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작가를 들어봤지만 글은 처음 접해보았다. 어려운 책이었다. 오랜만에 책을 읽어서인지, 내용 혹은 표현이 어려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쉽사리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리뷰를 쓰니 책을 읽을 때는 놓쳤던 제목이 들어온다. 짧게 생각하면 음악이면 선율이고 문학이면 서술일 텐데 왜 짝을 바꿔놓았을까. 읽는 과정을 생각하면 제목이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책의 전반부는 그가 고른 문학을, 후반부는 음악을 주제로 이야기와 해석을 다루고 있다. 문학을 다룬 전반부를 소리 내어 읽었을 때 글이 편하고 멋이 잘 느껴졌다. 음악을 다룬 부분은 눈으로만 읽어도 술술 넘어갔으니,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그럴듯했다. 가볍게 비유하자면 그런 것 아니겠나. 글은 음악처럼, 음악은 글처럼.
아는 게 많을수록 재밌는 책이 될 것이다. 문학 평론이나 음악사 강의같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게 세헤라자데 이야기를 제외하고 보르헤스, 마르케스 등 등장한 작가들과 작품들을 위화 본인만큼은커녕 거의 몰랐다. 잘 모르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두 번은 "뭐라고? 다시 한번 설명해줘"라고 하지만 여러 번 반복되면 "그런가 보다"하며 고개를 끄덕이며도 속으로는 열심히 무슨 말인지 파악하려 애쓰게 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랬다. 그가 다룬 문학과 음악과 좀 더 익숙했다면 "오, 이 사람 뭘 좀 아는군. 심상치 않은데? 대박이다" 하면서 푹 빠져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속상하진 않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다. 번역가 역시 '난해한 동시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 역시 위화라는 믿음직한 안내자를 따라 탁월한 작가와 위대한 작곡가를 두루 만나 뿌듯하다고 했다. 어렵고, 뿌듯하고, 알수록 재밌는 책. 후루룩 빠르게 읽을 생각이라면 책이 도와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유 있게 읽어봄직하다.
책을 읽을 때 잠깐 멈칫하면서 곱씹게 하는 글귀가 있으면 기분이 좋다. 나의 흐릿한 느낌을 명확하게 표현해서 그래, 이거다! 싶은 문구라서, 혹은 그저 문장이 좋을 때도 있고. 이 책에서도 책을 군데군데 접어놨다. 그 재미가 없으면 책을 읽는 재미가 줄어들 것이다.
감동과 영감
위화가 좋은 작품을 감상할 때, 좋은 작품을 창작할 때 느낀 감정의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전자를 감동의 여운이라고 하면, 후자는 영감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만 있어도 이따금씩 생각나는데 좋아하는 작품이 생기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는 건 확실하다. 작게는 취향이 생긴 것이고 때로는 살아가고 생각하는 방식까지 바꿔버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는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게 끌려 들어간다. (중략) 따스하면서 온갖 감정이 뒤섞이는 여정이다. 그들은 나를 이끌어준 뒤 돌아갈 때는 혼자 가라며 등을 떠민다. 돌아온 뒤에야 나는 그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 뭔가를 쓰고 싶을 때 그 사람과 그 가 드러내려는 주제 사이에는 서로를 제약하는 일종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지. 창작자는 어떻게든 주제를 탐구하려 하고 주제는 온갖 장애물을 만들기 때문이라네. 그러다 때때로 모든 장벽이 일시에 사라지고 모순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전에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 벌어지곤 해. 그럴 때야말로 창작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느껴지지. (중략) 마르케스는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영감이라네"라고 덧붙였다." - p. 338
위대한 작품이 우리를 이끌어준다는 의미는 동의하지만 등을 떠민다는 표현만큼은 조금 아쉬웠다. 등을 떠민다고 하면 매정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그들이 그리 매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접하고 나서 그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 여정이 그리워 다시 찾아가곤 한다. 같은 여행지를 여러 번 찾듯이. 읽었던 작품을 다시 손에 꺼내 들고 시간을 들여 읽고 다시 그들의 이야기와, 목소리, 세상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지겨워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우리를 매번 작품 속으로 이끌어주지 않나. 그들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아마 내가 더 좋아하는 마음이 크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작품엔 좋아하는 마음도, 팬도 많다. 책을 덮을 때쯤 우리는 수많은 기분에 휩싸여 있지만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그저 끝일 뿐이라며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 보면 알지 않겠나. 등을 떠미는 듯한 퉁명스러운 작별마저도 따스한 배웅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영감은 내 입장에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술술 풀리는 것'이다. 감상문의 경우 특별하게 구조를 짜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이지 모르고 글을 시작할 때도 있는데 머뭇거리지 않고도 그 말이 막힘없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땐 나중에 읽어봐도 일단 내 마음에는 쏙 든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판단할지 몰라도, 그럴 때 글을 쓰는 게 즐겁다. 왜 쓰냐고 물으면 그저 웃지요! 매번 이렇게만 써졌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많진 않더라도 감사한 일이다.
