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답 없는 사람이 잊을만 하면 떠오르는 이유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꽤나 오래된 영화를 드디어 보게 되었다. 전도연과 하정우라는 정말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온 영화 <멋진 하루>. 아껴두려고 한 영화는 아닌데 그 때 보지 않고 지금 두었다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영화. 그렇지 않았다면 알다가도 모를 묘한 영화라며 좋아했겠지만 지금 느끼는 것들은 덜 했을 것이다.
여기 이상한 전여친이 있다. 왜 있잖나. 달밤에 자니? 잘 지냈어? 이런 센치 감성 연락하는 전여친 말고. 돈 갚으라는 채권자 전여친이다. 어느 날 갑자기 1년 전에 빌려준 돈 350만원을 갚으라면서 전남친 조병운(하정우)를 찾아온 김희수(전도연). 병운은 걱정말고 돈을 주겠다고 하더니 지금 당장 그 돈이 없어서 돈을 갚기 위해 또 다시 돈을 빌리러 다닌다. 포스터에서는 희수의 화장이 진하지 않은데 오랜만에 병운을 만나러 온 그 하루종일 그녀의 화장은 일부러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사람 혹은 강해 보이고 싶은 사람처럼 짙은 스모키 화장이다.(물론 그마저도 잘 어울린다) 본인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갑자기 그를 찾아가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자신의 행동이 맥락이 전혀 없었다는 걸. 누가 얘기했듯이 그래 먹고 살기 힘든 것도 아니고 얘기해서 시간을 줬다가 받으면 되지. 아니면 그냥 줬다고 생각해버리면 될 수도 있는 돈 350만원을 기어코 눈 앞에서 찾겠다는 그녀 자신도 한편으론 찌질해보일 수 있다는 걸. 희수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사실 그게 더 이상하다. 그래도 다시 볼 정도면 아주 나쁘게 헤어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숨기고 싶은 게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지도.
이상한 걸로 치자면 전남친 병운도 한수위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희수에게 당당하고 반가울 수 있을까. 근거없는 자신감 같기도 하고. 지금 당장 350만원이 없어 줄 수가 없어 돈을 이 사람 저 사람(대체로 여자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데 민망해하지 않는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넉넉하지 않은 이혼녀 동창, 잘 나가는 성매매 여성, 알 수 없는 여자 사업가, 병운의 뒷담화를 쉬이 늘어놓는 그의 친척형, 대학 때 만났던 후배와 그녀의 이상한 남편. 개인적으로 정말 민망했을 것 같은 순간은 그 남편이 자신의 아내와 사귀었는지, 잤는지 물어보았을 때였는데 그 때도 그는 잘 넘어간다. 속도 없는 놈이라고 말할 만큼. 각자대상에게 맞춰서 이렇게 돈을 받아내는데 미안해하지는 않는다.
그가 희수를 반갑게 맞이하는 건 또 어떤가. 그가 희수를 대하는 것을 보면 희수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전여친의 이미지는 아니다. 한 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 가능하면 얼굴을 피하고 싶은, 어쩌다 마주치고 나면 괜히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는 희수를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처럼 당황스러운 만남에서도 반가움에 안부를 묻고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물론 처음엔 그녀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거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나.
병운은 찌질하다. 하지만 얼었던 희수도, 어이없어하던 관객도 조심스레 미소를 짓게 하는 매력이 있다. 저렇게 당당하고 여유로운 채무자라니. 상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채무자란 이유로 쭈굴쭈굴하게 석고대죄할 것처럼 몸을 배배 꼬고 있을 필요는 없다. 채무는 채무고, 사람은 사람이니까. 돈이 없는 것 뿐이지 사람이 없어보이는 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다. 그는 즐겁고 유쾌한 만담같은 입담과 개구쟁이 같은 표정의 소유자다. 속을 알 수 없다가 싶으면서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는 말과 행동이 탁탁 꽃힌다. 자신이 잘못했으니 저리 가있겠다면서 자연스레 얼굴이 보이는 버스 맞은 편에서 웃어보이는 그의 모습. 희수의 변함없는 까칠함이 좋다는 말. 그녀가 자신을 떠났을 때는 원래 그런 적이 별로 없는데 약간 마음이 아팠다는 말. 지하철에서 표도르가 꿈에 나왔는데 힘들지 않냐는 표도르의 질문에 너가 있어서 괜찮다고 답했다는 말. 희수가 왼쪽얼굴을 좋아해서 왼쪽에만 서있었다는 말. 그녀의 고장난 자동차 와이퍼를 몰래 고치고 오는 행동.
