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vefaith Feb 28. 2017

자기 앞의 생,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소네트>

어찌 살아야 좋냐고 물으시거든, 입을 여는 맑은 눈의 할아버지 피아니스트

  사람들 누구나 편견을 갖고 있겠지만, 내 편견 중 하나는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 다들 한 번씩은 들려본다는 피아노학원에서 나는 진도가 생각보다 느리게 나가면 지루해하고 조급해했고, 음악이론은 특히 너무 딱딱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해서 배우기 싫어서 도망다녔다. 그랬다. 같은 예술 영역에 속해이는 미술과 비교했을 때 미술이 더 자유롭고 음악은 너무 제약이 많아서 갑갑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근거도 없지만 느낌상 담아둔 그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악보가 무서웠다. 즐겁게 연주를 하고 싶은데 엄청나게 빽빽한 시험지가 있는 기분이었다. 박자를 잘못 세면, 손가락이 틀리면, 악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하나씩 줄이 그어지는 시험지.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음악을 배우려고 치면 그 '콩나물 대가리'를 모르는게 걱정이라, 너무 어려울 것 같다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괜히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결국 중요한 건 마음과 감정, 느낌이 아닌가 하면서. 기교와 둘을 분리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음악을 하는데는 Feel, Passion, Soul만 있으면 된다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때야 뭐야 그게 하면서 피식했지만 사실 나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내가 음악을, 악보를 대하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 인생을 대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악보처럼 너무나 두려운 것들이 앞에 있으면 잘 해내야지 노력을 하면서도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히면 한참을 도망가 있다가 돌아오는 모습이. 왜 다른 사람처럼 악기가 왜 안불리는 건지, 다른 일을 할 때도 왜 실력이 늘지 않는건지 혼자 전전긍긍 조급해하는 모습이. 덜렁덜렁 거리면서 사소하게 실수하고 놓치는 일상만큼이나 '악보대로' 연주하기는 커녕 내 느낌에 따라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는 모습이. 마음은 조급하고, 욕심은 많고, 노력은 그에 비해 부족하고. 일희일비하고. 실수가 많은게 너무나 비슷했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꽤나 구제불능 같기도 하다.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누군가의 리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인생지침서라는 문구를 보고 얼른 보았다. 그 때는 밀물처럼 몰려오는 것들 때문에 어디에서라도 답을 찾고 싶은 것들이 많을 때였다. 이 영화를 조금 더 먼저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만큼 좋았다. 마구마구 주변 사람들에게 얼른 보라고 했을 만큼. 영화 초반부터 그는 내게 답을 던져주었다. '피아노를 정복했다'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그는 영화의 첫 시작부터 옥타브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면서 실수를 한다. 아무 실수 없이 연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잘 안되는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결국은 그 길로 찾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모든게 드러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처음 시작에서의 그의 노력이 마디마디 숨겨진 멋진 연주로 끝난다. 다른 사람들은 잔잔하게 줄어드는 곡의 마무리를 그는 마지막까지 힘있게, 오히려 더 강하게 연주한다. 그 곡에 대한 해석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모습이 투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놓치지 않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라고.

  세이모어의 눈빛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왠지 모르게 평화롭고 균형잡혔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면 그 역시 복잡한 사연이 남다른 분이다. 너무나 피아노가 치고 싶었고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들으면서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던 한 어린아이가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사랑과 집착 사이에 있는 아주 대단한 후원자를 두어서 정말 분에 넘치게 받아보기도 했고, 연주회를 거듭하면서 엄청난 찬사를 받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성공한 인생'의 소유자이다. 별안간 그는 아주 성공적으로 연주회를 끝내고 나서는 다시는 대중 앞에서 연주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늘 연주회장에서 불안했고, 기억력은 감퇴됐고, 무대가 늘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아끼는 멋진 피아노가 있는 아담한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 후에야 그는 스스로의 삶에서 행복을 찾게 되었다.