서술의 힘
'우리는 늘 서술에서 가장 빛나는 단락, 이를테면 뜻밖의 놀라움을 선사하거나 신묘한 매력으로 유혹하는 단락에 빠져든다. 그런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이런 화려한 글과 클라이맥스 및 결말의 글들이, 아름드리 거목도 작은 뿌리털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사실은 작고 담백한 디테일, 국왕의 손짓 같은 묘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 p.110
'사람들은 성공이나 실패를 맛본 뒤 과거를 뒤돌아보다가 과거의 평범한 선택, 심지어 아무 의미 없는 행동 때문에 운명이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중략)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들에서 왜 무의미해 보이는 작은 일로 클라이맥스의 운명이 좌지우지될까? 나는 인생의 경험과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의 경험을 결정짓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 p. 114
'솔직히 내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준비한 내용보다 두 배는 길어진 것 같다. 왜 그런지는 잘 알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 도스토옙스키, 스탕달의 문장을 되짚어볼 때면 그들의 엄청나게 풍부한 서술에 붙들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중략) 나는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서술의 힘이다. 느낌을 드러내든 생각을 드러내든 작가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된다.' - p.143
마지막 인용구를 읽을 때쯤엔 현실 웃음이 터졌다. 솔직히 내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는 머쓱함과 예상보다 길어진 글을 또 서술과 엮어내는 유연함 덕분에, 또 '작가'라는 말 뒤에 숨어있던 위화라는 사람이 엿보였기 때문이고 나 역시 글이 생각보다 잘 길어지는 점만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필력의 여부를 좋아하는 소재에 대해선 할 말 많고 쓸 말 많은 사람의 공감이라 하자.
은근슬쩍 서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 문구를 보고 생각보다 서술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글이 무엇일지 고민을 하지만 정확히 어느 곳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요즘은 글을 풀어내는 것보다 소재나 생각이 새로울 순 없을까를 더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상 순위를 매기긴 힘들다. 좋은 글에 레시피가 있다면 들어갈 게 한두 가지인가. 촘촘한 구성, 진정성, 매력적인 표현이나 등장인물, 참신한 소재와 전개 같은 구하기 어려운 재료가 잔뜩이다.
좋은 글이라고 모두 완벽하게 좋은 재료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들이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원인으로 위화는 서술의 힘을 강조했다. 큰 틀은 멋있더라도 용두사미처럼 끝나지 않게 할 버팀목으로 작고 담백한 디테일을 들었다. 당연한 것은 생략했다가 중요한 변화가 있을 때 언급해도 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꼭 돌직구로 알려줄 필요도 없다. 잘 드러내지 않다가 갑자기 그의 변화를 툭 보여주거나, 그의 심리를 보여주기 위해 신체 반응이나 행동을 보여주는 방법 등. 손에 쥔 패가 비슷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보여주냐는 그 손에, 손끝을 움직이는 머리와 마음에 달린 것처럼. 글이 스스로 살아남아 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원동력이 되리란 건 확실하다. 어떻게 내가 이 힘을 갖느냐는 고민 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좋은 건 알지만 이 좋은 걸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든단 말인가. 다만 느낌 가는 대로만 쓸 수는 없으리란 것만 확실하다. 한 번에 쓴 것처럼 보여도 실은 수많은 고민이 서술의 힘을 만들었을 것이다.
서술의 힘은 꽤나 강력하다면서 뜬금없고 별것 아닌 일로 글의 결말이 정해진다니! 생각보다 서술의 힘은 대단치 않은 걸까? 기껏 잘 풀어두었더니 별일 아닌 일로 허무하게 마침표를 찍다니. 위화는 우리의 인생과 역사가 그러하듯 글도 그런 것이라 답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고 사는 2회 차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뜬금없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은 지극히 지금의 시점이다. 글에서는 그 일로 결말이 나버리는 걸 빨리 확인할 수 있지만 인생과 역사는 아직 결말이 났다고 하기 어렵다. 당장은 결말이 난 것 같아도 언젠간 다른 시작과 결말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많다. 서술이 꼭 그 사건에 휘둘린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 서술이 그 사건을 결말로 이어지게 하는 손길이 되어 뜬금없고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주기도 하니까. 그저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던 것을 디테일을 쌓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서술의 힘이 아닐까.