병운은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이렇게 찌질하고 한심해보인다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라' 하면서 정말 어떻게든 되게 한다. 그 어려운 350만원 하루만에 모으기 퀘스트를 해내는 사람.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하지 않으리란 단단한 확신이 있는 사람. 여전히 스페인에서 막걸리를 팔겠다는 꿈을 늘 꾸는 사람. 쓰고나니 약간 돈키호테 이미지랑 비슷한 것도 같다. 이러니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건 영화의 제목이 '멋진 하루'인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들의 기묘한 하루를 '멋진 하루'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여유롭고 따스한 시선으로 좇아가고 소리를 담는다 . 누가 잘했네 누가 잘못했네 이런 판단은 없다. 재간둥이같은 클라리넷 소리, 포근한 트럼펫 소리가 그들이 함께 길을 걷고 차로 움직이는 동안 울려퍼진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 '애증'의 병운과 시종일관 까칠하게 톡톡 쏴붙이던 희수. 지난 1년동안 둘이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는 영화의 중후반이 지나면서 하나둘 드러나게 된다. 가령 350만원의 속사정. 사실은 병운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350만원을 빌려주게 된 것이었다. 희수는 그와 헤어지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도 갑자기 사정이 어려워져 결혼을 못 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몰랐을 지금의 사정. 병운은 사업하다 집안 돈도 다 날리고 심지어 전세금까지 날려먹은 노숙자다. 희수와 헤어지고 금방 병운은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다. 경제적 사정에 힘들어하는 아내가 떠나려 하자 붙잡지 않고 보내준 것이다. 1년 전엔 설명하지 못했던 차가운 벽을 살그머니 녹여버리는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그런 멋진 하루인 것이다.
희수가 사실은 결혼을 하지 못한게 아니라는 말, 병운이 그저 아내가 떠난다고 했다고 보내주었다는 면만 합쳐보더라도 둘에겐 여전히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애초에 희수의 행색을 보라. 새 차에 새 핸드폰, 새 네비까지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은 상대가 경제적 사정 때문에 못한 게 아니라 병운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안 한거다. 병운이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같이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가 아내를 생각한 마음은 떠난다고 했을 때 붙잡지 않을 만큼이었던 것이다. 희수였다면 그렇게 쉽게 보내줬을까. 왼쪽 얼굴이며 희수가 좋아하던 갈치조림집이며 그녀가 좋아하던 것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딱 알맞게 끝난 것 같다. 헤어지려는 희수를 굳이 여러 번 붙잡지 않는 병운, 차를 돌렸다가 병운의 쓸쓸한 발걸음이 샹그리아 시음회에 있는 걸 보고 미소지으며 다시 돌아가는 희수. 돈을 빌리러 다닐 때 누군가 희수에게 '상황에 따라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물병자리라면서 병운과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다. 있다가도 없는 게 돈이라지만 돈이 없으면 그녀는 남자와 헤어졌다. 하지만 희수 자신이 말했듯이 그녀는 사람을 '잘못' 만났다. 어찌 다시 찾지 않을 수 있을까. 희수가 기껏 350만원을 다 채울 때쯤 굳이 20만원과 기타 등등의 여분의 돈을 남겨두고 다시 병운에게 차용증을 남겨둔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알면서도 다시 떠오르는 그 은근함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