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만에 만난 우리는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인도인 친구 N은 인도로, 중국인 친구 C는 일본으로, 나는 한국으로 귀국할 터였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았다.
호텔에 거의 도착했을 때, N이 역시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야시장에 가자고 했다. C도 좋은 생각이라며 당장 출발하자고 성화였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말려 봤지만, 포기할 친구들이 아님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각, 결국 우리는 택시를 타고 가까운 야시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시장 초입이었다. 넓은 길 중앙에 좌판이 줄지어 있고, 양쪽 길가에 작은 상점들이 있었다. 그런데 구글 지도에 새벽 2시로 나온 영업 종료 시각은 잘못된 듯했다. 좌판의 7할은 이미 장사를 접었고, 2할도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머지 1할의 상인들만 눈을 반짝이며 우리를 바라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다 바선생을 보고야 말았다. 과거 방콕 출장에서 어느 무심한 바선생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온 후로 나는 바선생 공포증에 걸렸다. 샤샤샥 길을 가로지르는 바선생은 얼핏 봐도 최소 세 분이었다. 외마디 비명으로 등장을 알렸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그렇게나 쿨할 수가 없었다. 씩씩하게 “괜찮아, 바닥을 보지 마.”라며 전진할 뿐이었다.
그러나 열려 있는 상점 대부분은 술집 아니면 기념품 가게였다. 100m쯤 걸었는데도 볼거리가 평일 낮 지상파 방송보다도 없었다. 한 가게에서 형형색색 페니스 모양의 비누를 발견하고 깔깔 웃던 C의 얼굴에서도 점차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혹시 몰라 모자이크
우리는 길가에 서서 머리를 맞대고 다음 행보를 논의했다. 친구들은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도 상황이 비슷할 듯하니, 술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나 마시자고 했다. 끊임없이 스텝을 밟으며 바닥을 경계하던 나는 어디든 좋으니 제발 바선생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주문으로 유령을 소환한 듯, 갑자기 사방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순진한 관광객을 호시탐탐 노리며 맴돌던 이들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대여섯쯤 되는 호객꾼들은 메뉴판을 들이밀며 “비어! 비어!” “보이쇼! 걸쇼!” 등을 외쳤다.
C: “흠, 여기까지 왔으니 쇼라도 볼까?”
N: “난 걸 쇼보다는 보이 쇼를 보고 싶어.”
나: “보이든 걸이든 다 좋으니 제발 바선생 없는 실내로 들어가자.”
대통합의 순간을 눈치챈 한 여성이 바로 왼쪽을 가리키며 보이 쇼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곳엔 유니세프 홍보 영상에 나오는 아프리카 판잣집 같은 건물이 있었다. 쇼가 열릴 것 같은 곳은 전혀 아니었지만,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좁고 어두컴컴한 문으로 들어가며, ‘인신매매라도 당하면 어쩌지,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애들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튀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쪼리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올걸.’이라는 작은 후회와 함께.
실내에 들어선 순간, 머리에 망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ㄷ자 모양의 높은 단이 무대처럼 꾸며져 있고, 그 위에 열 명쯤 되는 남자들이 폴대를 잡고 서있었다. 그들은 모두 흰색 삼각팬티만 입은 채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너무 어려 보였다.
2.
방콕에는 4번째 방문이었지만, 이전까진 쇼를 보기는커녕 유흥가에 발을 들인 적도 없었다. 우연히 찾은 야시장에서도 ‘쇼’를 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던 어떤 것, 어쩌면 외면하고 싶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 버렸다.
그들이 정말 미성년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 서너 명은 정말로 그래 보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20대 초반 언저리로 보였다. 그제야 생각해 보니, ‘보이 쇼’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엔 비유적 표현인 줄 알았다. 진짜 소년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구멍가게보다도 허름한 실내, 다짜고짜 벗고 있는 남자들, 미소 띤 그들의 어려 보이는 얼굴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귀에는 날카로운 소음이, 눈에는 알록달록 조명이 꽂혔다. 손님이 없어 쉬던 중 우리가 들어오자 음악과 조명을 다시 켠 듯했다.
정신없는 댄스 음악을 신호 삼아, 남자들은 골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호객꾼의 ‘보이 쇼’라는 말에 영화 소개 채널에서 본 ‘매직 마이크’처럼 노래와 춤을 곁들인 공연을 떠올렸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일평생 상상도 못 해본, 기승전결 없이 적나라한 골반 털기에 가까웠다.
가만히 있어도 민망한 판에 열과 성을 다해 춤을 추는 그들을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민망했고, 미안했고, 마음이 아팠다. 눈길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미 가게 중앙,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맥주를 시키고 있었다. 버드와이저 세 병을 주문하며 야무진 C는 흥정까지 했다. 일단 C 옆에 앉았지만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C와 N은 웃으면서 “너는 정말 순진해서 귀여워”라고 말했지만, 나는 단지 불편할 뿐이었다.
