시 보이기도 합니다. 자주 찾지는 않았지만 건물 뒤편의 공원이 참 좋았는데, 강남 한 복판에 있다 보면 가끔 생각날 것 같아요. 하기사 소중한 것은 떠난 뒤에 알게 되는 법이죠.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도 마지막 즈음엔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는 법이니...
추억이 깃든 곳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 주위를 둘러싼 많은 빌딩이 보였습니다. 의외로 유서 깊은 건물도 있을 수 있지요. 제가 자주 찾던 식당가 빌딩은 한국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김수근 건축가의 벽산 125(현 게이트타워)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모를 수는 있어도 그가 지은 건물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대표적으로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과 서초동 대법원 등이 있지요.
수 많았던 작품 중에 벽산 게이트타워 빌딩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설계한 마지막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유작은 평생의 정수와 철학이 녹아 있다지요? 게이트타워는 당시로서는 독특했던 유선형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추구했던 철학처럼 편안하게 주위와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건물은 80년대에 지어졌지만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습니다. 다만, 꽤 높은 건물임에도 아늑한 느낌이 더 많습니다. 존재감을 강렬하게 드러내기보다 맵시 있게 수수 하달 까요?
건축가 김수근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공간 사옥>(현 아라리오 뮤지엄)입니다. 종로구에 위치한 5층 건물은 담쟁이넝쿨이 멋스럽게 걸쳐있지요. 하지만, 그 매력은 내부에 있습니다. 조금은 폐쇄적인 외관과 달리 내부는 한옥의 컨셉을 담아 열린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대청마루의 느낌이랄까요? 한편으로는 다락방 같은 소소한 공간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장소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공간의 시선도 가변적이지요. 작품에 따라 분위기가 다채롭게 변하는 미술관처럼 <공간 사옥>이 미술관으로 활용되는 것은 필연일지도 모릅니다. 김수근은 동료들과 함께 <공간>이라는 종합예술지를 출간했을 때, 창간호의 타이틀을 건축, 도시, 예술이라고 했지요. 건축과 예술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Mermaid>는 <공간 사옥>에 전시된 작품입니다. 이동욱 화가는 특수한 재료를 이용하여 손가락 만한 인간의 나체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섬뜩한 작품도 있지만 그의 작품 형태는 나체의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통조림 캔 속에 절여진 인간, 벌집 속 꿀에 함뿍 적셔진 소녀처럼 말이지요.
저는 <공간 사옥> 안에서 한 인간이 실에 묶인 채 또 다른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팔다리가 묶여 인어로 정의된 인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나)이 대조적으로 다가왔지요. 똑같은 <공간> 안에서 있은 데 누군가는 인어가 되고 누군가는 관찰자가 되는 모순이랄까요? 만약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cctv로 살펴본다면 하나의 공간 속에 다양하게 정의된 인간이 있는 겁니다. 존재는 공간에 따라 규정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공간은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만약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 다시 전공을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건축을 선택했을 것 같아요. 물리적 실체를 다채롭게 구성하면서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도 있는 학문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미술사만큼 재미있는 게 건축사고 현실 생활에도 대단히 밀접하지요. 굳이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아가지 않아도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건물들에는 각각의 사연들을 담고 있지요. 공간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비전공자로써 전문적인 비평은 어렵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나를 둘러싼 이곳을 훨씬 즐겁게 느낄 수 있습니다.
미술과 건축은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시대의 가치관을 공유하기 때문이겠지요? 미술의 흐름을 따라서 건축의 역사도 발달해왔는데, 그 역사를 찬찬히 생각해보면 일련의 흐름이 있는 걸 알게 됩니다.
중세시대 미술의 키워드가 신이었던 것처럼 건축 역시 하늘에 닿으려는 응천성이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고딕 성당들이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지요. 르네상스에 이르러 미술이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것처럼 건물들도 휴먼 사이즈로 축소됩니다. 바로크 시대는 절대왕정의 미술처럼 힘찬 느낌을 주기 위해 장경주의가 유행했습니다. 극적인 장면의 무대처럼 입면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기법이지요. 화려한 오더(기둥)와 지붕들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근대에 이르러 기술의 발달과 개인 공간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가 유행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근대시대에 이미 완성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대 건축의 흐름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요? 그 대답은 최근에 완공된 건물들을 보면 답을 조금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가령 동대문의 DDP를 보면 곡면의 형태를 띤 유기적 건축물의 형태를 많이 나타냅니다.
