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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집에도 봄처럼 손님이 왔다

봄처럼 반갑고, 짧아서 아쉬운

by 최 콩

나의 사촌언니 Y는 미국 조지아주에 살고 있다. 언니는 형부가 미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3년 전부터 미국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는 부활절 봄방학이 일주일 정도 있는데 내가 사는 버지니아 주와 달리 조지아 주는 다음 주가 일주일 봄방학이단다. 언니는 카들 봄방학 맞이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인 워싱턴 DC여행 겸 나와의 만남을 위해 난 주말에 비행기를 타고 우리 집에 방문하게 됐다.


손님맞이 준비


오랜만에 미국에서 맞는 손님 준비로 나는 들떠 있다. 첫날 저녁식사를 우리 집에서 하기로 해서 친한 한국 엄마들께 메뉴 추천을 받았다. 마침 언니네 동네에 미국 마트 트레이더 조스가 없다고 하네. 그럼 잘됐다! 메인 메뉴는 트죠의 korean style beef short ribs(LA 갈비)가 좋겠다.

양념 LA갈비로 한국의 맛을 집에서 쉽게 낼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님이 챙겨주신 도토리 묵 가루로 도토리 묵을 쒀야겠다. 조리법을 검색해 보니, 도토리묵을 만들 때 불 앞에서 손수 휘젓지 않아도 밥통으로 손쉽게 된단다. 오호라! 통의 '만능찜 모드'로 하면 간편하게 다고 하는데 과연 나의 밥통 도토리묵은 공했을까?

만능찜 모드로 돌린 도토리 묵

디어 40분이 지나고 밥통을 열자 내가 본 동영상에서의 묵과 달리 나의 도토리묵은 군데군데 뭉쳐있고 질감은 그야말로 죽사발이 되어있었다. 어쩐다..? 도토리 묵을 살릴 수 있을까? 아니 살려 내야 한다. 다시 불에다가 휘저으면서 15분쯤 저어주니 농도가 전보다 쫀쫀해졌다. 죽에서 푸딩 정도 된 거 같다. 이 정도로 반나절 굳히면 나쁘진 않을 것 같다. 하필 손님이 올 때 베스트 도토리묵이 아니잖아.. 그렇지만 나는 오늘 만남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언니네 가족과 만남은 요리를 경연하는 자리도 아니고, 내 요리 솜씨를 뽐내는 자리도 아니다. 그저 조금은 모자라고 어설퍼도 따뜻하고 편안한 밥 한 끼를 반갑게 나누면 그뿐이다. 양념장만 미리 만들어 놓고 언니네 가족이 오기 직전에 버무리면 도토리 묵도 드디어 완성이다.

밥통 죽사발 여파로 2%부족한 비주얼이지만 이 정도면 합격

손님맞이 꽃은 튤립이 좋겠다. 노란 튤립도 한 다발 구입해 거실과 화장실에 몇 송이씩 꼽아 놔야겠다.

노란 튤립처럼 언니가 온다

부침 전은 과하지 않게 딱 두 종류만 한다. 산적꼬지와 호박전이 좋겠다. 꼬지의 계란물에도 호박의 연노란색에도 봄이 있다.


언니가 오는 토요일 내가 애청하는 한국 라디오 방송 '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입니다.'를 들으며 전을 부치자 부치는 수고로움은 반감되고 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마치 작은 작품을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메인음식들이 모두 준비가 되었고, 랜치 샐러드와 2주 전에 내가 담가 맛없는 김치만 세팅하면 될 거 같다. 드디어 언니가 우리 집에 도착을 했.


핏줄이라 더 그럴까, 애틋한 이 느낌은


언니는 외삼촌의 막내딸이다. 형부와는 사실 그전에 같이 밥을 먹어보거나 이야기를 길게 나눠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날 밥을 함께 먹고 와인을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니 우리 부부와 자주 만난 듯하다. 아이들도 금세 친해진다. 우리에게는 일단 타향살이의 공통점이 있다. 미국에서 살면서 언어, 인종의 벽에 부딪힐 때의 웃픈 일화, 자녀양육의 어려움 등은 서로 깊이 공감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리고 우리는 사촌 지간 아닌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직도 한국 직장에서의 업무를 한국 업무시간에 맞춰 미국 저녁시간에 하고 있는 사촌 언니 Y의 노고가 느껴지면서 타향살이 중인 언니 부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더욱 생겨났다.


뜻밖에 듣는 나의 아버지 이야기


언니에게 뜻밖에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인 어느 해에 언니네 집인 여수에 다니러 간 아빠가 언니에게 " Y야 콩(나)에게 선물할 책 한 권을 골라줄래? 내가 콩에게 네가 선물한 것처럼 이야기할게"라고 하자. 언니는 아빠에게 탈무드를 골라드렸다고 한다. 어릴 적 우리 집에 있었던 흰 표지에 공손한 궁서체의 글씨체로 제목이 쓰여 있던 그 탈무드 책이 이러한 따뜻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책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생 때 언니와 나의 친오빠와 나는 외할머니가 사시는 여수 낭도라는 작은 섬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다. 언니가 기억하는 와 나의 오빠의 일화는 저녁시간 할머니집 아궁이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었는데 오빠와 내가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웠다고 한다. 나는 구운 고구마와 말린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있지만 오빠와 싸웠던 기억은 없었는데, 나도 오빠와 싸우는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우리 애들도 서로 싸운다고 다그치는데 나도 그랬다니.. 하고 웃음이 나왔다.

언니가 그랬다 " 콩아 그래도 너랑 나랑 어렸을 때 할머니댁에서 같이 나눈 추억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만날 수 있고 그런 거 같아" 언니의 이 말은 맞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언니의 야무지고 똑소리 나는 이미지는 어렸을 때 함께 했던 추억에서 왔다. 언니를 끔찍이 아끼셨던 외삼촌과 나를 끔찍이 아끼셨던 아빠에 대한 공통 추억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다.


이별은 아쉽다


반가웠던 주말이 지나가고 언니 가족은 2박 3일의 여행을 마치고 조지아 집으로 돌아갔다. 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아쉽다.

요즘 나는 다 쓴 기름병, 낡은 살림도구를 버릴 때도 불쑥 아쉬운 감정이 드는데 하물며 사람과의 이별은 어떻겠는가? 만남뒤에 느껴지는 주중 일상의 헛헛함은 유독 외롭게 다가온다.


아참! 망친(?) 도토리묵은 어떻게 되었을까? 트죠 LA 갈비보다 인기가 많아 그날 저녁 2차 앵콜 끝에 완판이 되었다는 후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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