이젠 단순히 민망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다 보니, 복잡한 생각과 가설이 머리를 채웠다. 눈앞을 점유한 시각적 충격을 외면하려 애쓰던 중, 나이키 아동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3.
1996년 6월, <라이프> 지에 실린 사진 한 장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작디작은 파키스탄 아이가 쪼그려 앉아 신발과 축구공을 만드는 사진이었다. 이 아동을 고용한 회사는 다름 아닌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였다.
서구의 인권 운동가들은 아동 인권 침해이자 심각한 착취라며 들고일어났다. 불매 운동을 포함, 거센 비난에 부딪힌 나이키는 결국 아동 직원들을 해고했다. 기업 차원에서 재발 방지를 위해 철저히 노력했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아동 후원 프로젝트도 벌였다. 오늘날에도 이 사건은 기업 위기 극복과 ESG 경영의 성공 사례로 인용된다.
정의가 구현된 것 같았다. 아이들은 대기업의 착취에서 벗어났고, ‘나쁜 기업’은 개과천선해 ‘착한 기업’으로 거듭났으니까.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아이들의 삶의 질이 오히려 낮아진 것이다.
저임금이나마 고정적으로 받던 일자리를 잃으면서, 아이들은 생계가 막막해지거나 수업료를 내지 못해 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 임금이 더 낮고 영세한 일자리로 밀려난 아이들은 더 오랜 시간 일해도 더 적은 돈밖에 못 벌었다. 이런 직장에나마 재취업할 수 있었던 아이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존을 위해 도둑질, 성매매 등 범죄의 길로 들어선 아동들도 있었으므로.
미성년자의 인권, 교육권,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지 않는 고용은 나쁘다. 이들을 착취하고 짓밟는 개인, 기업, 사회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고용을 막기 전, 이들을 위한 대안을 사회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당장의 생계, 나아가 생존이 ‘나쁜’ 일자리에 달려있다면 단순한 고용 중단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내 눈앞에 있는 이들 중 누군가는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싶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단순히 춤추는 게 좋아서 이 직업을 선택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에게 민망함을 안겨준 이 직업이 그들에게는 자부심, 야심, 자아실현의 수단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댄서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방적인 동정은 오만할 뿐이라고. 세상 모든 일에는 이면이, 모든 이에게는 사정이 있으니까.
동시에 이마저도 죄책감을 정당화하려는 자기 방어인 걸까ㅡ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이런 곳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 미성년자 착취에 일조한 거면 어떡하지 싶어서. 때때로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짊어지려 하는 경향이 있다.
4.
고개를 숙인 채 생각이 꼬리를 물던 중, ‘마담’ 같은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나를 유심히 본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머니는 푸근하지만 미심쩍은 미소를 짓더니,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데려오며 나에게 가까이 와서 보라는 듯 손짓했다.
흰색 삼각팬티만 입고 있는 건 다른 남자들과 같았으나, 이 남자는 웨스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얼굴엔 에비에이터 선글라스를 쓰고, 드라마 <꽃보다 남자> 속 구준표가 입은 코트처럼 목둘레에 폭신한 털을 두른 조끼를 입었다. 심지어 구준표와 똑같은 소라빵 머리를 하고! 그는 수컷 공작이 꼬리를 뽐내듯 털조끼를 들썩이며 자신감 넘치게 걸어왔다.
말 그대로 기겁한 나는, 제발 내 옆에 앉지 말라고 말하며 C의 등 뒤로 숨었다. 아마도 그 가게의 ‘에이스’인듯한 태국 구준표는 거리를 살짝 두고 앉아 내 쪽을 바라봤다. 야속하게도 C와 N은 깔깔거리며 즐거워했고, 모든 민망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C의 등과 의자 등받이 사이에 반쯤 몸을 숨긴 나에게 태국 구준표는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불편하고 무서워서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슬쩍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도 약간은 멋쩍은, 무안한 듯한 미소가 서려있었다.
당신 탓이 아니라고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중앙 무대 아래에서 갑자기 쥐가 튀어나왔다. 비명을 지른 나는 다시 한번 C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리고 더는 참을 수 없으니 당장 여기서 나가겠다고 소리쳤다. 쥐까지 출현하니, C와 N도 그곳에서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어차피 댄서들의 춤사위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반도 채 못 마신 맥주병을 두고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는데, 댄서들은 관광 홍보대사처럼 한결같이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배웅했다. 20분도 안 되어 가게를 나서는 우리를 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우리의 방콕 보이 쇼 경험은 처음 시작할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끝났다. 거리로 나온 우리는 다른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시장 골목을 쏘다녔다. 전혀 쇼 같지 않은 쇼를 본 후의 뒷맛이 씁쓸했기 때문이었을지도.
이상하고 슬펐던 야시장 체험
길에는 딱 봐도 남자인 사람들이 여장을 하고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그들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슬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시를 잡으러 밝은 대로변으로 나오며, 나는 어두운 골목을 한참 응시했다.