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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Feb 08. 2018

넌 쉽게 말했지만


  음악에 몸 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흘러가는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게 좋은 날이 있다. 록키의 주인공에게 테마곡이 있듯이, 우리의 하루를 더 빛나도록 조명도 되고, 따뜻한 아랫목같은 존재가 되는 음악이 있다. 매일 먹는 밥맛이 기분따라 다르듯, 늘 알던 음악이 다르게 들리는 날이 있다. 가사가 와닿거나 멜로디에 사로잡히거나. 수능금지곡이라고 불릴만큼 중독성이 강한 곡이 있다. 나에게도 나만의 금지곡이 있다. 시험을 볼 때도 머릿속에 그 노래를 계속 틀어놓고 들으며 보고야 말기도 했다. 별 수 없다. 도무지 멈춰지지 않았는 걸. 그나마 배경 음악처럼 틀어놓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요즘 듣지 않고도 저절로 울려퍼지는 노래는 윤상의 '넌 쉽게 말했지만'. 유투브에서 우연히 듣게 된 윤상의 2집 PART 1 수록곡이다. 멜로디에 한번, 시간이 지날수록 가사때문에 계속 입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숨기려 해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사이, 어느 관계가 틀어지는 건 그 한 순간의 깨달음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늘 하던 말이었는데 진심보다는 의무감 혹은 습관처럼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갑자기 떠오른 적이 없었다. 그 말이 그렇게 퇴색되었다는 생각을 처음 한 뒤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익숙하다못해 지겨워질 수도 있는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그 말마저 그렇게 들리기 시작할 줄이야.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형을 쓰고 있었다. 너에게 정말 빠졌었다고. 정말 그런 줄은 몰랐을 거라고. 그러나 상대방이 나를 아주 많이 좋아했던 과거보다 피부로 와닿는 것은 과거형이었다. 나는 묻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럼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거네. 


  탓할 게 없는게 나의 마음도 꽤나 변해 있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그 시간, 모든 사이는 매혹적이다. 비슷한 점을 발견하면 남모를 공통점이 생긴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색다른 면을 알아가면 새로운 서랍장이라도 만난 양 들뜨기 마련이다. 알아가는 순간은 그랬다. 여전히 연락이 오면 기분이 좋다.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눠도 기분이 좋다. 그러나 한 켠으론 나 역시 과거에 비해선 상대방에게 푹 빠졌던 그 시간보다는 덤덤해졌다.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인가. 가라앉고 흔들린다. 익숙함에 속아 당신을 잃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나에게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제 날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는구나, 상대에게 묻기에는 그러는 너는? 이라고 반문당한다면. 나는 똑같다며 당연히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이 사이가 지겨울 때가 없었다고. 더 이상 당신이 예전처럼 궁금하지 않다고. 그렇다고 당신이 싫어진 건 아닌데. 근데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이게 그 놈의 징한 정일까. 나는 먼저 가볍게 이별을 고했다. 이별이란 말은 거창하고 거리를 두자는 거였다. 우린 대단한 사이가 아니니까. 사실 내가 그에게 좀 덜 기대고 마음을 덜 주고 싶었을 뿐이다. 상대방은 되려 아쉬워했다. 그래도 그렇게 느껴진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서로 갈 길을 가는 거냐며 물었다. 응, 나는 그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사실은 상처받기 싫은 얄팍한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걸 절감했다. 더 이상 나를 궁금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습관처럼 던지는 말에 바보같이 속고 싶지 않아서, 나는 나의 삶에서 그를 지워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매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마음만큼 부담스러운 게 없으니까. 어떤 사이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진심이면서도 거짓이었다. 어느 꿈에 나온 그가 반가워 인사를 하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아무런 사이였고, 그에겐 아주 좋은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돌아선 그는 그 사람에겐 나에게 하던 것만큼이나 맑게 웃고 있었다. 돌아나오는 길에 계단에서 넘어졌는데도 꿈이라 아프지 않았다. 꿈을 깨고도 남아있는 건 혼란스러운 마음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도 예전엔 내가 꿈에 나왔다고 했었는데. 이런 기분 느껴봤을까.


  그는 쉽게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만나볼래?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흔쾌히 만나보겠다고 했다. 좋아. 네가 추천하는 사람이라면야. 그는 쉽게 그 말이 취소라며 만나지 말라고 했다. 질투심을 유발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왜? 라고 묻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쉽게 말한 말에 무너지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예전같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다른 이들은 못됐다고 말해도 나에게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기회가 다시 주어져도 그를 만난 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전개가 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쉽진 않다. 우물쭈물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처음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었겠지. 가볍게 던진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과거의 빛나던 순간들을 보물처럼 꺼내보면서. 못볼 사이는 아니니까 이따금 마주치겠지. 서로의 자리에서. 놓기로 결심했는데도 어제는 길을 걷다 갑자기 보고 싶었다. 일이다. 그래도 놓는 게 맞겠지.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좋아하지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함께 할 수 없으니까. 


   그러고도 결심과 번복을 반복했다. 그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나. 그래도 예전보다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 생각도 덜 나고 끝도, 변한 마음도, 흘러버린 시간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운동이 끝나고 쉬는 시간 나즈막히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들었던 보이스코리아의 이재원도 아니고, 아이유도, 조원선의 버전도 아닌 윤상의 노래로. 얄밉게도 다시 그가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뭐 그럼 어떤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지 못하란 법도 없는데. 생각하다보면 결국엔 정리가 된다. 이 노래를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까지 생각이 미치면. 노랫말을 되감다보면 넘어가지 못하고 귓가에 감기는 그 구절 하나로.  

숨기려 해도 느낄 수 있잖아. 




어젯밤 네가 나에게 말하던
그런 이유가 전부였다면
이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꺼야
숨기려 해도 느낄 수 있잖아
이미 사라진 너의 웃음을
말을 할수록 변명처럼 느껴지는 걸
우리 이제
그저 이대로 너를 지워야 하나
사랑하지 않아
처음부터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
아이처럼 맑은 너의 미소를 보며
사랑을 느낄 수 있었지
그런 말이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그 차가운 너의 눈빛도


- 넌 쉽게 말했지만, 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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