문학과 음악, 선율과 서술, 그리고 사람
'사실 보수냐 급진이냐는 어떤 한 시대의 견해일 뿐, 애당초 음악의 견해가 아니다 어떤 시대에든 끝이 있기 때문에 시대와 관련된 견해 역시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음악에는 무슨 보수적 음악이나 급진적 음악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음악은 각각의 시대와 다양한 국가 및 민족의 사람들, 다채로운 경력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와 다양한 인식에서 출발해 나름의 입장과 각양각색의 형식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똑같은 정성을 기울여 창조해왔다. 따라서 음악에는 서술의 존재만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없다. (중략)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음악 속 모든 형식의 서술을 연주할 수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음악사의 분쟁을 연주할 수는 없다.' p.267-269
'이것이 음악, 혹은 서술 작품의 개방성이다. 칭찬과 비난이 같은 이유에서 나오기 때문에 무엇을 칭찬하고 비난하는가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은 길이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저 지나갈 뿐이다. 멘델스존이 바흐에게 감탄하고 베를리오즈에게 실망한 것은 사실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음악적 이해를 옹호하고 그 이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에 불과하다.' p.314
'음악의 역량은 음악 자체, 즉 내면의 역량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러한 역량은 작곡가 자신의 변화 및 그들이 처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며 그 시대와 가장 근접한 수단을 취합니다. 오직 수단만 바뀔 뿐이지요. 작곡가라는 세 글자 앞에 붙는 말은 무엇이든 사족입니다.' p.395-396
문학과 서술의 힘은 어느 정도 알겠다 싶을 때쯤 음악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화가 말한 '서술의 개방성'은 서술은 서술일 뿐 문학이든 음악이든 스스로를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문학 작품에서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서술이라면 음악에서는 악보에 표현한 선율과 구성, 표현 모든 것이 서술이 된다. 문학사든 음악사는 시대마다, 사람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른 건 애초에 명확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말하든 완벽하게 맞거나 틀린 이야기도 없다. 유투브에만 봐도 같은 노래를 부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너도 나도 나는 A가 최고다, 아니다 B가 최고다, 클래식이든 재즈든 장르마다 자신의 1순위와 취향을 고집하는 댓글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서술을 둘러싼 분쟁이 문학과 음악에 속한 '그 분야 사람들'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수많은 분쟁은 작품에 드러나지 않고 알고 보면 재밌는 사실로 뒤에 숨어 있다. 읽을 사람은 읽고, 연주할 사람은 연주하고, 들을 사람은 그저 듣는다. 책과 악보가 그저 그렇게 있듯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알고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얻기도 했다. 관심 있던 작가인 카프카와 <성>에 대한 해석. 카프카가 정말 듣도 보도 못하게 짠하고 나타난 작가라고 평가받는 점(특별히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확실히 눈에 띄진 않는다 한다), 그런 작품을 쓴 와중에 사람으로서의 그는 사람들을 비관적으로 보며 혼자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 표현이 화려하고 절절한 당시의 추세에 따르지 않고 지루하다는 평을 들으면서도 21년간 자신의 '보수적'인 색채를 간직한 브람스의 이야기. 갑자기 음악에 꽂혀 몇 달 만에 300장의 음반을 사고 들으면서 자신만의 음악 취향을 논하게 된 위화의 이야기.
서술 작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목석처럼 말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 말 없는 음악과 문학 때문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하고 또다시 작품을 만들어내고, 각자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서술의 힘도, 서술 작품의 개방성도, 문학에서 선율을 느끼고, 음악에서 서술을 말하는 것도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빙빙 돌아 결국은 사람으로 돌아왔다. 내게 남은 거라곤 음악과 문학을 사랑한다는 건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한 마디뿐이다.
아, 가장 좋았던 문구를 활용해서 마무리해보자. 솔직히 나도 내 글이 이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할 말이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길어진 것 같다. 왜 그런지도 잘 알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 도스토옙스키, 스탕달의 문장을 되짚고 브람스, 차이콥스키, 멘델스존의 음악을 다룬 위화의 글을 보면 그의 엄청나게 풍부한 서술에 붙들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모양이다. 나 역시 그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문학과 음악, 선율과 서술, 그리고 사람의 힘이다.
* 이 리뷰는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ARTinsight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