다만, 유기적 형태는 직각이 아니기에 가구 배치나 시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빌바오에 위치한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복잡한 철골 구조로 카오스적 아름다움을 구현했지만 엄청난 공사비가 들어갔지요. 합리적인 건축이라 보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주위에는 점점 이런 건물들이 많이 생기는 걸까요? 건축은 이제 신과 인간을 넘어 철학의 범주에 들어선 것일까요? 공간은 개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사실,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것인데 우리는 종종 시간의 중요성만 언급합니다. 물리적 실체가 한 사람의 심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간과할 때가 많지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 안에서는 특유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가령, 분위기 좋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면 고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명품 매장에 들어서면 스스로가 부귀해진 느낌이 들잖아요? 내가 그런 기분을 가지려는 것도 아니지만 그 분위기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반대로 편안한 공간에서는 여유로운 마음을 허락합니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면 인간적으로 친근해지는 것처럼요. 결국, 머무는 공간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좌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거대한 건축물이나 화려한 가구에 관심을 가졌나 봅니다.
공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이런 궁금증도 생깁니다. 인류가 공간을 창조하는 것인가, 공간이 인류를 규정하는 것인 지가요. 건물 자체는 사람이 창조합니다만 그 건물은 사람을 종속시킵니다. 지금 앉아 있는 책상은 내가 구성했지만 이 책상은 나의 패턴을 결정하지요. 이는 동양철학에서도 환경(공간)이 나를 주도하는지 여부는 매우 치열한 주제였습니다. 다만 일방적인 건 없습니다. 서로가 적절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환경을 이루는 것이지요. 건축가는 건물에 철학을 투영시켜 공간을 창조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환경을 조성하며 나만의 공간을 이룹니다.
어떤 의미에서 공간은 우리의 복잡한 심정을 3차원으로 그린 그림 같아요. 그림이 화가의 철학을 담듯이 공간은 그 공간에 머무는 이의 철학을 대변하지요. 방에 걸린 그림 하나가 방주인의 캐릭터를 정의하듯 공간은 그 주인의 삶을 설명해줍니다. 내가 머무는 공간이 바로 나 자체라는 말입니다. 당장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책상이 지저분한 법입니다. 마음이 복잡하고 신경 쓸게 많은데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반대로 심경의 변화가 생기면 주변의 환경부터 정리합니다. 남녀가 이별을 하고 나면 커다란 박스를 찾는 건 그런 까닭이겠지요.
물리적 공간이 삶의 동선을 규정한다 해도 무형의 환경 또한 중요합니다. 결국 사람이지요. 인생을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의 환경은 결정됩니다. 내 공간에 누구와 함께하는지 전적으로 자기의 선택이지요. 하기사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환경도 결국 스스로 만든 것 아니겠어요? 스스로 혼자라고 느낀다면 그건 자초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홀로 있는 공간보다 함께하는 공간이 낫습니다. 함께 있더라도 불편한 공간보다는 더불어 행복한 공간이 훨씬 낫습니다.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자 함께 숨 쉬는 곳이지요.
건축가 김수근이 기고했던 많은 글 중에 궁극공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성을 유지하고 표현하는 공간으로 기계적 장치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여백과 달관이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따뜻한 심성이 머무는 곳이지요. 더러운 길목에서 침을 뱉을 수는 있어도 양탄자가 깔린 따뜻한 거실에는 아무도 침 뱉지는 않습니다. 복잡한 교차로에는 머리가 아파도 고요한 뒤뜰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생산공간에는 꿈이 존재할 것이고, 따뜻한 주택공간은 더 편안하고 빨리 돌아오고 싶게 될 겁니다. 그것이 인생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고 나의 공간을 가꾸는 일이지요.
나의 공간을 잘 살피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어차피 인생을 살면서 머무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내 손길과 발길이 스쳐가는 바로 이곳에... 효율적이지만 따뜻한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요. 그게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건축가가 늘 꿈꿔왔던 궁극의 공간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의 공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