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vefaith Jul 18. 2021

영화<랑종> 속절없는 질주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랑종>은 물타기가 많은 영화였다. 무섭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각종 설정이 필요한지도 논란이 많았다. 곡성과 비교하는 점도 관전 포인트였고. 빈 수레가 요란한 느낌이면서도 동시에 차곡차곡 쌓이는 입소문 같기도 해서 직접 보고 왔다. 경험하지 않고 누군가의 의견에 올라타고 싶지 않았다. 놀랍게도 저 모든 물타기가 가능한 영화였다.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은 장르의 특성, 촬영 기법, 내용 전개다. 곡성의 전사라고 알려진 시점에서 곡성과의 비교는 불가피해졌다. 미스터리 스릴러보다는 공포 영화라고 보면 랑종을 보려고 하는 고민이 가벼워질 수도 있다. 엄청난 쫄보지만 언제 무서워질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후반부는 알아서 자체적으로 가리고 봤다. 페이크 다큐나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된 영화에 몰입하는 게 어렵지 않은지 여부도 중요하다. 내용과 별개로 시야가 어지러워서 힘든 부분도 있었다. 내용은 알쏭달쏭하고 모호한 부분이 많지 않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폭 역시 좁은 편이다. 그럼에도 곱씹어 볼 부분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고통받기 때문에 영화를 본 직후에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막상 조금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의문점이 생겼다. 랑종은 인과가 뚜렷하다. 곡성에서 일광은 종구에게 뭐가 걸릴지도 모르고 낚시를 한 미끼를 물어버린 거라고 하지 않았나? 랑종은 노리고 던진 미끼가 정확히 걸렸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 관객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는 있다.


단순하게 보자면 영화의 비극은 누적된 업보를 물려받은 연좌제 때문이었다. 평범해 보였지만 반전이 많은 집안이었다. 언니 노이가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쓴 술수에 님이 랑종이 된 점과 왠지 모르게 단명한다는 밍의 친가 쪽 사람들의 화려한 전력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들에게 돌로 맞아 죽기도 하고, 보험금을 노리고 공장을 불냈다가 들켜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섣불리 흘려 넘기기 힘들다. 초반에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설마 공장 사람들은 다 내보내고 불을 질렀겠지? 사람들은 다치게는 하지 않았겠지 싶었는데, 그 부분이 딱 걸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나쁜 사람이었잖아.


곡성이 그랬듯 이야기가 주는 메세지의 결은 비슷하다. 인생은 절망, 생은 고통. 선은 생각보다 큰 힘이 없고, 악은 그에 비하면 활발하고 똑똑하다. 영화가 파국으로 가기 위해선 의도했던 것들이 틀어져야 하는데, 추격자의 개미 슈퍼 아주머니 못지않은 가족들 덕분에 밍에게 담긴 악령들을 내보내는 퇴마는 역으로 되돌아온다. 알고 보면 다들 한 통속 아닌가 싶을 정도.


님이 일부러 내림굿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아닌데 도와주지 않는다면서 다른 곳에서 내림굿을 받아서 오히려 증상을 심하게 만들어 놓지를 않나, 어딜 봐도 멀쩡하지 않은 밍을 두고 어린아이와 근처에서 같이 생활한 모습이며, 중간중간 밍이 제대로 돌아온 거냐며 흔들리는 목소리에 답답한 건 우리의 몫이다. 공포영화에서 종종 하지 말라는 걸 굳이 꼭 해서 처참한 결과가 돌아오던데. 종구의 허망한 표정 비슷한 게 노이의 얼굴에도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종구의 선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신이 없었던 데 비해, 노이의 선택은 헷갈리지 않았다는 점. 이미 밍을 가둬 둔 문은 열릴 것이고, 퇴마는 수포로 돌아갈 거란 건 손모가지를 걸지 않아도 명백한 패였다.


희망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이리저리 방법을 찾으려 애쓰던 님이 무너지면서부터였다. 바얀 신의 목이 잘린 걸 보고 세상이 무너지듯 목을 놓아 울던 님이 퇴마를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밍의 꿈에 나오던 목이 잘린 사람이 정말 바얀 신이었을까. 그나마 너무나 괴롭지 않게 세상을 떠난 건 그녀의 복이라면 복일 것이다. 어차피 여기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놀랐던 건 님의 속마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낙 단단해 보여서 예상하지 못했다. 랑종이면서 바얀 신을 느낀 적 있냐는 노이의 말에 멈칫할 때, 너무 당연한 걸 물어서 어이가 없는 줄 알았더니, 정곡을 찔려서 멈칫한 거였다. 애초에 신이 있다고 했을 때, 인간의 감각으로 느껴야만 존재를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든든한 존재를 찾아 헤맨다. 흔들리면서 신을 믿는 건 제법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 놓였을 때, 답을 찾고 도움을 바라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오지 않는다면, 믿음은 흔들리고 좌절하게 되지 않던가.