    삐딱하게 보자면 그래 가질 거 다 가져보고, 해볼 거 다 해보았기에 이제는 후진을 양성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코스인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왜 연주회를 그만두었는지, 음악가로서의 책임성을 놓친 건 아닌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심지어 그의 제자 중 한 사람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도피하는 건 아닌가 하면서. 어쩌면 연로한 스승이 이제 지쳤으려니 하면서. 그만큼 세이모어의 선택에 대해서는 어차피 생각이 갈릴 것이다. 그가 자신을 찾고 자신의 음악에 집중하는 방식이 가볍게 혼자로 돌아가는 것이었을 뿐, 다른 모두가 같은 방법을 선택할 필요도 없다. 세이모어가 말하듯 음악은 인생과 같다고 본다면, 수천 수백가지의 음악과 인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모든 것의 질서, 불확실함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질서를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인생과 그의 음악의 정의가 맞닿아 있듯이, 누구나 그 어떤 정의를 내리냐에 따라서 그의 음악도, 인생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화가  인생지침서라는 말이 맞다. 불협화음이 있기에 화음이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들린다는 말, 음악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갈등이 없고 문제가 없으면 해답을 찾았을 때의 기쁨과 평화로움 역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꼭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이런 어록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은 피아노로 들려주는 음악이라는 말을 가만히 듣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정답이다. 그러면 아마 우리가 오해하거나 불통이라는 이유로 다투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테니! 또 세이모어를 영상에 담으며 감독이자 배우, 소설가인 에단 호크의 고민 또한 한 몫한다. 배우인데 왜 무대는 두려웠던건지. 왜 이 일을 하는지, 나를 위한 삶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경제적인 부와 정신적인 만족 사이의 괴리는 왜 일어나곤 하는지. 평생을 담고 갈 질문을 그가 던지기 때문이다. 그는 세이모어를 통해 고민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밝히는데 그는 질문을 던질 때는 너무나 명확한데 비해 세이모어가 툭 던지는 질문들에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게 꼭 나같고, 우리같다. 고민이 뭔지는 알겠는데 말도, 발걸음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 똑 닮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만 그런게 아닌가보다.  

  우습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이런 고민을 했는데 에단 호크처럼 나도 고민의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그 답을 찾는게 좀 느려진다고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리고 숨어있던 나만의 인생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답을 금방 찾을 수 있었으면 뭐 인생 다 살았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쩌면 그게 우리 앞에 놓여진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안한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묻어두면 어느새 빼꼼 다시 고개를 내밀고. 새삼 깨달았는데 내가 바라는 내 인생은 폼나는 인생, 폼생폼사인 인생이다. 그냥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겉만 번지지르하고 속은 텅빈게 아닌 표면적인 폼이 아니라, 운동선수의 자세인 폼, 마음자세라는 내면적인 폼의 의미를 더해서. 다른 모든 것은 놓쳐도 끊임없이 그 폼은 놓치지 않는다면 폼나는 인생도 음악에 언젠가는 가까워지지 않을까하면서. 내가 재능이 있는지, 이걸로 돈을 잘 벌고 먹고 살 수 있는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서 내가 좋아하고 행복한 것을 돌이켜보면, 세이모어에게 피아노가 있듯이, 나에겐 말하고 글을 쓰는 일이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추어같다고 해도 좋다. 그냥 내가 속 시원하고 어느 날 말이 잘되고 글이 잘 써지는 것 같은 날 내가 기분이 좋으면 된 것이다. 그러니 잘하는 게 하나도 없고,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 동굴 속으로 숨고 싶을 때마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답이 툭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잘하고 좋아하는 게 없는게 아니라 몰랐거나, 모른 척했거나,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직 내가 연주하는 음악도, 인생도 심심하고 밋밋하다.  다시 말하면 아직 채워야 할 빈 공간이 많다는 것이니 앞으로에 달린 것이다. 대단한 인생지침도 아니고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지만 그래도 수많은 회의감이 휘몰아칠 때마다 아이처럼 피아노를 좋아하면서도 단단한 강인함이 있는 이 멋진 할아버지를 찾게 될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밋밋함 속에 꼭꼭 숨어있는 반짝거림을 찾을 수 있게, 콩나물 대가리가 빽빽하고 가득한 악보만큼 어려움이 가득할 인생을 좀 더 잘 마주할 수 있게, 악보에 쓰여있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들처럼 인생에서 옛다 던져주지 않아도 알아가는 것들이 더 많아질 수 있게.  그러면 이 멋진 할아버지는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해주시겠지. 포근하고 힘있게.

매거진의 이전글 너를 기다리는 동안,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