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고, 보고, 결국 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지금 보시게 될 이 글은 조금은 민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찰을 기록하다 보니 이번 글은 다소 강한 느낌이 담겼습니다.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나는 최근 ㅇㅇ열린 통합가정상담센터를 탐방했다.
이곳은 동구와 서구를 함께 맡고 있으며, 연간 5천 건의 상담을 처리한다고 한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상담사, 네 개뿐인 상담실. 그 좁은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사연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럼에도 국가지원은 줄었고, 현장은 이미 벅찬 상태였다.
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고 건수가 연간 30만 건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 몇 배는 될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숫자의 무게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 기관들의 ‘생태계’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관할 구청의 널찍한 공간을 떠올리면, 차라리 층 하나, 아니 반만 내어줘도 얼마나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문했던 공공기관들은 으레 너무 넓어서 어디를 가야 할지 헤맬 정도였지만, 정작 이렇게 필요한 곳에 왜 그 공간을 일부라도 내어주지 못하는 걸까?
그 넓은 공간에 빼곡히 사람들이 채운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보여주기식 행정’의 민낯이 아닐까?
설명을 하던 소장님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질문이 내게 던져지자 순간 당황스러웠다.
곰곰이 생각했지만, 결국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가족이니까.”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다.
하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연히 던져진 질문이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두려워서도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그 틀 자체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알게 된 부모가 곧 세상 그 자체다.
그 틀은 너무나 강력해서, 폭력이 일어나도 바깥으로 알리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건 자라면서도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 그 이상의 우주와도 같다.
그렇기에 결국 불가능에 가까운 침묵이 되어버린다.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고, 오히려 더 깊은 상처로 남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대물림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가족 안에서도 잘못은 잘못이라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이니까”라는 말이 침묵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상냥함 뒤에 숨은 조종도 가르쳐야 한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 뒤에 태도가 변하고, 눈빛이 차가워진다면 아이는 본능적으로 안다.
‘아, 엄마 아빠가 나를 싫어하네.’
그러면 아이는 결국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게 된다.
지금도 거절, 싫음을 표현하는 교육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거절할 수 있다”는 지식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거절해도 안전하다는 경험,
보호자 스스로도 태도를 점검해야 한다는 사실.
이 모든 걸 함께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결국 ‘포장된 다정함’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시어머니와 남편을 통해 똑똑히 경험했고, 얼마나 치명적인지 온몸으로 겪었다.
국가는 늘 “안전제일”을 외친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여주기식 처벌과 자극적인 보도에 치중한다.
물론 법적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근본 해결이 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가족 회복이 더 중요한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폭력인데 무슨 가족 회복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이미 파탄난 가족이라고 단정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회복이 불가능한 가족도 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밀착 관리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회복 가능한 가정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기본은 가족 회복에 두고 운영해야 한다.
피해자가 안전하게 치유되고, 가해자가 다시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슬픈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의식까지’ 바꾸는 프로그램.
그리고 건강한 가족으로 자랄 수 있는 토대.
이것이야말로 잠정적 원인을 뿌리째 없애는 길이 아닐까.
요즘 뉴스를 보면, 부모가 자식을, 학생이 교사를, 교사가 학생을 해치는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평생 들어온 상위 엘리트들의 무수한 비리들도 이어진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성공 = 명예 = 돈”이라는 공식을 주입해 왔기 때문이다.
흑수저, 금수저처럼 인간을 등급으로 나누고, 직업에 귀천을 두며 차별했다.
그 과정에서 인성과 공존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정말 안전한 사회를 원한다면, 보여주기식 처벌보다 인성교육 중심의 국가적 프로젝트가 시작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사람 한 사람을 ‘소우주’라 부른다.
왜일까? 아마도 그 존재가 복잡하고 신비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소우주가 이 세계 인구만큼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자.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그 누구도 완전히 같은 값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소우주가 처음 만나는 세계가 바로 ‘가족’이다.
나는 그래서 가정을 소국가라고 부르고 싶다.
그만큼 간단하지 않고,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장기간의 여정이 필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없애고 다시 만들고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틀로 단합하여 반드시 지켜야 한다.
국가의 미래는 결국 소국가인 가정에 해답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정은 작은 사회다. 그리고 한 나라를 이루는 작은 소국가 들이다.
부모가 독재적이면 → 아이는 눈치만 보며 주눅 들고,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부모가 무분별하게 자유롭기만 하면 → 아이는 기준을 배우지 못한 채 방황하기 쉽다.
자유와 평등 위에 규칙, 다정함과 단호함이 함께 있을 때 → 아이는 긍정적인 미래를 향할 수 있다.
이 소국가가 단단해야, 진짜 국가도 단단해질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두드릴 돌다리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리를 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단단해야 한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안전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나는 내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미래를 생각한다.
그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가정은 분명 사적인 공간이다.
개인의 존중과 자유가 가장 먼저 지켜져야 할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 폭력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순간 가정은 더 이상 ‘사적이기만 한 공간’이 아니다.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지켜야 할, 공적 시선이 필요해진다.
이 글은 에세이이자, 동시에 현장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기록한 후기다.
내가 살아낸 경험과, 상담소에서 본 현실, 그리고 교육과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았다.
불편할 수 있지만, 이제는 반드시 꺼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