밍을 가둔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퇴마가 잘 되었다면, 님이 죽지 않았다면과 같은 만약을 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럴 리 없다는 걸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권선징악스러운 이유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아싼티아 가문이 벌을 받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불가피한 사고로 죽인 것도 아니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공장 주인, 그를 욕하며 만든 인형에 바늘을 찔러 넣은 것쯤은 그리 잔인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용서할 생각이 없다.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한 고통의 불구덩이에 넣고 싶었던 것이다. 복수의 허망함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우연이라기보단 명백한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인재다. 노이가 바얀 신을 받아들였다면, 남편의 집안이 대대손손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지 않았다면, 천상의 고기라는 간판을 두고 개고기를 팔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노이는 왜 하필 밍이냐는 질문을 하기 전 가슴에 손을 얹어보는 게 좋았을 것이다. 밍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 이전 사람들, 현재까지 이어진 가족들의 잘못의 교차로가 밍이었을 뿐이다. 밍이라고 완전히 죄에서 자유로운 존재도 아닌 듯싶고.


진정한 복수를 하고 싶다면 노이가 직접 악령에 빙의되는 것보다 밍이 빙의가 되어 아파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고통이다. 그리고 더 완벽하게는, 모든 걸 걸 수 있는 밍에게 직접 노이가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 이 악령들은 무엇이 고통인지, 과정과 결말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이미 겪어보아서는 아닐까 싶을 만큼.


바얀 신이 다소 무심하게 느껴졌다면,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그른 거부하고자 얕은수를 쓰고 도망간 노이를 그렇게 선뜻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이가 진심으로 미안해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또한 만약 이 사태가 이렇게 된 원인이 가족의 잘못 때문이라면 달가워하진 않지만 악령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지금 대는 어찌어찌 넘어간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마닛, 노이, 님이 태어나기 전에도 이미 이런 곤경을 겨우 넘겼을지 모를 일이다.


절대적인 면에서는 바얀 신이 마을 신이자 조상 신 정도의 위치라는 점 때문이다. 밍 안에 들어있는 악령들은 어디에서 얼마나 왔는지 알 수 없다. 바얀 신이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은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이 가지 않게 하는 선까지일지도 모른다. 잔인하지만, 바얀 신의 여건 상 남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님을 먼저 제 손으로 거두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게 최선일 수도 있고 혹은 이렇게 속절없이 당하면서 스스로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떠났을지도.


사람과 함께 지내던 개들이 버려져 들개가 되어 사람을 공격할 수 있고, 법 없이 살 것 같다는 선량한 사람이라도 계기만 있다면 잔혹해질 수 있다. 악령들은 몸도 없이 떠돌고 있다가 너무나 쉽게 밍의 몸에 들어와서 못다한 욕망을 채우고, 욕을 하고, 폭력을 행한다.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밍에게서 악령을 빼내 단지에 가두려 할 뿐이다. 그마저도 그들을 속이려는 듯이 노이가 얼굴을 가린 채 밍 대신 퇴마 의식에 참여했다.


수많은 악령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아싼티야 집안의 남자들이 단명하지 않았다면, 밍을 그 공장에 데려놓지 않았다면 그 옛날 일을 누군들 한 번쯤 기억이나 했을까. 병 주고 약 주듯이 이제 와 그들의 마음을 달랜다고 큰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가두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는 그들을 가두기엔 너무나 약했고, 그들은 무엇이 사람들을 어그러뜨리고 흔들어놓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의심을 파고드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다만, 그들의 시작은 억울함이었겠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기괴하고 잔혹한 모습에 뭘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 까 하는 생각 같은 건 아무래도 소용없는 느낌이었다. 정말 끝까지 가버리지 않았나. 무력하게 지켜보는 입장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도.


그렇다면 다큐 팀은 왜 함께 이 수렁에 빠지게 됐을까. 다큐팀은 가족들의 업보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과정을 함께 했다. 관찰자이자 참여자다. 밍이 빙의되어가면서 피를 흘려 놀란 모습을 몰래 찍었고, 갈수록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도 님에게 밍이 별다른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리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고 쳐도, 진실을 생략하는 건 왜일까.


가족들이 굳이 먼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설득한 후 관찰카메라를 설치해서 밍의 기괴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밍의 가족들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할 때는 그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중엔 생사가 오가는 와중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다가 같이 봉변을 당했다. 님의 마지막 인터뷰는 언제 찍힌 것인지, 그들만 알고 우리는 알 수 없는 내용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다. 적절하게 거리를 두지도, 적절히 개입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너무나 힘든 고통의 시간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생각은 없었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위험하고 이상한 내용을 담게 될수록 그들은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즐기다 뒤늦게 도망치려 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카메라를 빼앗기고 마지막은 피사체로 남았다.



샨티는 퇴마가 끝나기 전엔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고 비장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아무도 나가지 못하고 공장에 주저앉았다.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건가. 악령들은 원하는 복수를 이뤘다.  엉뚱한 랑종의 도움으로  키를 꽂은 다른 차에 성큼 올라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누군가의 몸을 빌어  다른 누군가의 절실함에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해 주면서 힘을  키우게 될까. 처음에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 같은  잊어버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재미를 즐기고 있을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생기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그런  없고 그저 미끼에 걸렸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유투브 홈트레이닝 후기-땅끄부부/다노/클라우디아/강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